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불러낸 생각과 감정을 따라가는 글
[메인 이미지 대체 텍스트: 푸른색과 보랏빛이 섞인 그라데이션 배경의 책 표지. 중앙에 흰 곡선과 함께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제목이 세로로 적혀 있으며, 좌우에는 검은색 띠에 영문 제목 “Being Mortal”과 저자 아툴 가완디, 출판사 부키 정보가 표기되어 있다.]
오늘 이야기해 볼 책은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이다. 이 책을 읽으며 <페이지 너머의 풍경 2>에서 소개했던 홍영아 작가의 『그렇게 죽지 않는다』가 떠올랐다.
나에게 홍영아 작가의 책은 기계적 생존에서,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과 질문을 던지는 책이었다. 반면 아툴 가완디의 책은 죽는 순간까지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지키며, '어떻게 존엄하게 살다 죽을 것인가'라는 생의 본질적인 태도를 묻고 있었다.
“암 자체는 고칠 수 없었다. [중략..] 신경외과 주치의는 그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했다. 하나는 고통을 경감시켜 주는 완화 치료, 다른 하나는 척추에서 점점 자라나는 암세포를 제거하기 위한 수술이었다. 라자로프는 수술을 선택했다 [중략..] 무슨 짓을 해도 잘해야 몇 달 이상 살지 못할 것이고, 수술에는 위험이 따른다. [중략..] 수술로 삶의 질이 나빠지고 수명이 단축될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신경외과 주치의가 이 모든 가능성을 라자로프에게 충분히 설명했고, 그는 자신이 수술을 원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중략..] 당시 그의 결정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에 관한 것이 아니다. [중략..] 우리는 그의 병을 둘러싼 현실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다.
암 주치의, 방사선 치료사, 외과 집도의 등 절대 고칠 수 없는 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몇 달에 걸쳐 그의 치료를 도왔던 의료진 모두가 그 문제를 둘러싼 큰 그림이나 의료진의 궁극적인 한계에 대해서 논의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14~15, 17쪽 <서문>
위 단락은 서문에 나오는 이야기다. 암이 온몸으로 퍼졌고, 회복 가능성은 없으며, 수술 도중 사망할 수도 있다는 설명을 들었음에도 라자로프는 왜 수술을 선택했을까. 분명 이성적 판단만 놓고 본다면 완화치료가 더 합리적인 선택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그의 결정이 생의 의지나 애착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론 죽음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함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를 무턱대고 비판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인간이 유한한 존재임을 알면서도 막상 그 문턱 앞에 서면 합리적 판단을 내리면서도 동시에 그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자로프가 설령 기적을 기대하는 마음이었다 해도 어리석다 말할 수 없었고, 현실을 부정했다는 비난 또한 성급한 단정일 뿐이었다. 그의 선택에 물음표를 가지면 가질수록 나는 그 마음이 더 안쓰러웠다. 누가 뭐라 하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삶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아 하는 그 마음은 나약함이면서도 동시에 처절한 용기처럼 느껴졌다.
더불어 다른 질문도 떠올랐다. 삶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그 마음이 용기라면, 의학적 집착 대신 삶의 질을 선택하는 마음은 또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우리는 방송을 통해 미담처럼 병마와 싸우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기적이 일어나길 기원한다. 그러나 멈추겠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용기라 부르지 않는다.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내려놓음’을 결정하는 것은 생의 포기가 아니라 남은 시간을 어떻게 나답게 채울 것인가에 대한 능동적인 응답이지 않을까. 그것 또한 존엄의 또 다른 모습이며, 다른 방향의 용기니까.
그렇다면 인간의 존엄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단순히 생물학적 생명을 연장하는 데 있을까. 아니면 남은 시간이 짧더라도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평안한 상태로 유지하여 주도적 삶을 유지할 수 있게 돕는 데 있을까.
"심각한 질병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것 말고도 해야 할 다른 중요한 일들이 많다. 조사를 해 보면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고통을 피하고, 가족 및 친구들과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하고, 주변과 상황을 자각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잃지 않고, 타인에게 짐이 되지 않고, 자신의 삶이 완결됐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다.
기술에 의존한 의학적 처치는 그런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완전히 실패했다. 그리고 그 실패에 따른 대가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이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돈을 어떻게 마련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사람들이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을 성취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줄 의료 복지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느냐는 것이다. " 240쪽 <내려놓기>
질문은 자연스레 개인의 태도를 넘어 사회적 시스템과 돌봄의 환경으로 향했다.
책에서는 이야기한다. 나이가 들고 약해지면 마치 수순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호’라는 이름 아래 삶의 주도권을 빼앗긴다. 한평생 살았던 집에서 살다 죽고 싶다는 바람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거부되고, 익숙한 공간은 낯선 요양 시설로 대체된다.
"앨리스 할머니는 사생활과 삶에 대한 주도권을 모두 잃었다. 병원환자복을 입고 지낼 때가 대부분이었다. 직원들이 깨우면 일어나고, 목욕시켜 주면 하고, 옷을 입혀 주면 입고, 먹으라고 하면 먹었다. 또한 직원들이 정해 주는 아무 하고나 같은 방을 써야 했다. 할머니의 생각과 관계없이 선택된 룸메이트들이 여러 명 거쳐 갔다. 모두 인지 능력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조용했고, 어떤 사람은 밤에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다. 할머니는 감금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늙었다는 죄로 감옥에 갇힌 것만 같았다." 119쪽 <의존>
그리고 원치 않았던 요양원에서의 삶 또한 효율과 관리의 언어 속에서 점차 관리의 대상으로 환원된다. 이쯤에서 우리는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묻게 된다.
죽음의 문턱이 코앞에 닥쳐, 붙드는 용기와 내려놓는 용기를 경황없이 결정하기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를 먼저 짚어보고 보완해 나가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책에서 소개된 토머스의 모델은 희망적이었다. 그는 경영진의 효율성이 아닌, 노인과 돌봄 인력의 '관계'에 집중했다.
"처음 루 할아버지의 마음을 끈 것은 그곳의 시각적인 분위기였다. 마음을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획일화된 시설의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막상 입주를 한 다음에는 그곳의 생활 방식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자신이 원할 때 자고, 원할 때 일어나는 게 가능했다. 그것만 해도 루 할아버지에게는 신세계였다.
아침 일곱 시에 직원들이 복도를 따라 퍼레이드를 벌이듯 행진해 들어와 모든 사람을 서둘러 샤워시켜 옷을 입히고, 줄지어 약을 타 먹게 하고, 단체로 밥을 먹이는 일이 없었다. 대부분의 요양원(토머스가 일을 시작했던 체이스 메모리얼 요양원을 포함해서)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간호조무사들은 조리사들의 일정에 맞춰 주민들을 준비시키고, 조리사들은 단체 활동 담당자들의 일정에 맞춰 주민들에게 밥을 먹이며, 단체 활동 담당자들은 청소 직원들의 일정에 맞춰 주민들이 방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이후에도 이런 식의 연쇄 작용이 계속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효율성이라는 이름 아래 계획된다. 이를 위해 경영진들은 일정을 정하고 직원들에게 책임을 분담한다.
하지만 토머스는 이 모델을 뒤집었다. 그는 일에 대한 주도권을 경영진이 아닌 일선에서 직접 노인을 돌보는 직원들에게 넘겼다. 그들로 하여금 각각 몇 명의 주민들에게만 집중할 수 있게끔 했고, 여러 분야로 팀을 나누기보다는 한 사람이 전반적인 일을 관장할 수 있도록 했다. 한 사람이 요리와 청소를 비롯해 필요한 일은 무엇이든 언제나 돕게 했다. (약을 챙겨 주는 것처럼 의학적인 일은 간호사의 도움을 받았다). 그 결과 각 직원들은 자기가 맡은 주민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다.
이야기를 나누든, 밥을 먹든, 카드놀이를 하든 말이다. 각 직원은 루 할아버지와 같은 사람에게 이반 일리치의 게라심 같은 역할을 했다. 치료사라기보다는 동반자에 가까운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222~223쪽 <더 나은 삶>
보호의 명목으로 위험을 완전히 제거하기보다 의미를 남기도록 돕는 구조, 통제하기보다 선택하게 하는 환경, 의료적 연장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사는 동안의 삶의 질을 함께 고민하는 의료와 돌봄 체계가 갖추어져 있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우리는 붙드는 선택도 내려놓는 선택도 온전히 존중받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사회는 여전히 돌봄의 영역을 시혜적 영역에 두고, 죽음을 개인의 문제로만 묶어둔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죽음을 막연히 두려워한다. 그러나 어쩌면 이 두려움의 실체는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결정할 권리를 잃은 채 살아가는 삶일지도 모르겠다.
일반적인 의료 행위와 호스피스 케어의 차이점은 치료하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에 있는 게 아니라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있다는 것이었다. 보통의 의료 행위는 생명 연장에 목적을 두고 있다. 지금 당장은 수술, 화학요법, 중환자실 입원 등으로 삶의 질을 희생하게 되더라도 시간을 좀 더 벌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한다.
호스피스 케어는 간호사, 의사, 성직자, 사회복지사 등을 동원해서 치명적인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현재의 삶을 최대한 누릴 수 있도록 돕는다. [중략..] 질환이 말기에 이르렀다면 불편함과 통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고, 가능한 한 오래 의식을 유지할 수 있게 하고, 가끔은 가족과 외출할 수 있게 돕는 것과 같은 목적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환자가 살날이 많이 남았는지 적게 남았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248쪽 <내려놓기>
끝까지 붙드는 사람도, 삶의 마지막 페이지를 스스로 써 내려가기 위해 내려놓음을 선택하는 사람도, 개인의 의지를 넘어 모두가 존엄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공동체와 국가 또한 함께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라자로프의 선택을 생각하며 나에게 자문한다. 언젠가 나 또한 그 질문 앞에 서게 될 때, 나는 무엇을 붙들고 무엇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질문 앞에 서게 될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그 선택을 존중하고 지지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과 제도가 충분히 마련되어 있기를 바라본다.
안녕하세요 순간의 기록자입니다.
프롤로그를 넘어 <페이지 너머의 풍경 3>의 시작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다. 제목과 달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볍지 않은 질문을 던지는 책이라 생각되어 아툴 가완디 작가의『어떻게 죽을 것인가』로 문을 열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생의 마지막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단순히 숨을 이어가는 것과 여러분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일을 한 번 더 하는 것 중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죽음이라는 주제가 막연하고 두렵게 느껴지신다거나 혹은 노후 돌봄을 어떻게 주고받아야 할지 고민이시라거나, 품격 있는 삶의 마무리를 한번쯤 생각해 보신 분이라면 읽어보셔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