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불러낸 생각과 감정을 따라가는 글
[메인 이미지 대체 텍스트: 흑백 바닷가 사진이 중앙에 배치된 책 표지. 하단에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 제목과 "찬란하고 구질한 질문과 투쟁에 관하여", 신성아 지음, 마티 출판 표시가 있다.
오늘 이야기할 책은 신성아 작가의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이다.
당시 국회의원 보좌진 일을 하던 저자는 어느 날 딸의 아침 등교 준비를 맡은 남편을 통해 아이가 코피가 멈추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뒤, 병원을 찾았던 남편을 통해 딸의 소아암 소식을 듣게 된다.
한 번도 일하지 않는 자신을 생각해 본 적 없는 저자는 그날 이후로 선택의 여지없이 모든 커리어를 전면 중단하고 병원에서 딸의 간병을 담당하게 된다. 이 책은 그 기간 동안 딸을 돌보며 치열하게 고민했던 사유의 결과물이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어쩌면 아픈 아이를 돌보는 눈물겨운 엄마의 수기를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저자는 오히려 이런 절박한 상황을 개인적인 불운으로만 결론 맺지 않는다.
대신 깊은 성찰과 사유로 간병을 오롯이 가족의 몫으로만 돌리는 국가 시스템의 부재와 인간을 단지 ‘환자와 보호자’라는 기능적 역할로 취급해 버리는 병원의 구조, 그리고 ‘모성’이라는 이름 뒤에 ‘여성’을 가두고, 또한 여성이라는 역할에 ‘독박 돌봄’을 당연시하는 사회에 강하게 문제 제기한다.
그리고 나아가 독자들로 하여금 각자도생 하거나 ’ 각자도사‘하지 않고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함을 이야기하며 마무리한다.
이 책을 중반 정도 읽어 나갈 즈음까지만 해도 저자의 주장에 깊이 동의했던 상황이라 생각을 정리하는 글을 적을 때는, 나 또한 저자의 주장에 힘을 싣는 ‘돌봄’ 공공성의 중요성과 사회적 시스템 보완에 대해 적으려 했었다.
하지만 <5막: 의학의 태도 중 응급실에서 묻다> 편을 마주하는 순간, 나의 관심은 죽음이라는 절대적 진실 앞에 선 인간의 ‘존엄’에 머물렀다.
그리고 존엄에 대한 생각을 적었던 이전 글이 쉽게 허물어지는 위태로운 모래성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생각이 들자 마치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얼얼함 속에 말문이 막혔다.
“날이 밝자 주치의가 전공의들과 함께 환자를 찾아왔다. 마침 환자가 화장실에 가서 보호자만 침상을 지키고 있었다. 주치의는 개의치 않고 환자의 언니라는 보호자와 대화를 이어갔다. (중략..)
이제 항암치료는 의미가 없고, 통증 조절과 완화치료로 넘어갈 단계이니 우리 병원의 담당 부처에서 안내를 해줄 거라고 했다. 언니가 자꾸 "그런데, 그런데" 하며 의사의 말을 끊자 의사는 혹시 지금 이 상황이 아직 이해가 안 되냐고 친절하게 물었다.
이해를 못 하겠다고 하면 당신 동생의 여명이 얼마 안 남았으며 우리 병원에서는 더 할 수 있는 치료가 없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시 설명할 기세였다. 언니는 이해를 못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귀를 쫑긋 세우지 않아도, 각종 알람음 속에서 뚝뚝 끊겨 들리는 대화만으로도 주변 침상 서너 개 반경에 있는 모든 어른이 이 상황을 순식간에 파악했다.
언니가 결국은 말을 맺었다. “그런데 동생이 치료를 더 받고 싶어 해요." 의사는 대답했다. “환자가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있는 치료가 없습니다. 의미가 없어요." 환자가 돌아오고 의사는 떠났다.” 185~186p.
이 서늘한 광경을 복기하며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읽고 ‘존엄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가’라는 글을 썼던 나의 시도는 주춧돌도 놓지 않은 터 위에서 대들보를 내릴 생각만 하고 있는 격이었다.
나는 이전 글에서 의학적 치료의 의미 없음을 선고받았음에도 삶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마음에 물음표가 생겼었다. 그리고 나약함이면서도 용기 같은 그 마음을 '붙드는 용기'로, 의학적 집착 대신 남은 삶의 시간을 껴안아 주체적 삶의 질을 택하는 것을 '내려놓는 용기'로 표현했었다.
그리고 그 용기를 선택하기 이전에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위인용 글을 통해 온전한 나로서 주체적 선택을 할 수 있는 환경조차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냉철한 인간이라 한들 죽음 앞에서는 한 없이 약하고 압도된 존재에 가깝다.
의학은 효율과 과학의 이름으로 찰나의 순간에 판단을 고지하지만, 인간의 시간은 어디 그런가. 인간은 정보를 주입하면 곧바로 수용을 출력해 내는 기계가 아니다.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이 속도의 간극은 더 벌어질 것이다.
우리는 선택을 강요받기 전에 그 두려움을 충분히 발화할 수 있는 ‘애도의 시간’을 보장받아야 한다.
또한 그때의 우리는 느닷없는 발병으로 통증과 고립을 겪고, 경제적 부담을 느낄 것이며, 여의치 않는 돌봄의 부재 속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감정을 매 순간 느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존엄한 선택을 말한다 한들 나다운 결정을 했다 말할 수 있을까.
이 글을 통해 존엄의 순간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결국 존엄이란, 생의 마지막까지 자신의 의지가 외부의 압박이나 시스템적 결핍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채 ‘나다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리여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의료적 진단이 부정적이라 해도 끝까지 치료를 시도하는 것이 나다울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그 시간이 다할 때까지 완화 치료를 받으며 살아있는 순간까지 소중한 관계에 집중하는 것이 나 다울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종교에 기대어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 하는 것이 나 다울 수 있다.
즉, 존엄은 선택의 결과가 ‘현명한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선택이 온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사회적 안전망이 존재해야 한다.
의학적 사실을 통보했다면, 그 충격을 인간이 견뎌내고 소화할 수 있도록 돕는 심리적·구조적 장치 또한 반드시 병행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전문의의 고지와 함께 정신과 전문의가 동행하는 자리가 마련된다면 어떨까.
상황에 따라 ‘치료 불가능’이 ‘돌봄 없음’을 의미하지 않음을 이해하고, 완화의료가 또 다른 치료임을 이해하는 사회적 성숙도가 높은 문화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면 어떨까.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오늘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독박 돌봄’, ‘간병 살인’ ‘공공시스템의 부재“가 난무하는 지금의 현실에서 위 주장들이 얼마나 허황된 생각으로 들릴지 나 또한 충분히 이해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적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은, 변화는 문제를 인식하는 자리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냉정한 의학의 시간과 뜨거운 인간의 시간이 조금이라도 그 보폭을 맞출 수 있는 사회, 그래서 죽음이라는 거대한 두려움 앞에서도 끝까지 ‘나다운 인간’으로 머물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안녕하세요 순간의 기록자입니다.
주제가 주제이다 보니 계속 질문에 질문이 꼬리를 뭅니다.
나는 지금 이 사회의 일원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나다운 결정이 통용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자문하게 됩니다.
부족하나마 제 글이 여러분께도 물음표를 드리우는 순간이었기를 소망해 봅니다.
하루가 다르게 봄이 오고 있음을 느낍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다음 글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