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정의 - 네번째 이야기
일본에 오래 살았음에도, 정작 일본 애니메이션을 즐겨 보지는 않았다.
극장에서 챙겨 본 작품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런 내게 딸 하윤이가 영화 한 편을 같이 보자고 했다.
그 작품이 바로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이었다.
만화 원작은 이미 완결되었고, 이번 극장판은 전체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삼부작의 첫 편이다.
앞선 내용을 보지 않았기에, 부랴부랴 일주일에 걸쳐 OTT로 예습을 마쳤다.
하윤이는 이미 케이블TV와 유튜브를 통해 전체 내용을 훤히 꿰고 있었다.
4DX관에서 관람한 영화는 다음 편이 나오는 2027년까지 기다리기 힘들 정도로 흥미진진했다.
이 작품은 다이쇼 시대 일본을 배경으로,
사람을 잡아먹는 혈귀(血鬼)와 그에 맞서 싸우는 귀살대(鬼殺隊)의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 탄지로는 혈귀에게 가족을 잃고,
혈귀로 변해버린 여동생 네즈코를 되돌리기 위해 칼을 든다.
혈귀들의 정점에는 천 년을 살아온 절대 권력자 '키부츠지 무잔'이 존재한다.
작품을 두고 잔혹성 논란이나 시대적 배경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하지만 오늘 쓰려는 이야기는 그 논란에 대한 것이 아니다.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다름 아닌 혈귀들의 눈동자였다.
무잔의 수하 중 가장 강한 열두 명을 '십이귀월'이라 부른다.
달의 차고 이지러짐을 본떠 상현(上弦)과 하현(下弦)으로 나뉜다.
하현보다 상현이 강하며, 서열 숫자가 낮을수록 힘은 절대적이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계급과 서열을 뜻하는 숫자가 나란히 새겨져 있다.
그런데 그 숫자는 우리가 아는 一, 二, 三, 四, 五, 六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는 壹, 貳, 參, 肆, 伍, 陸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었다.
획이 빽빽하고 구조가 복잡한 이른바 '갖은자'다.
언제부터, 그리고 왜 굳이 이 복잡한 한자를 썼을까.
기원을 따라가면 인간의 불신과 욕망이 맞닿아 있다.
갖은자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지폐가 널리 유통되던 시기다.
원나라는 세계 최초로 지폐만으로 경제를 운영한 나라였고, 위조가 극성을 부렸다.
뒤이은 명나라 주원장은 장부 조작으로 국고를 횡령한 곽환 사건을 겪고,
공문서에 갖은자 사용을 법제화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一에 획 하나면 二도 되고 十도 된다.
十에 획을 보태면 千으로 둔갑한다.
그러나 壹은 손댈 틈이 없다.
그런데 흥미로운 역설이 있다.
혈귀들은 1이라는 작은 숫자를 차지하려 수백 년간 서로를 짓밟는다.
현실의 우리는 지폐 속 큰 숫자를 쫓으며 삶을 소진한다.
금이나 은처럼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 동전의 시대에서,
사회적 약속만으로 가치를 부여한 지폐의 시대로 넘어왔다.
숫자는 더 추상적이고 강력해졌다.
이제 실체 없는 데이터가 되어 우리를 지배한다.
작을수록 강한 혈귀의 숫자와, 클수록 권력이 되는 인간의 숫자.
그 갖은자의 빽빽한 획 사이에서, 우리가 연연하는 숫자에 대해 생각해본다.
숫자는 방향을 갖는다.
바둑은 초단에서 시작해 구단(九段)에 이르러야 입신의 경지다.
태권도나 유도도 숫자가 커질수록 고수(高手)다.
더 높은 숫자는 더 오랜 수련의 증거다.
중국어 검정시험 HSK도 급수가 올라갈수록 난도가 높아진다.
같은 어학시험인데 일본어능력시험 JLPT는 방향이 다르다.
N5에서 시작해 N1으로 갈수록 높다.
한국 공무원도 9급에서 시작해 1급으로 향한다.
숫자가 줄수록 더 많은 책임과 권한을 갖는다.
동아시아에서 '1'은 늘 절대적 권위의 자리였다.
중국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에서 일품(一品)은 황제 아래 최고 관직이었고,
일본 율령제에서도 일위(一位)는 신하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였다.
작은 숫자에 거대한 권력을 담는 감각은 우리 의식에 깊이 박혀 있다.
급(級)을 뜯어본다.
실 사(糸)와 미칠 급(及)의 조합이다.
실타래를 한 겹씩 감아 올리듯, 단계를 밟아 도달한다는 뜻이다.
한 번에 여러 겹을 건너뛸 수 없는, 정직한 축적의 과정.
원래 계급이란 시간이 빚어낸 높이였다.
그러나 신분제가 해체된 현대에서, 급수는 더 이상 사람의 지위를 가르지 못한다.
이제 등급은 소고기의 육질이나 계란의 신선도를 매기는 데 쓰인다.
그렇다고 사람 사이의 서열이 사라진 건 아니다.
양반과 상민(常民), 사무라이와 농민을 가르던 벽은 허물어졌지만,
그 빈자리를 채운 건 자산의 자릿수다.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 급(級)에서 금(金)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과거의 갖은자(壹, 貳, 參)가 장부 조작을 막는 해자(垓子)였다면,
오늘날 돈이라 불리는 숫자는 그 자체로 계급을 굳히는 성벽(城壁)이 되었다.
통장 잔고의 0이 몇 개인지, 아파트 평수가 얼마인지, 성적이 상위 몇 퍼센트인지.
그에 따라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생긴다.
신분은 평등해졌으나, 숫자로 치환된 자본은 골품제보다 단단한 현대판 갖은자가 되어 우리를 규정한다.
혈귀들이 1을 차지하려 수백 년간 서로의 살점을 뜯어내듯,
우리도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성(無限城)에 갇혀
타인보다 앞선 숫자를 쥐려 무한열차(無限列車)의 궤도를 달리고 있지 않은가.
손댈 수 없는 갖은자처럼, 자본의 구조도 개인이 넘보기 힘든 복잡함 속에 자신을 숨긴다.
숫자에 일희일비하며 사는 우리에게, 사람의 품격(品)은 어디에 찍힌 숫자로 증명되는 걸까.
영어권에는 화폐 단위를 부르는 일상어가 따로 있다.
미국에서 달러($)를 뜻하는 '벅(buck)'은 화폐가 귀했던 시절
교환 수단이던 사슴 가죽(buckskin)에서 왔다.
영국에서 파운드(£)를 뜻하는 '퀴드(quid)'는
'무엇에 대한 대가(quid pro quo)'라는 라틴어에 뿌리를 둔다고 한다.
두 나라 모두 1,000 단위는 '그랜드(grand)'라 부른다.
중국에서도 위안(元)을 '콰이(块, 덩어리)'라고 부른다.
한국과 일본에는 이런 별칭이 없다.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조선시대 화폐 단위인 '냥(兩)'을 장난스럽게 쓰곤 했다.
속어로 '땡전'이나 '쩐' 같은 말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일본어에서는 돈을 뜻하는 '오카네(お金)'에서 미화 접두어 '오(お)'를 떼고
'카네(金)'라 부르면 거칠고 노골적인 뉘앙스가 된다.
왜 유독 돈에는 은어가 붙을까.
돈이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생존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돈을 있는 그대로 '돈'이라 부르면 대화가 너무 무거워진다.
그래서 다른 이름을 빌려 그 무게를 비껴 부르는 게 아닐까.
돈은 자아실현 이전에, 벼랑 끝에서 우리를 버티게 하는 생존의 문제다.
생존을 위한 의식주(衣食住), 그중 가장 비싼 것은 주(住), 집이다.
어느 순간 한국 사회에서 집은 '사는(live) 곳'이 아니라 '사는(buy) 것'이 되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아니라 투자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렇게 높아진 집값을 마련하기 위해
한국인은 영혼까지 끌어모은다(영끌).
중국도 일본도 사정은 비슷하다.
중국인은 양가 조부모까지 여섯 개의 지갑을 비운다(掏空六个钱包).
일본인은 부부가 공동의 빚을 진다(ペアローン = pair loan).
이 고통은 어른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교실에서 아이들은 부모가 산 집의 크기로 서로를 가늠한다.
임대와 분양을 가르고, 단지의 평수와 부모의 직업으로 우쭐대거나 주눅 든다.
경제적 등급이 신분처럼 굳어지는 현대판 골품제다.
우리나라가 특히 불평등한 걸까.
경제적 평등을 재는 잣대로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은 지니계수다.
0이면 완전 평등, 1이면 완전 불평등.
한국과 일본의 지니계수는 0.33 수준으로 OECD 평균에 가깝다.
숫자만 보면 꽤 평등한 사회다.
하지만 체감은 다르다.
한국의 소득 상위 10%와 하위 10%의 격차는 연 2억 원을 넘어섰고,
자산 격차는 15억 원 이상의 절벽을 이룬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다"고 했다.
절대적 빈곤은 사라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SNS를 통해 타인의 삶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상대적 박탈감은 그 어느 때보다 깊다.
나무의 꼭대기에 돋는 연약한 새순을 '우듬지'라 부른다.
이 여린 싹이 나무 전체의 성장 방향을 결정한다.
자연은 가장 단단한 밑동이 아니라, 가장 위태로운 우듬지에 햇빛을 먼저 허락한다.
시혜(施惠)가 아니다.
우듬지가 꺾이면 나무는 방향을 잃기 때문이다.
경제학에 유치산업보호론(infant industry protection)이라는 것이 있다.
'어릴 유(幼)'에 '어릴 치(稚)'.
아이라는 뜻을 두 번이나 겹쳐 쓴 이름이다.
갓 태어난 산업이 자생력을 갖출 때까지 국가가 보호막이 되어야 한다는 이론이다.
햇살론 같은 서민금융도 같은 논리다.
가장 그늘진 곳에 먼저 햇살을 비추는 것은 단순한 복지가 아니다.
연약한 곳이 무너지면 전체가 흔들린다는 걸 알기에 치르는 사전 비용이다.
우듬지를 살리는 것이 결국 거목을 키우는 길이다.
미국에서 달러를 뜻하는 은어 '벅(buck)'이 쓰이는 다른 표현이 있다.
트루먼 대통령의 책상 위에는 "The Buck Stops Here"라는 팻말이 놓여 있었다.
모든 책임은 여기서 끝난다.
돈의 은어가 곧 책임의 종착점이 된다.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 가장 무거운 짐을 진다는 선언이다.
진정한 경제적 정의는 숫자가 높은 이들이 책임을 아래로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에어포스 원(Air Force One)의 '원'처럼, 정점에 선 '1'이 그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낼 때 실현된다.
영화 속 십이귀월(十二鬼月)을 다시 떠올려 본다.
우리는 지금 어떤 숫자를 눈에 새기고 살아가고 있을까.
통장 잔고의 자릿수, 아파트 평수, 상위 몇 퍼센트.
그 숫자에 매몰되어, 정작 숫자가 담보해야 할 삶의 품격은 잊고 있는 건 아닌가.
혈귀의 눈에 새겨진 갖은자는 지울 수도, 속일 수도 없었다.
우리가 눈에 새길 숫자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가장 낮은 숫자가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지고,
가장 연약한 싹이 가장 먼저 햇살을 받는 세상.
획 하나로 변하는 '一' 대신, 누구도 함부로 손댈 수 없는 '壹'처럼.
그런 단단한 정직함이 우리 사회의 골조가 되기를 바란다.
무한성편 2편에서 주인공들은 '상현1, 코쿠시보(黒死牟)'와 맞서 싸운다고 한다.
그 영화를 하윤이와 볼 때까지,
숫자의 크기보다 그 숫자를 채우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쳐야겠다.
다음 중 숫자에 ‘갖은자(壹, 貳, 參 …)’를 쓰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요?
① 숫자를 더 멋있어 보이게 하기 위해
② 숫자를 빨리 쓰기 위해
③ 숫자를 고치거나 위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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