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불러낸 생각과 감정을 따라가는 글
[메인 이미지 대체 텍스트: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표지. 두 인물이 서로를 마주 보는 초현실적인 입체파 그림이 그려져 있다. ©민음사]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삶을 가벼움과 무거움이라는 두 가지로 극단적으로 갈라놓은 듯 이야기한다.
삶이 한 번뿐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을 만큼 가볍고, 영원히 반복된다면 짓눌릴 만큼 무겁다고.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현실의 삶은 그 어디에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매일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를 오가며 산다.
자유로이 흘렀다가도, 의미의 무게를 스스로 얹으며 한 번뿐인 삶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몸부림치며 살고 있지 않나 싶다.
이 소설은, 바로 그 흔들리는 인간 존재의 모습을 네 인물의 삶에 비추어 보여주는 듯했다.
나에겐 이방인-알베르 카뮈의 책은 읽는 시기마다 다른 생각을 들게 하는 책인데,
한 권이 더 추가된듯하다.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정리해 보기를 마음먹으며 책에 나오는 네 명의 인물을 보며 들었던 생각을 풀어보려 한다.
토마시는 스스로를 자유로운 사람이라 믿었다. 평생 수많은 여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삶의 ‘가벼움’을 추구해 왔다.
토마시와 테레자의 만남은 우연의 연속이었지만, 토마시는 그녀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필연적 사건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는 테레자가 시골로 내려가면서 이별의 위기를 겪게 될 때 두 사람의 관계를 필연으로 받아들이는 선택을 한다.
여기서 어떻게 보면
토마시가 드디어 가벼운 삶의 허무함을 깨닫고 무거운 사랑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가 다른 삶을 선택하면서도 몰래 도시로 나가 다른 여자들을 만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이런 그를 보며
토마시는 끝내 자신의 본성인 가벼움에 대한 욕망을 내려놓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그는 가벼움의 자유도, 무거움의 책임도 손에 넣지 못한 채, 자신이 만든 모순 속에 스스로 갇혀 버린다.
테레자는 토마시를 ‘운명’이라 믿었지만,
실은 그것은 단지 한 번의 우연이었다.
식당에서 그가 건넨 한순간의 시선,
우연히 겹쳐 들려오던 음악,
그 모든 사소한 우연들을 그녀는
자신의 삶을 바꿀 필연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바라본 그녀의 서사는
어떤 낭만적인 사랑을 보는 듯한 감동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삶에 의미 있는 무게를 부여하기 위한 몸부림에 가깝게 느껴졌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어머니를 통해 육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노골성과 사생활의 경계가 무너지는 무감각을 경험한다.
어머니는 늘 벌거벗고 다니며 딸의 외모를 사람들 앞에서 조롱했으며 그녀의 내면을 단 한 번도 존중하지 않는다.
그 속에서 테레자는 점점 육체는 천박하고 영혼은 고귀하다고 믿게 된다. 이를 통해 자신은 반드시 그 세계와는 다른 존재임을 증명하고 싶어 지게 된 건 아니었을까.
그런 그녀에게 토마시가 나타났다.
그녀는 그 우연을 ‘부름’처럼 해석했고,
그 순간부터 토마시는 구원의 상징이 된 듯했다.
하지만 사실,
그 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있었더라도
토마시에게 그러했듯 그 사람에게 삶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테레자는 토마시의 바람기를 보며 몸이 아니라 그녀들의 ‘영혼’을 질투했다. 그러나 토마시는 자신을 유일한 존재로 여겨주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녀는 더더욱 사랑받지 못하는 이유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사랑받지 못하는 자신을 벌주듯 더 깊이 관계에 매달렸다.
그런 모습을 보며
어쩌면 그녀가 토마시 곁에 남아 있던 건
사랑이라기보다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고 싶은 욕망이었던 건 아니었을까.
결국 토마시의 ‘가벼움’을 견디지 못하고 그녀는 이별을 고하고 시골로 내려간다. 이후
그녀를 따라 내려온 토마시를 보며 그녀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자신이 부여한 삶의 의미가 틀리지 않았음을, 가볍게 우연으로 시작된 사랑이 필연이었다고 그리고 종국엔 함께 죽음을 맞이한 것에 안도하지 않았을까.
두 사람은 시골 농가에서
트럭을 타고 이웃 마을로 춤을 추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죽음을 맞이한다.
그들의 마지막 밤이 평온했던 건
서로를 구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일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의 사랑은 휘둘리는 욕망 앞에 매번 좌절되며 결코 평화에 도달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느닷없는 죽음이 그들을 평화로 인도하는 듯했다.
그 평화는 화해의 결실이 아니라, 더 이상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인 건 아니었을까. 다시 말해 두 사람은 사랑도 책임도 두려움도 더 이상 묻지 않는,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쉴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사비나에게 배신은 부정적 행위가 아니라
자신에게 어떤 행동을 강요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수단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녀는 삶의 무거움을 *키치(진짜 예술이 아닌, 싸구려 모방품이나 유치한 장식품을 비웃는 말)라는 이름으로 보았다.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강요되는 감정들인 획일적인 도덕, 의무, 헌신, 책임이 그것이다.
그랬기에 이 모든 것으로부터 결별이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자유로움으로 보았다.
그녀는 공산주의 체제가 앞세우는 숭고한 이념 뒤에 도사리는 획일적 감정과 도덕적 선악을 혐오했다.
또한, 사랑, 결혼 등 낭만적 관계에 헌신과 의무가 따르며 그에 따른 관계 조율을 자신의 존재가 지워지는 것처럼 느끼고 있는 그녀에게 프란츠의 사랑은 어떻게 비쳤을까.
이상주의자 프란츠를 책에서는 이렇게 얘기한다.
“그는 키치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사비나가 경멸했던 키치적 사랑, 도덕, 의무 같은 가치를 숭고이 여기는 그를 떠나는 건 그녀에겐 정당한 행위이지 않았을까.
그녀는 그렇게 모든 것으로부터 등을 돌렸고 결별을 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 대가로 아무에게도 닿지 못하는 고립 속에 자신만이 남는 자유를 얻는다.
그는 언제나 정의·연대·헌신 같은 ‘무거움’의 가치를 찬양했다.
그는 아내 마리 클로드를 배신하고 사비나에 헌신하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을 쟁취하는 영웅’으로 자신의 이미지에 도취된 모습을 보인다.
사랑뿐 아니라 정치·시위·연대까지 거기에 자신이 속해 있다는 행위에 감동하며 숭배하는 모습까지.
그러나 정작 그는 자신의 현실(결혼·가정·사비나)에서는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았다.
아내와의 결혼생활에 불만만 품었지, 정리하거나 변화시키려는 진지한 시도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비나에게 사랑을 바치겠다고 했지만 그 사랑은 사비나가 아니라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프란츠는 ‘무거움’을 추앙했지만,
실은 일상의 어떤 무게도 감당하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런 기타의 현실적인 책임을 동반하지 않는, 자신만을 위한 연극을 하고 있는 프란츠를 보며 사비나가 그를 떠난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지 않았을까 싶다.
토마시는 가벼움을 추구했지만 테레자라는 무거움의 굴레 갇혔고, 테레자는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 자신이 만든 무게에 짓눌렸으며, 사비나는 자신을 지켰지만 아무에게도 닿지 못한 채 고독이라는 무거움을 마주했고, 프란츠는 위선을 두른 채 공허하게 사라졌다.
책은 가벼움과 무거움의 양극단의 모습을 보여주며 영원회귀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우리네 삶은 영원히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를 오가며,
이 한 번뿐인 삶에 의미라는 무게를 조금씩 채워 넣으며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언젠가 다가올 죽음이
그 의미들을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빛나게 해주는 것이라면—
그건 참 아름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저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니 문득 이런 질문이 듭니다.
문제는 우리가 살면서
가벼움과 무거움을 온전히 선택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매 순간 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 고군분투한다는 진실만이 남는다는 것을요.
과연 우리는 지금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걸까요?
알 수 없지만
죽음은 의미를 지우는 게 아니라, 남은 삶을 더 빛나게 만든다는 것을 압니다.
다들 삶의 의미와 그 진실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이길 바라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