할미는 처음이라: 두 번째 이야기

외계인과의 대화

by 샛별




아직 지구의 말을 배우지 못한 아이와 어어 아아~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이 작은 인간이 내게 보내는 말들은 외계어에 가깝다. 마치 ET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눈빛만 교환하며 이야기하지만 서로 너무도 잘 통하는 기분이다. 사랑으로 가득 찬 두 사람 사이에는 사실 말이란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것이 무언지도 모를 아이와 눈빛 하나로도 이렇게 많은 것을, 행복한 마음으로 이야기 나눌 수 있으니 말이다.

나날이 외계어는 늘어나고 발전하여 어느 날, 유연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뇌를 가진 아이는 지구인의 말을 배워갈 것이다. 그러나 말이 실체화 되지 않았음에도 행복한 듣기란 이리 즐거운 일이구나를 아기의 옹알이를 통해 나는 다시 배운다.


어른 들은 모두 떠나고 없는 빈 집에서 아이와 놀이를 한다. 내가 이렇게 수다스러울 수도 있구나, 내게 이렇게 창의적인 면도 있었던가?

“이건 무엇이란다. 친구가 될 수 있게 이름을 지을까. 무엇? 그래 그게 좋겠다.” 혼잣말하며 아이에게 보여주고 손을 가져다 만지게도 해 준다. 매일 일상이 되어버린 집안 한 바퀴 둘러보기 시간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늘 인사를 나누던 벽에 걸린 삐숑 강아지 시계 (이 집의 강아지도 삐숑이다)를 바라보며 아기가 방긋 웃었다. 그리고 점차 발전하더니 이제는 만날 때마다 까르르 소리를 내며 웃는다. 사물, 멍멍이 시계가 아이의 세상 속으로 들어왔나 보다. 내 이야기가 믿어지지 않아 하더니 백일 사진을 찍던 날, 아이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 강아지 시계를 들고 아들과 며늘아이가 아기를 불렀다. 성공적인 선택이었다. 사진 속 아기는 또렷한 눈매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점박이 강아지 멍이, 너구리 인형 구리, 러시아 인형 시카언니(마트료시카 인형), 휴지보관케이스 곰이, 벽에 걸린 클림트의 키스 그림은 예쁜 아줌마 아이의 친구들이 하루하루 늘어갔다.

한 바퀴 친구들과 만나는 집안 산책 시간이 끝나면 둘의 놀이 시간이다. 엄마의 짐볼은 앉은 채 살랑살랑 흔들흔들 방방이 되고 아빠의 회전의자는 회전자동차가 되어 빵빵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회전 자동차를 탄 아기에게 책장 위에 올려 둔 조그만 사자 인형을 가리키며 기억 저편에서 몇 단어만 남아있는 노랫말들을 찾아내어 “캔자스 외딴 시골집에서... “ 오즈의 마법사 노래를 부른다. 먼 기억 속 노래가 다시 살아나는 시간이다. 나는 아이의 마음이 되어, 젊은 엄마로 돌아가 소곤소곤 이야기를 들려주고 노래를 부른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집안 둘러보기 시간이었다. 벽면에 부착된 유리 장식장 안에는 두 아들이 여행을 갈 때마다 사들인 스노볼들이 있었다. 며늘아이도 그것들을 좋아해서 그룹으로 나뉘어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가고 싶은 곳이 많은 나는 이루지 못한 나의 꿈을 생각하며 그 앞에 서서 아기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저기는 포르투갈, 프랑스, 독일, 호주... 나라의 이름과 도시를, 아들들이 여행에서 돌아와 눈을 반짝이며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을 기억해 내었다. “ 아가야! 너는 넓은 세상을 맘껏 다니렴. 아빠와 큰아빠보다 더 넓은 세상을 누비렴.” 그런 소망을 들려주었었다.

그날, 아기띠를 앞으로 매고 아기의 눈을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아기가 “오!” 하며 조그만 입을 뾰족하니 내밀었다. 세상에나! 저 오므려 동그랗게 내민 입술이라니. 태어나서 처음 또 한 물건을 인지한 호기심 가득 찬 눈빛 이라니! 그런 아이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울컥하며 경이로움이 물밀듯 밀려왔다. 아! 이렇게 세상을 배워 나가는구나. 우리도 이렇게 세상을 배워 왔겠구나.

문득, 한 친구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미국에서 말을 배우기 전인 작은 아이와 아이의 누나에게 한국에 돌아와 미국에서 자주 보던 포카혼타스 비디오를 빌려다 틀어주었단다. 이제 한국말을 막 배운 아이가 깜짝 놀라며 한 말 “어, 포카혼타스 말하네” 였단다. 그 아이에게 미국에서 누나가 보던 비디오 속 포카혼타스의 언어는 그냥 소음 같았던 것이었을까. 같은 그림 속 우리들만의 언어를 처음 말로 인지한 꼬마 아이처럼 바로 그날 매일 할머니와 몇 번씩 들여다보던 장식장 속 스노볼의 반짝임이나 작은 장식물들이 생생한 실체로, 말하는 포카혼타스처럼 아기에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왜 젊은 날의 나는 두 아이를 키웠으면서도 이런 반짝임의 많은 순간들을 기억하지 못할까? 내 시대의 모든 엄마들이 그런 것일까?

요즘의 젊은 엄마들은 모두 느끼고 있는 것일까?


젊은 엄마로서 나를 돌아보았다. 삼십 대 초. 중반의 서툴고 젊은 엄마로서의 나의 시간.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천기저귀를 빨고, 삶고, 널고 개어야 하는 날들. 그 펄렁이던 줄줄이 널린 하얀 깃발들의 행렬을 지탱하느라 하얗게 바래가던 나의 시간들. 잠이 모자라 죽을 것만 같았고, 힘에 부쳐서 순간들을 놓쳤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육아의 그날들.

이제 할미의 육아의 시간, 밤 시간은 아기를 부모에게 돌려주고 휴일이면 자유의 시간을 누리며 충전하고 돌아와 행복한 육아의 꽃밭을 거닌다. 사이사이 쉼이 허락된 불과 몇 개월 아이를 돌보는 시간들은, 이곳저곳이 삐걱대어 한의원을 드나들며 헤매듯 보내었어도 할미의 육아는 행복하기만 했다.

노년의 시간에 주어진 이 짧은 기쁨이 늙어가는 내 삶에 최상급의 거름이 될 거라 믿는다. 사랑한다. 아가야~~~! 나의 꼬마 친구야~~~!




아이를 돌보던 어느 주말에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이제는 세상에 안 계신 우리들의 엄마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는 그 나이만큼의 엄마만을 이해할 수 있은 것 같다며 함께 공감의 물개박수를 쳤다. 내 부모가 인생의 가을날 손주들을 바라보던 눈길이 이제야 더욱 실감 나게 다가오고 그분들이 새삼 더욱 그리워진다. 어느새 나도 어른들의 눈길을 배워간다. 나이만큼 배워야 하는 인생의 공부는 끝이 없나 보다.


Main photo : by Guick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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