跛 :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3부 정의 - 다섯번째 이야기

by 박성봉

비틀거리는 세상


나에겐 병이 하나 있다.

이른바 MC병이다.

일상적인 모임이나 가벼운 대화에서도 나도 모르게 전체 이야기를 이끌려 한다.

내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대화 참여자 각자의 의견이 선명히 드러나도록 판을 깐다.

요리사에 비유하자면 따로 노는 재료들을 버무려 제맛을 내는 역할이다.


이럴 때면 머릿속 스튜디오에 'ON AIR' 사인이 점등된다.

머릿속 PD가 큐 사인을 보내고 방송은 시작된다.

대화가 한쪽으로 쏠리는 것 같으면 슬그머니 반대편 입장에도 서본다.

영어로는 devil's advocate, 나도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일부러 딴지를 걸어본다.

그래야 '출연자'들이 이 팽팽하게 살아 숨 쉬는 토론을 할 수 있다.



이렇듯 나는 그동안 정치적 지향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해왔다.

그러나 요 몇 년 사이 나도 모르는 사이 정치에 과몰입했던 것 같다.

지난 대선 며칠 전, 오래 알고 지낸 동창과 술잔을 기울이던 날이었다.

대화 중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서로의 확연한 입장 차이를 확인했다.

나와 이렇게 생각이 다를 수 있구나 싶어 내심 놀랐고, 어색해지기 전에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미국에서는 직장 동료와 절대 꺼내지 말아야 할 세 가지 주제가 있다.

정치, 종교, 그리고 연봉.

특히 정치는 이어지는 선거와 삶에 직결되는 정책들로 인해

감정 섞인 과열된 논쟁이 되기 쉽고, 그 끝은 어색한 분위기로 남을 수 있다.

하지만 단지 분위기가 어색해진다는 이유로 정치를 피해야만 할까.

어쩌면 정치야말로 가장 치열하게 논의되어야 할 주제다.

세금, 교육, 의료, 주거.

우리 삶에 정치와 무관한 영역은 단 한 곳도 없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나의 MC병은 여러 부작용을 일으켰다.

그중 하나가 자칭(自稱) 'PC 집착증'이다.

PC, 즉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과도하게 신경쓰는 증상이다.

이 증상의 가장 큰 부작용은 입 밖으로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를 지나치게 검열하게 된다는 점이다.

무심코 쓰는 일상어들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반팔'이라는 단어가 신체가 온전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들릴까 하는 의식.

'암적 존재'라는 표현이 실제 환자와 가족에게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그러던 어느 날, 뉴스에 나온 단어의 원뜻을 찾아보다 마음에 걸리는 한자가 있었다.

절름발이 파(跛).

"국회가 파행(跛行)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파행의 파가 당연히 깨뜨릴 파(破)인 줄 알았다.

틀렸다.

跛는 발을 뜻하는 족(足)과 가죽을 뜻하는 피(皮)가 합쳐진 글자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상태를, 정상적으로 굴러가지 않고 삐걱대는 정치 상황에 빗댄 것이다.

이 차별용어가 아무런 비판 없이 쓰여도 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이 나를 정치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졸(卒) — 판을 뒤집는 자들


정치를 뜻하는 영어 politics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폴리스(polis)에서 왔다.

그렇듯 정치는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공동체의 문제를 함께 결정하던 행위였다.

자연스레 권력의 방향은 아래에서 위를 향했다.


하지만 동양의 정치(政治)는 반대다.

정(政)은 회초리로 쳐서(攵) 바로잡는다(正)는 뜻이고,

치(治)는 범람하는 물길을 통제하듯(氵) 다스린다는 의미다.

따라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통치자의 시선을 담고 있다.



그런데 현대사의 한국인들은 유독 통치의 방향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4·19, 5·18, 6월 항쟁, 그리고 촛불.

이름 없는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민주주의를 지켜온 역사다.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 두 나라의 정치참여의 차이를 선명하게 느꼈다.

당시 일본은 고이즈미 퇴임 직후, 아베·후쿠다·아소로 총리가 해마다 바뀌던 혼란기였다.

급기야 2009년, 반세기 넘게 집권하던 자민당이 민주당에 정권을 내주었다.

그런데 내 주변의 일본인들은 정치에 목소리를 내는 일이 드물었다.

정권이 바뀌어도 내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일종의 체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런 일본인들 중에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내가 다니던 홍고(本郷) 루터교회의 야스이(安井) 목사였다.

2007년 당시 그는 평화헌법 9조 개정에 강하게 반대했다.

9조는 전쟁과 무력 행사를 영구히 포기하고, 군대 보유와 교전권을 부인한 조항이다.

설교 강단에서도, 청년 수련회에서도 이 문제를 당당히 꺼냈다.

주변 일본인들의 정치적 무관심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더 크게 들렸다.


권력자의 결정은 권력자의 목숨을 담보로 하지 않는다.

감시받지 않는 결정은 가장 평범한 사람들에게 가장 혹독한 결과를 남긴다.

최악의 경우, 그것은 전쟁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의 졸병들이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전쟁 속에서 쓰러지고 있다.


장기판을 보라.

초(楚)와 한(漢)은 궁성 깊숙이 사(士)에 에워싸여 있다.

정작 전선을 맞대고 있는 것은 졸(卒)과 병(兵)이다.

중국 샹치(象棋)의 졸과 병은 강을 건너기 전까지 앞으로만 전진한다.

옆으로 연대할 수 있는 것은 강을 넘은 뒤에야 가능하다.

일본 쇼기(将棋)의 보병(步兵)은 아홉 개로 가장 많지만, 앞으로 한 칸밖에 못 움직인다.

한국 장기의 졸병은 처음부터 앞으로도, 양옆으로도 자유롭게 움직인다.

결정하지 않은 전쟁에서 쓰러지는 것도, 판을 뒤집는 것도, 결국 졸병이자 시민의 몫이다.

정(政)과 치(治)의 주어를 권력자에서 국민으로 바꾸는 것이 민주주의다.



그렇다면 정치적 올바름은 민주주의의 완성인가.

정(政) 안에 이미 바를 정(正)이 들어 있다.

정치가 곧 바르게 하는 것이라면, 정치적 올바름은 동어반복이다.

말을 가려 쓰고 불쾌한 언어를 제거하는 것만으로 세상이 올바르게 되지는 않는다.

겉으로는 올바른 가치를 외치면서 뒤에서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는 위선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다.

그 위선에 가장 먼저 등을 돌린 것은 청년 세대였다.



드러누운 세대


청년들이 등 돌린 그 위선적인 올바름을 비판하면서도, 고백하건대 나 역시 여전히 PC병 환자다.

하지만 PC 만능주의에는 분명히 선을 긋는다.

의사가 자기 병을 가장 잘 아는 법이다.

가치와 언어의 무결성만 따지다 보면, 현실의 모순은 방치된 채 공허한 표어만 난무하게 된다.

조던 피터슨은 PC주의가 세상을 억압자와 피억압자라는 이분법으로 재단하며,

개인의 자유로운 사고를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었다고 꼬집었다.

그의 말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어도, 뼈아프게 돌아보게 하는 지적이다.


청년들의 정치적 극단화와 무기력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다.

저성장과 계층 고착화 속에서 전 세계 청년들이 기존 정치에 절망하고 있다.

치솟은 집값과 두 번째 기회가 없는 무한 경쟁 속에서 한국 청년들은

연애, 결혼, 출산, 내 집 마련을 포기하게 된다.

이른바 N포세대가 되어버렸다.

중국에서는 비슷한 청년들을로 아예 드러눕다는 뜻의 탕핑(躺平)이라고 부른다.

더 나아가 썩어가는 것조차 그대로 받아들이는 바이란(摆烂)이라고도 한다.

일본 청년들은 교육도, 취업도, 직업훈련도 거부하는

니트(NEET,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가 되어

사회와의 접점 자체를 끊어버린다.

방식은 다르지만 '포기'라는 키워드를 공유한다.



고착화된 절망은 옅어질지언정 상처를 남긴다.

입에 발린 공정을 외치기 전에, 불공정에 함몰된 현실부터 직시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나만이 옳다는 오만도 버려야 한다.

건강한 조직일수록 맹점을 찌르는 레드팀을 둔다.

"보수는 지도자를 군주로 모시고, 진보는 교주로 섬긴다."

합리적 비판이 사라지고 맹신만 남은 진영 논리를 꼬집는 농담이다.


그리고 그 진영 논리는 일상 속에서 더 깊이 파고든다.

자기편에는 무조건 찬성, 상대편에는 무조건 반대.

알고리즘이 만드는 에코 체임버(echo chamber)가 이 편향을 강화한다.

비슷한 목소리만 울리는 방 안에서 세상은 '우리'와 '저들'로 갈린다.

합리적인 시민이 침묵하는 사이, 허위 정보(disinformation)가 그 틈을 파고든다.

약간의 진실을 품은 거짓이 가장 위험하다.


그래서 모든 세대가 깨어 있어야 한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현상 유지에 대한 동의다.

광장을 채워온 것은 한 세대가 아니라 세대를 이은 시민의 힘이었다.



Discuter(디스퀴테) — 논지와 싸워라


고등학교 시절, '정치경제' 과목을 가르치시던 선생님이 계셨다.

그분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두 가지 내부의 적(敵)을 꼽으셨다.

패배주의(defeatism)와 냉소주의(cynicism).

"패배주의는 '내가 뭘~'이고, 냉소주의는 '지까짓 게 뭘!'이야."

30년이 더 지났는데도 그 한마디가 생각나 웃음이 나온다.


이 두 마음가짐은 평범한 사람들을 토론의 장에서 밀어낸다.

하지만 우리가 정치를 외면한다고 해서 정치가 우리를 외면하지는 않는다.

논의의 자리를 떠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은 책임지지 않는 정치인들이다.


논지에 대해서는 예리하게 반박하되 사람에 대해서는 존중하는 토론 문화를,

우리는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나카노 노부코의 책, 『정의 중독』에서 작은 힌트 하나를 얻었다.


프랑스어의 ‘토론하다discuter’라는 동사는 ‘사람’을 목적어로 취하는데

‘반박하다réfuter’라는 동사는 사람을 목적어로 취하지 않는다고 했다.

즉, 토론은 사람과 하는 것이지만 반박은 어디까지나 말하는 내용,

즉 논지에 대한 것이므로, ‘상사를 반박하다’ ‘남편을 반박하다’

‘상대를 반박하다’ 등으로는 쓰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는 자주 주장과 인격을 동일시한다.

그 순간 건전한 토론은 인신공격으로 변한다.


나부터 반성한다.

상대의 주장과 인격을 분리하지 못하고 소인배(小人輩)처럼 굴 때가 많았다.

그렇다면 대인배(大人輩)가 되어야 할까?

그런데 무리 배(輩)는 소인배, 무뢰배, 불량배처럼 거의 언제나 부정적인 집단에 붙는다.

큰 인물(大人) 뒤에 나쁜 무리(輩)를 붙이것은 모순.

글을 맺으려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대인배'의 한자를 뜯어보고 있다.

진단명은 명확하다.


MC병 중증.

완치 가능성, 매우 낮음.


그래도 이 병 덕분에 오늘도 누군가와 기꺼이 토론(discuter)할 수 있으니,

당분간은 이 불치병을 즐겁게 앓아볼 생각이다.


* 輩는 본래 같은 무리, 같은 항렬이라는 중립적인 뜻이다.

선배(先輩), 후배(後輩)처럼 평범한 관계를 가리키는 데도 쓰인다.

그런데 한국어에서는 소인배, 무뢰배, 불량배 처럼

부정적인 집단에 붙는 경우가 더 많다.




[독자 참여 코너]


'파행(跛行)'의 파(跛)는 어떤 뜻을 가진 글자일까요?


① 깨뜨리다

② 절뚝거리다

③ 물결이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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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정치적 핍박은 근현대사의 일만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지금 이 순간에도 현재 진행형이다.

핍박(逼迫)의 박(迫)에는 '닥치다, 다가오다'라는 뜻이 있다.

핍박은 멀리서 오지 않는다. 언제나 바로 곁까지 와 있다.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