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정의 - 세번째 이야기
미국 LA에 살던 시절, 다니던 교회에 눈빛이 온화한 권사님 한 분이 계셨다.
결혼 전 성함은 김애자였다.
처음 뵌 날, 당신 이름의 뜻이 '사랑스러운 아이(愛子)'라며 직접 이름풀이를 해주셨다.
미국에서는 결혼한 여성이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자녀와 어머니의 성이 다르면 학교에서 이상하게 본다는 이유도 있었다.
장(張)씨 성을 가진 분과 결혼한 그분은 그렇게 '장애자' 권사님이 되셨다.
남편 성 때문이라며 억울해하셨지만,
'변'씨 남편을 만난 '신태자' 권사님이 옆에 계신 것이 그나마 위안이라고 하셨다.
'장애자(障碍者)'는 한때 공식 용어였다.
1981년 제정된 심신장애자복지법이 그 근거였다.
1989년 법이 전면 개정되면서 '자(者)'라는 글자에 담긴 비하의 뉘앙스가 문제로 지적되었다.
이후 '장애인복지법'으로 바뀌었고 '장애인'이 공식 명칭으로 자리 잡았다.
2000년대 들어 청소년들 사이에서 '애자'라는 말이 누군가를 조롱하는 은어로 퍼졌다.
그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된다는 사실도 모른 채 무분별하게 쓰였다.
더 심각한 것은 가치관이 형성되는 시기에 장애에 대한 편견이 무의식중에 스며든다는 점이다.
차별의 언어가 일상에 뿌리내리지 않도록 우리 사회 스스로 정화하는 힘이 필요하다.
잠시 '장애우(障碍友)'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했다.
1987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친구로 함께 살자는 소망을 담아 만든 말이었다.
선한 의도였지만 두 가지 비판이 따랐다.
당사자가 스스로를 '친구(友)'라 부를 수 없다는 문법적 모순과,
장애인을 늘 도움받아야 하는 수동적 존재로 고정한다는 지적이었다.
결국 이 표현은 공식 영역에서 사라졌다.
한자 '장(障)'을 분해하면 언덕(阝)과 글(章)이 합쳐진 형태다.
본래 '가로막다'와 '방어하는 울타리'라는 두 가지 뜻을 함께 품고 있다.
지장(支障)이나 장벽(障壁)처럼 대개 부정적인 맥락에서 쓰인다.
이 글자를 읽어온 역사에는 우리 사회가 장애인을 바라본 시선이 담겨 있다.
그 글자가 누군가의 앞을 가로막는 벽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함께 허물어야 할 벽이기도 하다.
수년 동안 보청기 없이는 잘 듣지 못하시던 아버지가 얼마 전 청각장애 등록을 하셨다.
장애는 결코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리의 부모일 수도, 친구일 수도, 언젠가의 나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그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이 글은 그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기기 위해 쓴다.
일본 유학 시절, 학업 스트레스로 공황장애를 겪었다.
응급실에 실려 갈 만큼 심한 발작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
정확한 병명을 모른 채 병원을 전전하다 '파닉쇼가이(パニック障害)'라는 진단을 받았다.
영어 'disorder'를 일본어로 '장해(障害)'라 번역한 용어였다.
그전까지 장해라는 단어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것 같다.
보험 약관에서나 봤을 법한 단어, 그것이 내 진단명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같은 병을 '징콩졍(惊恐症)'이라 부른다.
강박장애는 '치앙포졍(强迫症)'이라 한다.
한국이 '장애'라 부르는 상태를 중국은 증상 그 자체인 '증(症)'으로 표현한다.
한국에서 장애(障碍)와 장해(障害)는 다른 용어다.
'장애'는 신체나 정신적 조건이 일상생활에 제약을 주는 상태를 말한다.
'碍'는 '거리끼다'는 뜻으로 개인이 마주하는 방해에 초점을 둔다.
반면 '장해'는 부상이나 질병 치료 후 신체에 남은 영구적인 기능 손실을 뜻한다.
주로 산업재해나 자동차보험 약관에서 쓰인다.
'害'는 '해를 끼치다'는 뜻으로 노동력의 상실 정도를 측정하는 데 쓰인다.
요컨대 장애는 사람의 상태를 보고, 장해는 기능의 손실을 잰다.
장해라는 용어는 자동차보험 제도를 도입하며
일본 법령을 참고하는 과정에서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법률 현장에서 두 단어는 오랫동안 혼용되었고
지금도 그 경계가 명확히 정리되지는 않았다.
일본은 오랫동안 '장해(障害)'를 표준 표기로 삼았다.
전후 상용한자 제한 정책으로 획이 많은 '碍' 대신 '害'를 택한 결과였다.
1990년대부터 장애인 단체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害'가 해충이나 해악에나 쓰는 글자라는 이유였다.
2010년 일본 문화청은 어원의 역사성과 사용 빈도를 이유로 '碍'의 상용한자 등재를 거부했다.
그 타협안으로 등장한 것이 '障がい者'라는 표기다.
한자와 히라가나를 섞어 '害'를 지운 형태로 지자체와 기업들이 사용하고 있다.
중국에서도 장애인을 지칭하는 명칭이 바뀌어 왔다.
과거 '쓸모없다(廢)'는 뜻이 담긴 '잔페이런(残废人)'을 썼다.
이후 '잔지런(残疾人)'을 거쳐 최근에는 '잔쟝런(残障人)'이라는 표현이 자리 잡았다.
글자 하나가 바뀔 때마다 그들을 향한 시선도 조금씩 변했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맹인, 장님, 벙어리 같은 말들이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쓰이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처럼 순화된 용어를 사용한다.
일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몸이 불편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입에 붙기까지 시간이 걸리더라도 부르는 말이 바뀌면 보는 시선도 바뀐다.
단순히 당사자의 존엄을 위해서만이 아니다.
말이 바뀌지 않으면 그 말에 붙은 편견도 그대로 굳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도 한국어다운 표현을 고민할 때가 되었다.
병(病)과 장애(障碍)는 다르다.
병은 외부의 침입이나 내부 고장으로 생기는 병리적(pathological) 상태다.
치료를 통해 이전의 건강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회복이 전제된 개념이다.
장애는 그 사람의 몸과 정신이 구성된 방식 그 자체다.
되돌아갈 '이전'이라는 상태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감기 환자에게는 나아야 할 목표가 있지만 시각장애인에게 '원래 상태'란 없다.
장애는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그 조건 위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이 있다.
우리가 쓰는 '장애'라는 말에 두 가지 다른 개념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몸의 조건을 가리키는 'disability'다.
다른 하나는 공황장애나 ADHD처럼 병명에 붙는 'disorder'다.
이때의 장애는 기능이 통상적인 기준에서 벗어난 상태, 즉 '편차'에 가깝다.
문제는 같은 글자를 쓴다는 사실이다.
'disorder'에 장애라는 말이 붙는 순간 그 사람은 'disability'의 언어로 읽힌다.
진단명이 꼬리표가 되어 정신건강 서비스의 문턱을 높인다.
병원 방문이 늦어지고 치료가 미뤄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와 비슷하지만 다른 용어로 '위화감(dysphoria)'이 있다.
기능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상태가 자신답지 않다는 내면의 불일치를 뜻한다.
성별 위화감이 대표적인 예다.
자신의 정체성과 외부의 몸 사이의 간극에서 오는 고통이다.
이는 외부에서 측정할 수 없으며 진단 기준도 계속 변하고 있다.
실제로 2013년 '성 정체성 장애'가 '성별 위화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병명에서 장애를 뺐을 뿐인데 질병이 아닌 상태로 보는 시선이 생겨났다.
이름 하나가 바뀌자 당사자의 삶도 달라졌다는 보고가 잇따른다.
병, 장애, 스펙트럼, 위화감 사이의 경계는 생각보다 흐릿하다.
어디에도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은 늘 존재해 왔다.
그들은 기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준이 미처 닿지 못한 곳에 서 있을 뿐이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 벽을 세울지 아니면 함께 허물지 고민해야 한다.
'장(障)'이라는 글자가 가로막는 언덕이 될지 새로운 답이 될지는 결국 우리의 시선에 달려 있다.
"질병의 사회적 원인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분포되어 있지 않습니다.
더 약한 사람들이 더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그래서 더 자주 아픕니다."
사회역학자 김승섭은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이렇게 묻는다.
개개인의 삶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집니다."
차별을 경험한 장애인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유병률이 높다는 사실은
'장(障)'이라는 벽이 신체 내부가 아닌 사회 구조 안에 있음을 보여준다.
더 뼈아픈 지점은 데이터의 부재다.
소수자의 건강 기록이 빈약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회가 그들의 아픔을 기록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결과다.
기록되지 않은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사각지대는 무관심에 의해 유지된다.
'수화'를 '수어'로 부르자는 움직임도 같은 맥락이다.
수화가 보조적인 말짓이라면 수어는 고유한 문법을 가진 독립적인 언어다.
언어를 인정하는 것은 곧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인정하는 일이다.
수어를 언어로 부르는 사소한 전환이 수많은 이들의 존엄과 연결된다.
지하철 출근길 시위는 이 무관심에 대한 항의다.
모든 역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겠다는 약속은 두 번이나 지켜지지 않았다.
소음이 커야 겨우 들리는 사회에서 그들은 소음을 선택했다.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다.
다만 그 불편함이 시위대만을 향할 때 우리는 약속을 어긴 쪽을 쉽게 잊어버린다.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목소리 앞에서도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 반대의 전제에 무엇이 깔려 있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공감은 타고나는 능력이 아니다.
내가 그 자리에 있다면 어떨지 상상하는 연습이 쌓여 만들어진다.
'장(障)'이라는 글자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이 글자가 가로막는 벽이 될지 함께 허물어야 할 과제가 될지는 우리가 고르는 말에 달려 있다.
공동체의 실력은 가장 낮은 곳에서 오는 신호를 수신하는 능력으로 결정된다.
그 신호에 귀를 기울이고 같은 자리에 참여(參與)하는 것이 우리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이다.
한자 '장(障)'은 언덕(阝)과 글(章)이 합쳐진 형태입니다.
이 글자가 본래 품고 있는 뜻은 무엇일까요?
① 가로막다
② 도와주다
③ 치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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