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불러낸 생각과 감정을 따라가는 글
[메인 이미지 대체 텍스트: 연분홍색 배경의 책 『그렇게 죽지 않는다』 표지. 팔레트 모양 안에 점묘화 풍경이 담겨 있고, 제목과 저자명이 적혀 있다. 저작권: © 어떤 책]
이 글을 쓰는 9월 20일 현재 넷플릭스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드라마는 은중과 상연이다. 1위라는 건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보고 있고, 많이 화자 되고 있다는 얘기다. 웬만해선 시리즈물을 끝까지 다 보지 못하는 내가 이 드라마를 보기로 한 건 모임방에서 사람들이 얘기하는 걸 들었기 때문이다.
“바꾸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사랑이라는 걸 알지만 제일 어려운 거 같아요. 그 단순한 메시지를 진짜 섬세하게 그린 듯해요.”
“은중과 상연중 어떤 스타일에 끌리시나요? 전 골라야 한다면 은중이요.
그 긴 세월을 지나 불쑥 나타나하는 제안도 너무 폭력적이고 일방적으로 느껴져요.”
“아주 섬세한 드라마예요. 서서히 감정이 빌드업됩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이길래?’ 하는 호기심이 생겨 짧은 시간에 끈기를 가지고 드라마를 몰아봤다. 사람들 말대로 ‘웰메이드 드라마’라 칭할 만큼 여러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풀어내는 드라마였다. 그러나 우정이라는 감정을 다르게 바라보는 나로서는, 불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두 주인공 은중과 상연의 관계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엔 너무나 복잡한 감정들로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30년에 걸친 두 사람의 애증 관계를 섬세하게 그렸다. 서로를 동경하면서도 질투하고, 미워하면서도 놓지 못하는 이들의 모습은 내가 생각하는 '우정'이라는 보편적인 정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정말 친구 관계가 저렇게까지 될 수 있나?'라는 질문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 어릴 적 우정을 떠올려봤다. 나는 선이 명확했고, 승부욕과 욕심이 많은 아이였다. 경계가 느슨한 어린 시절에도 반 아이들 모두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아이들과 게임에서 지기라도 하면 분해서 온몸을 부르르 떨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결국에는 지는 게 싫어 게임 자체를 피해버리는 아이였다.
그런 내가 좋아하는 친구 앞에서는 그 승부욕 자체가 사라졌다. 내 눈에 비치는 친구의 멋진 모습을 진심으로 동경하고 사랑했으며 응원했다. 내가 그런 것처럼 친구도 나를 제일 좋아하는 친구로 여겨주길 바라는 풋풋한 질투, 알게 모르게 생기는 열등감이 아예 없을 수는 없었겠지만, 은중과 상연처럼 서로를 사랑하지만 물어뜯고 증오하는 감정을 경험해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는 내내 두 사람의 관계처럼 꼬여버릴 대로 꼬여버린 감정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우정의 감정이라면, 나는 진심으로 충격과 상처를 받을 것 같았다. 내가 좋아했던 친구가 저런 마음으로 나를 대했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그래서 드라마를 다 본 뒤 사람들의 후기를 찾아보고 진심으로 안도했다. 다행히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았다. 후기들은 은중과 상연의 관계는 보편적인 우정이 아니며, 드라마가 극대화한 특별한 경우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다른 이들도 두 사람의 아슬아슬한 관계를 보며 '내 우정은 건강해서 다행이다'라고 안도했을지도 모른다. 드라마는 평소 우리가 억눌러왔던 질투나 열등감 같은 감정을 극적으로 터뜨리며, 건강한 관계의 소중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드라마는 두 사람의 관계를 봉합하기 위해 상연에게 '암'이라는 극적인 설정을 부여했다. 병을 통해 상연은 자신이 빼앗았던 은중의 삶과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고, 비로소 용서를 구했다. 나는 이 부분을 보며 '만약 상연이 암에 걸리지 않았다면, 현실의 상연은 마음 한구석 적당한 마음의 짐을 가진 채 자기가 가진 것을 누리며 행복한지는 모르겠지만 잘 살고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드라마는 구원을 택했지만, 현실은 그보다 훨씬 씁쓸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했다.
나아가 드라마는 존엄사라는 무거운 주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이 주제에 대해 사람들이 극을 통해 한 번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계기가 된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2023년에 읽었던 홍영아 작가의 『그렇게 죽지 않는다』라는 책을 떠올렸다.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꼭 한번 소개하고 싶어 사실 브런치북으로 연재하고 있는 이곳 『페이지 너머의 풍경 2』 예상 라인업에 넣어뒀던 책이었다.
저자는 20년 넘게 방송 다큐멘터리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KBS 파노라마>, <인간극장>, <병원 24시>, <닥터스>, <한국인의 밥상> 등 다큐멘터리를 즐겨보는 사람이 아니라도 한 번쯤 들어봄직한 굵직한 프로그램을 만든 분이다. 이 책 또한 〈KBS 파노라마〉 ‘우리는 어떻게 죽는가’ 이후 카메라 밖 TV 속 가슴 절절한 감동의 이야기 너머, 우리가 맞닥뜨릴 날것의 ‘진짜 죽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실제 의료 현장을 오가며 8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 들었던 이야기가 사실적으로 담겨 있다.
책은 말한다. 방송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가족’, ‘기적 같은 완쾌를 하는 환자’를 보여주며 감동을 주지만 정작 현실은 그런 “기적”과 다르다고. 대부분의 말기 암 환자는 가망 없는 치료에 매달리며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죽기 전 한 달 동안 사용한 의료비가 이전 1년간 월평균 의료비 보다 2.5배 이상 사용하는 경우도 흔하다고 한다. 작가는 기적 같은 미담 뒤 숨겨진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현실을 폭로하고, “잘 죽기” 위해 우리는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런 의미에서 유튜브에서 우연히 보았던 코미디언 지석진 씨의 개인사 고백은 이 책이 오버랩되면서 진짜 죽음을 모르는 우리의 무지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그는 방송에서 아버지가 온전한 정신일 때 연명 의료에 대한 결정을 해야만 했던 비극적인 경험을 털어놓는다. 당시 대부분이 그렇듯 '연명 의료'라는 것을 몰랐던 그는 아버지의 완쾌를 빌며 '일단 살려야 한다'는 마음으로 치료를 결정했다. 하지만 이후 아버지는 살아 계시다고 말하기 힘들 만큼 고통스러운 상태로 생명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며 깊은 후회를 했다고 한다.
그의 후회는 비단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다. 우리 대부분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걱정만 할 뿐,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살아간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위기에 봉착하게 되면, 죽음에 대해 미리 대화를 나누지 못한 가족은 부담감과 죄책감을 겪으며 격랑에 휩쓸리 듯 의료진이 제시하는 대로 결정하게 된다.
좀 더 이르거나 늦을 뿐, 우리 중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언젠가는 도래할 죽음에 대해 사전에 미리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의견이 존중되는 마지막을 준비한다면 어떨까.
저자는 암 전문의, 간호사, 장례지도사 등 다양한 전문가와도 인터뷰하며 잘 죽기 위한 사전 준비의 하나로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연명 의향서가 없을 때 남겨진 가족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생생하게 전달하며 우리가 미리 준비해야 할 것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 환자가 임종 과정에 들어섰을 때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미리 밝혀두는 중요한 제도
1.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 작성: 가장 중요한 단계이다. 건강할 때 미리 자신의 연명치료 중단 의사를 밝혀두는 것이다. 이 서류는 환자의 자기 결정권을 보장하고, 위급 상황에서 가족이 감당해야 할 무거운 결정을 대신해 준다. 환자의 뜻을 분명히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에서 오는 고통과 갈등을 미리 막을 수 있다.
2. 가족과 충분한 대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지만 꼭 필요한 과정이다. '웰다잉(Well-Dying)'은 삶의 마지막을 고통스럽게 연장하는 것이 아닌, 의미 있게 마무리하는 것이다. 환자가 원하는 삶의 마지막 모습은 무엇인지, 어떤 치료를 원하고 원하지 않는지 솔직하게 대화해야 한다.
3. 전문가와 상담: 연명 의료에 대한 법적, 의료적 지식이 부족하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병원 내 사회복지사나 연명의료 관련 기관을 통해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분이 서울 은평구나 그 주변 지역에 거주하는 분이라 살림의료복지사회적 협동조합(진료과목: 가정의학과, 내과, 부인과, 정신건강의학과, 치과, 한의원)을 소개한다. 이곳은 비영리 의료·돌봄 기관으로 “안심하고 나이 들고 싶은 마을”을 만드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특히 여성주의 건강관을 기반으로 지역 주민의 건강과 돌봄을 책임지는 곳으로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에 대해 알리고 작성할 수 있는 교육 및 상담프로그램 또한 운영하고 있다.
그렇다고 저자는 무턱대고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를 찬양하진 않는다. 책에는 일부 가족이 이미 연명의료 의향서에 동의했다는 말만 하며 추가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도 나온다. 요양원에 계신 부모님이 잔병이 생겼을 때 외부 추가 치료만 받으면 나을 수 있는 것을 무조건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죽음을 개인적인 사정 또는 가족들 안에서 통용되는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전 사회적 우리 모두의 윤리적 문제로도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하겠다.
어린 시절 남들보다 일찍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목도하는 경우가 많았던 터라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나는 이 책의 카테고리를 실용서로 정의했다. 앞으로 축하의 자리보다 애도의 자리를 찾게 되는 경우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빈번해질 것이기에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이 책을 권하고 있다. 이곳에서도 이야기할 타이밍을 잡고 있었는데 마침 드라마 <은중과 상연>을 통해 자연스레 소개할 수 있어 다행이다. 극에서는 상연의 병이 두 사람의 관계를 봉합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이 글을 접하는 분들 또한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통해 삶의 가치와 관계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이 글은 처음엔 제 브런치 카테고리 『마음의 산책로 2』를 염두에 두고 시작했지만, 드라마는 마중물 역할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연재날도 아닌 『페이지 너머의 풍경 2』로 인사드렸습니다.
드라마 <은중과 상연> 이 던진, 책『그렇게 죽지 않는다』가 던진 질문을 외면하지 않고, 이제는 용기를 내어 삶의 마지막을 어떻게 준비할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건 어떨까요?
그럼 저는 여러분과 약속한 목요일 새로운 글로 다시 반갑게 인사드리겠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