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 머신

옛날 극장

by 바람세탁소


친구와의 약속으로 두툼한 스웨터에 외투까지 아주 겨울스럽게 칭칭 두르고 터미널로 향했다. 익숙지 않은 오랜만의 외출엔 꼭 두고 온 것이 너무 많다. 좀 길다 싶은 맨 손톱에 거스름, 거울 앞에 두고 온 콤팩트와 립스틱, 가르마를 잘못 탄 건지 머리카락은 자꾸 한쪽으로 흘러내렸다. 하다못해 공중전화를 걸 동전도 바꿔야 하고 어쩜 늦게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식구들의 모자란 저녁밥도 걱정이다. 오랜만에 신겨진 하이힐은 영 불편한 손님 같았다. 표를 끊고 나니 바로 출발 시간이다. 휴대폰이 없어서 공중전화에서 가까스로 통화를 하고 차에 올랐다. 거의 십오 년여 못 만난 친구를 만나러 가는 중이다. 그런데 친구에게 줄 거라곤 엊그제 산 이병률의 산문집 '끌림' 한 권뿐이니 아쉽다. 버스에 전자시계는 약을 갈아줬어야 하는지 도대체 시각을 알 수 없었지만 곧 출발했다. 오랜만에 차멀미가 걱정이지만 친구에게 줄 책 표지를 펼쳤다. 글귀 한 줄 한 줄이 꼭 내가 하고 싶던 말 같아서 금세 몇 장을 넘겼다. 평범한 거리 풍경과 사람들을 찍은 사진과 어렵지 않게 쓰인 글이 머릿속 마음속으로 걸어 다녔다. 어쩌면 꼭 한번 가고 싶던 길로 나온 것 같은 기쁨. 난 겨우 6,000원짜리 버스표 하나를 끊었고 그립던 친구를 찾아가는 길이다. '좋다. 정말 좋아.' 창밖으론 영화에서처럼 스륵 스륵 시내의 어지러운 간판들과 상점들 다양한 군상이 가로수를 훑고 있었다. 나는 온전히 내 것인 마음을 들고 버스를 탄 것이다. 마치 두 번째 데이트하러 나가는 아가씨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쩜 두려움일 수도 있다. 혹시 친구가 이뤄 낸 것을 기뻐해 주는 대신 상처를 담아올 수도 있는. 그러나 버스에서 내려 서점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옛 기억이 줄줄 따라 나왔다. 친구가 내 등을 건드리는 순간 우린 그냥 웃기만 했다. 좀 더 세련되고 성숙해졌을 뿐 변한 것 없는 친구와 예전처럼 점심으로 칼국수를 먹었다. 친구의 안내로 송도 흥륜사를 돌아보며 길거리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친구의 작업실에 들어섰다. 친구는 들어서자마자 라디오를 틀었고 마침 '그런~ 슬픈 눈으로~~~.' 김창완 아저씨의 옛 노래가 흘러나왔다. 예전 학교 실기실에선 전기 포트에서 물 끓기를 한참 기다렸다 커피를 마시고 컵라면을 먹었다. 최신 커피포트는 스위치를 올리자마자 순식간에 김이 '폴폴' 났다. 커피는 아까 마셨으므로 대신 녹차를 두어 잔 마시며 그림 얘기도 했다. '이제 그림 좀 그려~~.' 진심으로 나를 타일러 주는 친구. 고마웠고 난 부끄러웠다. 친구는 그때 그 시간에도 그랬듯 친절했고 나를 격려해주며 여전히 까르르 잘 웃었다. 이십여 년 전 막연히 바라던 미래의 모습으로 사는듯한 친구는 행복해 보였고 기특했다. 아주 잘 어울렸다.


곧 봄이 올 것 같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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