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정의 - 두번째 이야기
※ 주의: 이 글은 특정 종교를 비하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밝힙니다.
도쿄 지하철의 첫인상은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출퇴근 시간, 승객이 쏟아져도 전화는 물론 대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스마트폰 보급 전이라 사람들은 문고판 책을 읽거나,
신문을 네 겹으로 접어 딱 어깨너비만큼만 펼쳐 읽었다.
타인에게 민폐(迷惑, 메이와쿠)를 끼치지 않으려는 배려가 몸에 밴 풍경이었다.
하지만 이토록 정돈된 공간에도 전혀 다른 부류가 있었다. 치한(痴漢, ちかん)이다.
어리석을 치(痴)에 사나이 한(漢).
만원 전철의 틈바구니 속에서 타인의 몸을 더듬는 자를 일컫는 말이다.
영어권에서도 'chikan'이라는 표현이 고유명사처럼 쓰일 만큼,
일본 사회의 고질적 문제를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치(癡)가 들어간 단어를 보면 치매(癡呆), 백치(白癡), 치정(癡情), 음치(音癡) 등이 있다.
감각이나 능력이 무딘 사람을 가리키는 이 '치'는,
현대 한국어에서는 몸치·길치·기계치처럼 접미사로도 쓰인다.
그런데 치한의 치(痴)와 음치의 치(癡)는 그 모양이 서로 다르다.
'痴'는 중국과 일본에서 쓰는 글자다. 병질엄(疒) 아래 알 지(知)가 들어 있다.
'癡'는 한국에서 쓰는 정자체(正字體)다. 병질엄(疒) 아래 의심할 의(疑)가 들어 있다.
한쪽은 아는 것이 병이라 하고, 다른 쪽은 의심하는 것이 병이라 한다.
이 모순은 동아시아만의 것이 아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말했다.
"Knowledge is power.(아는 것이 힘이다)"
시인 토마스 그레이는 반대로 말했다.
"Ignorance is bliss.(모르는 것이 약이다)"
수백 년이 지나도록 두 격언은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어쩌면 해답은 명쾌하다.
잘 알지 못하는 것도, 근거 없이 의심하는 것도 결국은 모두 어리석음이다.
장 프랑수아 마르미옹이 엮은 『내 주위에는 왜 멍청이가 많을까』에서 던지는 질문도 결국 일맥상통한다.
우리 주변의 멍청이를 탓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 어리석은 사람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탈진실(post-truth)의 시대, 맹목적인 믿음은 어리석음을 확신으로 포장하곤 한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痴가 되고, 근거 없이 의심하면 癡가 된다.
어느 쪽이든 결국 우리는 병질엄(疒)이라는 감옥 안에 갇히고 마는 셈이다.
종교란 무엇일까.
신성한 존재에 대한 믿음, 반복된 행위로 신과 인간을 잇는 의례,
같은 믿음으로 묶인 사람들의 공동체.
학자마다 정의가 다르지만 공통점은 하나다.
인간의 불안을 달래고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삼국은 불교라는 공통 분모를 가졌지만,
지금 각국의 종교 지형은 저마다 상이한 양상을 띤다.
일본인은 신도(神道)로 태어나고, 기독교식으로 결혼하고, 불교로 장례를 치른다고 한다.
믿음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종교를 소비하는 형태다.
중국은 헌법에 종교의 자유를 명시했지만,
실제로는 국가가 공인한 종교만 허용하고 나머지는 철저히 통제한다.
그럼에도 사원은 붐비고 조상 제사는 이어진다.
믿음은 이념 위에서도 살아남았다.
한국의 최근 통계에 따르면 무종교인이 51%에 달하며
개신교 20%, 불교 17%, 천주교 11%가 그 뒤를 잇는다.
하지만 종교가 있다고 답한 이들이 삶 속에서 얼마나 진지하게 신앙을 살아내고 있을까.
절반 이상이 무종교라 말하면서도 제사를 지내고 무속에 기댄다.
종교에 익숙한 것과 종교를 믿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 경계가 어디쯤인지, 나 역시 여전히 모호하다.
신념의 체계가 세분화될수록, 종교는 끊임없이 분화해 왔다.
수많은 종파와 분파로 나뉘었고, 이 과정에서
'이단(異端)'과 '사이비(似而非)'는 반드시 구분되어야 한다.
이단은 '다를 이(異)'에 '끝 단(端)'.
한 종교 안에서 해석의 차이를 말한다.
반면 사이비는 '닮을 사(似)', '말 이을 이(而)', '아닐 비(非)'.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본질은 전혀 다르다는 뜻이다.
사이비 종교의 피해는 끊이지 않는다.
교주를 신격화하고 신도를 성적으로 착취하거나 헌금과 노동력을 갈취한다.
가족과 친구를 멀리하게 만들고, 정치세력과 결탁해 이권을 챙기기도 한다.
피해의 구조는 놀랍도록 비슷하다.
교주의 특별한 계시, 선택받은 공동체라는 우월감, 외부와의 단절.
믿음이 클수록 탈출은 더 어려워진다.
나는 교회에 출석하지만 종교인은 아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귀국 후 코로나와 여러 사정이 겹치면서 신앙을 잃었다.
내가 30년 넘게 지켜온 믿음을 내려놓는 과정은 생각보다 고통스러웠다.
그 밑바닥에는 '매몰비용(sunk cost)', 즉 본전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믿어지지 않는 교리 앞에서도 주일마다 자리를 지켰던 것은 헌신이 아니라 집착이었다.
"이미 이만큼 바쳤는데, 틀릴 리가 없고 틀려서도 안 돼."
그 집착이 신앙을 지탱하는 순간,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투자 심리가 된다.
사이비 종교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같은 구조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믿어서 남아 있는가, 아까워 못 떠나는가.
앞서 소개한 책 『내 주위에는 왜 멍청이가 많을까』에서
사회학자 제럴드 브로네르는 젊은 시절 사이비 종교를 신봉했다고 털어놓으며 말했다.
"미친 사람이 아니어도 말도 안 되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왜 그럴지 생각해보니 이유는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 번째는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다.
자신의 신념에 부합하는 정보만 취사선택하고,
그에 반하는 증거는 철저히 배제하거나 왜곡하는 심리적 기제다.
기도 후에 시험에 합격하면 '신의 은혜'라 칭송하고,
설령 낙방하더라도 '또 다른 신의 뜻이 있을 것'이라며 합리화한다.
결국 어떤 결과가 나오든 믿음은 흔들리기는커녕 오히려 견고해질 뿐이다.
여기에 바더 마인호프 효과(Baader-Meinhof effect)까지 가세하면
그 믿음은 난공불락의 요새가 된다.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면 온 세상이 온통 그 대상이나
정보로 가득 찬 듯한 착각에 빠지는 현상이다.
빨간 차를 사고 나면 길거리에 빨간 차만 눈에 띄듯,
기적이라 믿는 순간 모든 우연은 '신의 섭리'가 된다.
마찬가지로 음모라 믿기 시작하면 세상의 모든 정보는
은폐된 진실을 가리키는 파편으로 둔갑하고 만다.
두 번째는 선택맹(choice blindness)이다.
인지과학자 페테르 요한손(Petter Johansson)이 고안한 실험을
닉 채터(Nick Chater)가 『생각한다는 착각』에서 소개한다.
참가자들에게 두 장의 얼굴 사진 중 더 매력적인 쪽을 고르게 한 뒤,
실험자가 몰래 사진을 바꿔치기했다.
참가자들은 자신이 고르지 않은 사진을 건네받고도
그것이 자신의 선택이라 믿으며 이유를 줄줄이 댔다.
"이 사람의 선한 눈매가 마음에 들었거든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얼굴의 눈매를.
인간은 먼저 판단하고 나중에 이유를 만든다.
우리가 믿는 것의 상당수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어느새 주어진 것일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확고한 신념이라 믿으며 기꺼이 방어한다.
세 번째는 의미를 찾으려는 본능의 역설이다.
삶의 의미를 간절히 갈구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세계관을
정교하게 설명해 주는 논리를 만나면 쉽게 무장해제된다.
본래 지식은 세상을 보는 '창'이어야 하지만,
확신이 독단이 되는 순간 지식은 자신을 가두는 '성벽'이 된다.
사이비가 공략하는 대상은 무지한 자가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삶의 의미를 가장 치열하게 찾는 자들이다.
탈진실(脫眞實)의 시대, 이 세 가지 함정은 서로를 강화하며 작동한다.
확증 편향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하고,
선택맹은 내가 선택했다는 착각을 심어주고,
의미에 대한 갈망은 그 착각을 믿음으로 굳힌다.
똑똑한 멍청이(smart idiot)는 무지해서 태어나지 않는다.
너무 확신했기 때문에 태어난다.
내가 대학에 갓 입학한 1995년 3월.
영문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Newsweek)》를 전공책과 함께 들고 다니는 선배들이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나도 바로 구독을 시작했다.
그 무렵 몇 주간 지면을 연일 장식했던 것 옴진리교(オウム真理教)가
출근길 지하철에 신경작용제 사린(sarin)을 살포한 사건이었다.
국제뉴스에 관심이 없던 시절이라 몇 글자 읽다 넘겼다.
십 년 뒤, 도쿄에 살며 실제 사건이 발생한 역(驛)을 매일 지나다녔다.
그제야 새삼 놀랐다.
더 놀라운 것은 집단의 핵심 간부들이
내가 다니던 도쿄대 출신이나 이공계 박사 같은 고학력자들이었다는 점이다.
지성의 최전선에 서 있던 그들이 어떻게 터무니없는 교주에게 삶을 저당 잡혔을까.
확증 편향과 선택맹,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본능이 그 답의 일부일 것이다.
한때 인터넷에서 유명해진 밈이 있다.
"나한테 이집트학을 전공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먹고살 방법은 박사학위를 따서
또 다른 사람에게 이집트학을 가르치는 것뿐이야.
그 친구 말마따나, 이거야말로 피라미드 사기지(pyramid scheme)."
실체 없는 가치를 아랫사람의 믿음으로 떠받치며 꼭대기만 배를 불리는 구조.
어느 학자의 자조 섞인 농담은, 현대 사회의 여러 신념 체계가
일종의 피라미드 사기가 되어가고 있음을 꼬집는다.
피라미드 사기든, 맹목적 신앙이든, 탈진실의 정치든 원리는 같다.
껍데기가 화려할수록 그 안은 비어 있다.
그 공백을 메우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어리석은 확신이다.
이 거대한 사기의 시대에 중심을 잡으려면,
어리석을 치(癡)를 밀어낼 세 가지 '치'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
첫째는 다스릴 치(治)다.
내 안의 확증 편향을 직시하고 요동치는 감정을 냉철하게 다스리는 힘이다.
둘째는 부끄러워할 치(恥)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외면하는 오만함 앞에서 기꺼이 고개 숙이는 용기다.
셋째는 이를 치(致)다.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드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자세로,
진실의 끝단에 닿으려는 태도다.
다스릴 치(治), 부끄러워할 치(恥), 이를 치(致).
이 세 글자가 어리석을 치(癡)를 밀어낼 때,
우리는 비로소 병질엄(疒)이라는 새장을 부수고 나올 수 있다.
멍청한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주위에 멍청한 사람이 눈에 띄지 않는다면,
내가 바로 그 멍청한 사람일 수도 있다.
*치매는 현재 차별어로 분류되어 순화어 사용이 권장됨.
한국의 대체어로는 인지증·인지저하증이 논의 중.
일본은 2004년 痴呆→인지증(認知症)으로 공식 변경했음.
중국·홍콩은 뇌퇴화증(腦退化症)으로 교체.
한편 중국어 痴呆(chī dāi)는 일상어로도 쓰이며 '멍청하다, 넋이 나가다'는 뜻임.
* 소셜미디어 원문 I have this friend who studied to become an egyptologist.
The only way he can make a living is by becoming a PhD
and teach others to become egyptologists.
As far as he is concerned, it is a pyramid scheme.
'사이비(似而非)'는 한자 세 글자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그 뜻을 가장 잘 풀어쓴 것은 무엇일까요?
① 완전히 다르고 전혀 닮지 않은 것
②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본질은 전혀 다른 것
③ 오래전부터 잘못 전해 내려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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