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六. 迫 : 닥치고 있다

4부 미래 - 첫번째 이야기

by 박성봉

닥칠 핍(逼), 닥칠 박(迫)


지금까지 나의 독서 통계를 살펴보면, 절반 이상이 소설을 비롯한 문학 작품이다.

작품을 다 읽고 난 뒤 권말(卷末)에 실린 해설이나 평론을 읽다 보면,

뭔가 있어 보이는 표현을 자주 만난다.

그 중 하나가 '핍진성(逼眞性)'이다.

어감이 멋져서 기회만 되면 써먹고 싶지만, 막상 일상 대화에서는 사용할 만한 기회를 못 찾고 있다.


문학 평론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 말은 흔히 쓰이는 '개연성'과는 사뭇 다르다.

개연성이 '그럴듯한 인과관계'라면, 핍진성은 진실(眞)에 바짝 다가간(逼) 상태를 말한다.

가짜인데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느껴지는 현실감이다.

이 '닥칠 핍(逼)'과 꼭 닮은 한자가 '닥칠 박(迫)'이다.

무언가 코앞까지 닥치고 있다는 감각.

진짜처럼 훅 다가오는 느낌이 '박진감(迫眞感)'이고,

기다리던 영화가 눈앞에 다가온 것이 '개봉박두(開封迫頭)'이며,

어떤 경계선까지 바짝 다가선 상태가 '육박(肉迫)'이다.




흥미롭게도 핍과 박이 합쳐진 '핍박(逼迫)'이 한·중·일 3국에서 조금씩 다르게 쓰인다.

한국에서 핍박은 힘으로 억누르고 괴롭힌다는 '억압'의 의미다.

주로 종교적, 정치적 박해의 맥락에서 거친 권력의 핍박에도 굴하지 않는다고 할 때의 그 핍박이다.

중국에서도 압력을 가한다는 뜻이지만, 뉘앙스가 다르다.

강요당해 어쩔 수 없이 무언가를 한다는 쪽에 가깝다.

他被债主逼迫得走投无路,

그는 채권자에게 '핍박'당해 갈 곳이 없어졌다는 식이다.

반면 일본에서는 병상이나 물자 등이 턱없이 부족한 '결핍'의 상태를 가리킨다.

感染拡大で地域の医療体制が逼迫している,

전염병 확산으로 지역 의료 체제가 '핍박'해지고 있다고 표현한다.


일본어에서 '박(迫)'을 훈독한 '세마루(迫る)'는 일상에서 빈번히 쓰이는 동사다.

주로 대상이 거역하기 힘든 기세로 밀려올 때 쓰인다.

적군이 등 뒤까지 닥쳐왔다는 敵が背後に迫る,

어려운 선택을 강요받는다는 選択を迫られる 같은 표현이다.

반면, 같은 다가옴이라도 단순한 도착이나 출현을 나타낼 때는 '얏테쿠루(やってくる)'를 쓴다.

봄이 찾아오고, 친구가 놀러 오고, 새 학기가 시작되는 것은 얏테쿠루다.

같은 다가옴인데, 세마루에는 압박감(壓迫感)이 있고 얏테쿠루에는 상대적으로 적다.


무엇이 올지 모르는 미래가 빠르게 다가온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스트레스다.

맞을 채비가 안 된 사람일수록 그 두려움은 커진다.

하지만 아무리 무겁고 벅찬 것이 밀려오더라도,

스스로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그 압박이 오히려 삶의 박진감이 될 수 있다.



쿵쾅쿵쾅 vs 살금살금


'쿵쾅쿵쾅' 큰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것은 오히려 두렵지 않다.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때문이다.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인 채, 혹은 '스멀스멀' 조금씩 번지며 다가오는 것이 오히려 더 무섭다.

이렇게 같은 음절을 겹쳐 쓰는 첩어(疊語)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의 속도와 질감을 소리로 보여준다.



첩어는 한·중·일 3국의 언어 모두에 존재하지만, 그 쓰임과 방법이 조금 다르다.

중국어에도 慢慢(mànmàn, 느릿느릿), 漸漸(jiànjiàn, 점점)처럼 같은 글자를 반복하는 첩어가 있고,

明白(míngbai, 명백하다)을 明明白白으로 늘여 강조하는, 이른바 AABB형 첩어도 있다.

다만 소리 자체로 움직임의 질감을 그려내는 순수 의태어는 한국어나 일본어에 비해 뚜렷이 적다.

일본어도 'じわじわ(지와지와, 스며들듯)', 'どんどん(돈돈, 거침없이)',

'ひたひた(히타히타, 살며시 차오르듯)'처럼 감각의 미세한 차이를 첩어로 잘 나누지만,

모음과 자음을 바꿔가며 같은 어근에서 수십 개의 변이형을 뽑아내는 힘은 한국어에 미치지 못한다.


이 점에서 한국어의 의태어는 독보적이다.

국립국어원 자료 기준, 한국어의 의성어·의태어는 1만 800여 단어에 달한다.

이 숫자를 가능하게 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모음조화다.

'살금살금'과 '슬금슬금', '반짝반짝'과 '번쩍번쩍'처럼

양성 모음과 음성 모음의 교체만으로 밝고 작은 느낌에서 어둡고 큰 느낌으로 변주된다.

다른 하나는 자음의 삼중 대립이다.

예사소리, 거센소리, 된소리의 전환으로

'다닥다닥—따닥따닥—타닥타닥'이 전혀 다른 어감을 만든다.

한국어의 의태어가 유독 번성한 데는 자모음 대립의 풍부함과 함께,

그 미세한 변주를 낱낱이 기록할 수 있는 한글의 힘이 컸을 것이다.


일본어에는 같은 글자가 겹칠 때 쓰는 '오도리지(踊り字, 々)'라는 기호가 있다.

人々(히토비토, 사람들), 時々(도키도키, 때때로)처럼

앞 글자를 반복하되 획을 줄여, 반복의 운율과 필기의 효율을 동시에 잡는 장치다.

우리도 손글씨를 쓸 때 '빨리빨리'를 '빨리×2'라고 적곤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렇듯 의태어는 다가오는 것의 속도와 질감을 더 직관적으로 느끼게 한다.

우리를 압박해오는 것들에도 저마다의 소리와 걸음이 있다.

그 걸음을 첩어에 실어,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네 가지 사각지대를 살펴보자.



네 개의 사각지대


진화의 과정을 거치며 우리 뇌는 에너지를 극도로 아끼는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가 되었다.

눈앞에서 번쩍이거나 큰 소리를 내는 위협에는 즉각 경보를 울리지만,

당장 생존에 영향을 주지 않는 느리고 익숙한 변화는 인식의 변방으로 밀어내 버린다.

그렇게 뇌의 효율이 만들어낸 맹점 탓에,

알아채지 못한 채 다가오는 것들에는 네 가지 사각지대가 생긴다.



첫째, '넘실넘실' 매몰(埋沒)이다.

변화가 너무 거대해서 보이지 않는 경우다.

AI를 문명사적 대전환이라 부른다.

산업혁명이 공장과 산업의 구조를 바꾼 것과 달리,

AI는 생존, 관계, 노동, 창작, 판단까지 삶의 전 영역을 동시에 건드린다.

그런데도 우리 대부분은 이 변화의 한가운데 이미 들어와 있으면서 그 사실을 잘 모른다.

시대의 물결이 넘실넘실, 어느새 턱밑까지 찰랑찰랑 차오르고 있지만,

이미 그 물속에 잠겨 살아가는 우리에게 물은 보이지 않는다.

수조 안의 물고기는 물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묻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묻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 '야금야금' 점진(漸進)이다.

변화가 너무 느려서 감지되지 않는 경우다.

기후변화가 그렇다.

산업화 이후 175년 동안 지구 평균기온은 약 1.5도 올랐다.

하루하루의 차이는 없고, 올해와 작년의 차이도 희미하다.

그러나 빙하기와 지금 이 문명 사이의 온도 차이가 겨우 5도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1.5도는 결코 사소한 숫자가 아니다.

파리협정이 1.5도를 마지노선으로 정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느린 변화는 느리다는 이유만으로 면죄부를 받고,

종국에 가서야 가장 폭력적인 모습으로 삶을 덮친다.


셋째, '가물가물' 원격(遠隔)이다.

변화가 너무 멀어서 내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다.

부모님의 노화와 언젠가 닥칠 이별이 여기에 속한다.

명절에 만난 부모님의 흰머리가 부쩍 늘었다는 것을 알아채고도,

돌아서면 일상에 묻혀 금세 잊는다.

나의 죽음은 더하다.

머리로는 언젠가 다가올 것을 알면서도,

가슴으로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처럼 살아간다.

멀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둔다.


넷째, '빙글빙글' 반복(反復)이다.

변화가 반복의 탈을 쓰고 있어서 직진을 원운동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경우다.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반기마다 목표를 세우고, 연말에 평가를 받는다.

그 사이클을 몇 바퀴 돌다 보면 일 년이 지나고, 또 지난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이라는 익숙함이 뇌를 안심시킨다.

그러나 시간은 둥글게 도는 것이 아니라 화살처럼 한 방향으로 쏘아지고 있다.

그 반복이 안정처럼 느껴지는 사이,

내가 서 있는 자리의 의미는 조용히 바뀌고 있다.

같은 계절이 돌아왔을 뿐인데, 같은 내가 돌아온 줄 착각하는 것이다.


매몰, 점진, 원격, 반복.

이 네 사각지대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다가오는 것이 무섭기 때문이 아니라,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파도 위의 서핑


감각하지 못한다는 것은 대비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도처에서 맹점의 장막을 뚫고 육박(肉迫)해오는 시간과 변화 앞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상에 내던져진 '피투(被投)적 존재'로 보았다.

태어난 시대, 부여받은 조건, 피할 수 없는 유한성.

우리는 아무도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이 세상에 던져졌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인간은 동시에 스스로를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던지는 '기투(企投)적 존재'이기도 하다.

피투가 과거에 묶인 수동적인 숙명이라면,

기투는 미래를 향해 주도적으로 몸을 여는 일이다.


다가오는 것을 그저 두려워하며 기다리는 삶은 앞서 말한 '핍박(逼迫)' 그 자체다.

억눌리는(韓) 삶이고, 강요당하는(中) 삶이며, 늘 모자란(日) 삶이다.

세 나라의 핍박이 하나같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같다.

내 삶의 주어가 '나'가 아니라 '밀려오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기투는 바로 그 주어를 되찾는 일이다.

다가오는(迫) 것을 속수무책으로 기다리는 자리에서,

내가 먼저 나아가는(企) 자리로 옮겨가는 것이다.

서퍼는 밀려오는 파도를 멈출 수 없다.

다만 파도가 덮치기 전에 먼저 보드 위에 올라타 몸의 중심을 잡을 뿐이다.

손자병법의 '선승구전(先勝求戰)'이 말하는 이치도 이와 같다.

이겨놓고 싸운다는 것은,

파도 아래로 숨어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파도 위에 올라타는 것이다.


그 균형을 잡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고독'이다.

세상과의 단절인 고립이 아니라,

내 안에 스며든 세상을 응시하는 자발적 고독이다.

앞서 살펴본 네 사각지대는 모두

일상의 소음에 파묻혀 감각이 무뎌진 상태에서 비롯된다.

물속에 잠긴 물고기가 물을 보려면 한 번은 수면 위로 올라와야 하고,

변화의 속도를 감지하려면 변화의 바깥에 잠시 멈춰 서야 한다.


『중용』이 말하는 신독(愼獨)의 핵심도 거기에 닿아 있다.

홀로 있는 고요한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벼리는 사람만이,

살금살금 혹은 야금야금 다가오는 시간의 발소리를 예민하게 알아챌 수 있다.


그때 비로소 삶은 수동적인 기다림을 벗어나,

핍진(逼眞)하고 박진감(迫眞感) 넘치는 서사가 된다.

문학에서 말하는 '가짜임에도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압도적 현실감', 핍진성.

어쩌면 그것은 다가오는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내일을 향해 몸을 던진 사람만이,

자신의 삶에 허락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진짜'일 것이다.




[독자 참여 코너]


'핍박(逼迫)'이라는 같은 한자어가 한·중·일 3국에서 각기 다른 뜻으로 쓰입니다.

다음 중 한국에서 쓰이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① 억압 — 힘으로 억누르고 괴롭히는 것

② 강요 — 압력을 가해 억지로 시키는 것

③ 결핍 — 물자나 여력이 턱없이 부족한 것


정답은 댓글로!




살금살금 닥쳐오는(迫) AI라는 파도를, 우리는 올라탈 것인가, 삼켜질 것인가.

올라타 즐기려 제대로 살필(監) 수 있어야 한다.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