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술학과에 입학하고 한창 겉멋이 들어 들떠 있을 때였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책 몇 권은 가방 없이 손에 들거나 겨드랑이에 껴야 폼이 나는 줄 생각했나 보다. 더구나 미대생들은 스케치북은 가슴에 안고 회구 박스나 캔버스 같은 큰 짐이 많기도 했다. 그런 우쭐한 날들이 스무 살 초반을 채우고 있었다. 남학생들은 또 어떤가. 머리는 삐죽삐죽 뻗치거나 눈이 안 보이도록 기르기도 했으며 군복에 물을 들여 입거나 허름한 신발을 끌고 다녔다. 몇 명 단정한 친구들 빼곤 대부분 다 큰 남자인 척 세상 깊은 구석까지 다녀온 듯 여하튼 그래 보였다.
2. 난 화장도 진하게 못 하는 어린애였고 말수가 적어 친구 사귀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어느새 친구들과 수업을 빼먹고 학교 앞 카페에서 음악을 신청해서 듣거나 괜한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야외스케치 명목으로 비포장 길을 버스로 덜컹대고 달려가선 놀기만 한 적도 여러 날이다.
3. 겨울방학엔 작업을 핑계로 친구와 학교 실기실에서 만났다. 전기포트에 물을 끓여 컵라면에 도시락을 먹고 믹스 커피를 마셨다. 곱은 손가락을 호호 불며 그림은 쪼끔 밖에 못 그리고 막차시간에 쫓겨 버스를 탔다. 어느 날엔 유명 작가 그림 전시 오픈일에 맞춰 백화점 갤러리에 갔다. 오픈일엔 생강차나 레몬차 달콤한 쿠키까지 공짜로 먹을 수 있어서 그림 구경한답시고 꽤 신나고 재밌었다.
4. 간판이 예뻐서 들어간 '러브 보트'라는 카페에서 비싼 커피를 마셨다. 겨울이 올 즈음 밖은 벌써 캄캄한 저녁이고 따뜻한 조명과 배의 선실처럼 꾸며진 좀 어두운 실내 그리고 석유난로 타는 냄새가 났다. 작은 스케치북에 실내를 스케치했다. 물 잔의 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흘리며 좋아서 어쩔 줄 모르던 스무 살의 어느 날 난 꽤 잘 지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