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정의 - 첫번째 이야기
도쿄에서의 학업을 마치고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한 지 몇 년 후였다.
유학 시절 출석하던 교회의 목사님과 메일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교회 소식과 지인들의 근황을 읽어 내려가던 중,
한 문장에서 숨이 턱 막혔다.
"참 안타까운 소식입니다만(本当に悲しいことに),
마에다(前田) 씨가 돌아가셨습니다(亡くなりました)."
마에다 씨, 그녀는 내게 각별한 은인이었다.
일본 생활 초기, 공황장애를 앓으며 암흑 같은 시간을 보냈던 내게
그녀는 차가운 바다 위에서 만난 구명조끼 같은 존재였다.
임상 상담 자격증이 있던 그녀는 매주 시간을 내어 나를 상담해 주었고,
내면의 불안을 잠재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또한 우리 부부가 막 결혼했을 때,
국제금융회사 일본 지사장이었던 그녀의 남편은
오다이바의 야경이 펼쳐진 고층 맨션으로
우리를 초대해 성대한 식사를 대접해 주기도 했다.
그토록 건강하고 생명력 넘치던 분이 고인이 되었다니.
나는 떨리는 손으로 돌아가신 마에다 씨의 메일 주소로 추모의 편지를 썼다.
영화 <러브레터>에서 와타나베 히로코가 눈 덮인 산을 향해
"오겡끼데스까(お元気ですか, 잘 지내시나요)?"를 외치던 그 심정으로,
닿지 않을 곳을 향해 뒤늦은 작별 인사를 보냈다.
하지만 며칠 뒤, 거짓말처럼 답장이 왔다.
발신인은 마에다 씨였다.
알고 보니 세상을 떠난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남편이었다.
일본은 민법상 결혼하면 부부가 같은 성을 써야 하는
'부부동성(夫婦同姓)'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실제로 96% 이상의 여성이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성을 따른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이름 대신 성에 '상(さん)'을 붙여 부르는 관습 때문에
"마에다 씨가 돌아가셨다"는 말이 곧바로 그녀의 죽음으로 오인된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다.
결혼 후 여자의 성(姓)이 사라지는 것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현실.
한국과 중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여성은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르고,
자녀도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는다.
서구권의 '메이든 네임(maiden name)', 즉 처녀 적 이름이라는 표현 자체가
이미 그것을 당연한 일로 전제하고 있다.
우리는 이 불균형을 너무도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것으로,
심지어 '타당(妥當)'하다고까지 믿으며 살아왔다.
나는 오늘 그 '타당함'의 뿌리가 되는 한자 '타(妥)'를 통해
우리 사회에 깊이 박힌 불평등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우리가 무언가 이치에 맞고 올바르다고 여길 때 사용하는 단어, '타당(妥當)'.
이 '타(妥)' 자는 옥편에서 '온당할 타'로 풀이된다.
하지만 '타(妥)'는 손톱을 뜻하는 '조(爫)'와
여자를 뜻하는 '녀(女)'가 결합한 회의자(會意字)다.
고대 문자학자들은 이를 "여자의 머리를 눌러 복종시키는 모습"으로 해석한다.
위에서 내려온 손이 아래 있는 여자를 짓누르는 형상.
여성이 순응하고 복종할 때 비로소 집안이 평안해지고,
그것이 곧 '온당하고 마땅한' 상태라는 고대인들의 인식이 이 한 글자에 새겨져 있다.
생각해보면 편안할 '안(安)' 역시 여자(女)가 집(宀) 안에 있는 모습 아닌가.
'타당함'의 뿌리에도, '편안함'의 뿌리에도, 여성의 굴종이 조건으로 깔려 있다.
한자(漢字)는 유독 여성에게 가혹하다.
부정적 개념을 나타내는 많은 글자에는 '여(女)' 자가 부수로 들어간다.
세 명의 여자가 모이면 간악하다는 '간(姦)',
간사하다는 '간(奸)',
망령되다는 '망(妄)',
방해가 된다는 '방(妨)'.
질투와 시기를 뜻하는 '질(嫉)'과 '투(妬)', 아첨할 '미(媚)', 싫어할 '혐(嫌)'.
인간관계의 어둡고 추악한 모습이 모조리 여성의 탓으로 전가되어 있는 것 같다.
반면 사내 남(男)은 밭(田)에서 힘(力)을 쓰는 노동의 가치를 담고 있고,
'걸(傑)'처럼 뛰어남을 뜻하는 글자에는 '사람 인(人)' 변이 쓰인다.
아이러니한 점은, '여(女)' 자 자체 원래 중립적인 글자였다는 사실이다.
옥편에서 '계집 녀'로 풀이되는 이 글자는
현대에 와서 비하적 뉘앙스를 갖게 되었지만,
본래는 일본어 '온나(女)', 중국어 '뉘(女, nǚ)'처럼
단순히 여자를 가리키는 중립적 표현이었다.
한국어에서 '여자'는 생물학적 성별을,
'여성'은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성인 여성을 가리킨다.
일본어, 중국어도 마찬가지다.
세 나라 모두 '여(女)'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정중하게 부를 때는 '성(性)' 자를 덧붙인다.
나는 엔지니어로서 늘 객관적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하루에도 몇 번씩 입에 올리던 말,
'이 데이터는 타당(valid)한가?'
'설명의 논거는 타당한가?'
에는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가치판단이 들어있었다.
손으로 여자의 머리를 짓누르는 형상이 '온당하다'는 뜻이 된 글자, '타(妥)'.
객관을 확인하는 도구로 평생 써온 말이 그런 기원을 품고 있었다.
시선을 '과거'의 한자에서 '현재'의 사회로 돌려보자.
한국은 OECD 국가 중 성별 임금 격차가 가장 큰 나라다.
젠더 갈등은 극에 달했고, 그 끝에 출산율 0.6명대라는 전대미문의 숫자가 나왔다.
가정 안에서는 여전히 여성이 가사와 육아의 대부분을 담당한다.
맞벌이 부부조차 집안일은 '아내의 몫'으로 여겨진다.
아이가 아프면 엄마가 회사를 쉬어야 한다는 암묵적 압력이 작동하고,
남편이 설거지를 하면 '착하다'는 칭찬을 받지만
아내가 설거지를 하는 것은 당연시된다.
직장도 다르지 않다.
임신한 여성에게 "지금 이 시기에 애를 가지면 어떡하냐"고 말하고,
승진 심사에서는 "결혼하면 어차피 그만둘 텐데"라는 편견이 평가 기준이 된다.
육아휴직을 다녀온 여성은 파트장에서 일반 직원으로 강등되고,
어떤 회사는 아예 취업규칙에 "육아휴직자는 승진 대상 제외"라고 명시해두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당연한 질서'로 통용되는 사회.
3,000년 전 '타(妥)' 자가 새긴 그 '온당함'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한국 여성들은 보이지 않는 천장에 가로막혀 있다.
능력이 있어도, 성과를 내도,
일정 직급 이상으로는 올라가지 못하는 '유리천장(glass ceiling)'.
투명해서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장벽이다.
일본은 결혼과 출산 후 경력이 단절되는 'M자 커브'가 여전히 견고하고,
세계경제포럼(WEF)의 성 격차 지수에서 선진국 중 최하위권을 맴돈다.
중국은 마오쩌둥이 "여성이 하늘의 절반을 떠받친다"고 선언한 이래
노동 참여율은 높아졌지만, 권력의 핵심으로 올라갈수록 여성의 자리는 사라진다.
그런데 차별의 구조 안에서는 영원한 강자도, 영원한 안전지대도 없다.
시야를 서구권으로 넓히면, 아시아 남성들 역시 또 다른 천장 아래 서 있다.
바로 '대나무 천장(bamboo ceiling)'이다.
실리콘밸리에는 수많은 아시아계 엔지니어가 일한다.
하지만 경영진으로 올라서는 비율은 백인 남성에 비해 현저히 낮다.
구글의 순다르 피차이, 마이크로소프트의 사티아 나델라 같은 인도계 CEO들은
토론과 논쟁에 익숙한 문화적 배경을 발판 삼아 주류 사회에 안착했다.
반면 겸손과 조화를 미덕으로 여기는 동아시아 남성들은,
과거의 여성이 그랬듯 '말 잘 듣고 조용한 실무자'로 머물기를 강요받는다.
유리천장 아래 갇힌 여성들.
대나무 천장 아래 갇힌 동아시아 남성들.
차별의 구조는 돌고 돌아 결국 모두를 억누른다.
'온당하다'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짓누르던 그 손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향해서도 내려온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 언어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일본어와 중국어를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 한국인들이 '다르다'와 '틀리다'를 얼마나 혼용하는지 깨달았다.
한국 사람들은 종종 "너랑 나는 틀려"라고 말한다.
"다르다(different)"고 해야 할 상황에서 "틀리다(wrong)"를 선택하는 것이다.
일본어도 그 경계가 흐릿하기는 마찬가지다.
일본어를 막 배우기 시작했을 때, 'No'에 해당하는 말로 '이이에(いいえ)'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현지인이 내 말에 "違う(ちがう, 치가우)"라고 답하는 것이 낯설었다.
'다르다'는 뜻으로만 알고 있던 단어가, 맥락에 따라 '아니다'로도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중국어는 명확하다.
'다르다'는 '不同(bùtóng)' 또는 '不一样(bùyīyàng)',
'틀리다'는 '不(bù)' 또는 '不對(bùduì)'로 칼같이 나뉜다.
두 단어를 섞어 쓰는 일은 없다.
그래서 유튜브는 물론 지상파 방송에서조차
'다르다'고 해야 할 자리에 '틀리다'고 말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입이 근질거린다.
하지만 일일이 따라다니며 고칠 수는 없는 노릇.
다만 언어는 쓰는 사람이 바뀌면 결국 따라 바뀐다고 믿는다.
한국어에서 '다름'이 곧 '틀림'이 되는 순간,
나와 다른 대상은 '오답'으로 규정되고 배제된다.
다름이 틀림으로 통용되는 언어 구조 속에서 다양성이 설 자리는 좁아진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인간은 언어라는 집 안에서만 생각하고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그 집이 처음부터 차별적으로 설계되어 있다면,
그 안에 사는 우리의 존재 방식도 편협해질 수밖에 없다.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한 자식 키워내는 홀아비는 없어도,
과부야 열 자식 키워낸다는 말이 안 있드라고."
과거의 언어가 여성을 억눌러야 할 존재로 새겼을지라도,
삶과 문학은 여성을 생명을 지켜내는 강인한 주체로 기록해 왔다.
나는 한 번도 여성으로 살아본 적이 없다.
그러니 이 글이 자칫 '맨스플레인(mansplain)'—
알지도 못하면서 끼어드는 남성의 훈수—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혹은 그저 어설픈 편들기로 여겨질 수도 있다.
선의만으로 대신 말해주려는 온정주의(paternalism)가 얼마나 공허한지도 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하나다.
우리 부엌에는 다양한 그릇들이 있다.
찌개를 끓이는 뚝배기, 밥을 담는 공기, 국을 건지는 국대접.
저마다 생긴 모양이 다르고, 쓰임새가 다르다.
그릇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형태가 아니다.
이가 살짝 나간 낡은 그릇이라도 정성 어린 음식을 담으면 그 존재감이 달라진다.
그릇은 다를 뿐, 틀린 것이 없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
여자들이 모이면 시끄럽고 소란스럽다는,
그 수군거림을 깨진 접시에 빗댄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속담을 경고가 아닌 초대로 읽고 싶다.
3,000년 전 돌에 새겨진 편견도,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굳어버린 불평등도,
깨야 할 것은 충분히 깨져야 한다.
차이는 다름이지 틀림이 아니다.
그러니 이제, 낡은 접시를 깨자.
한자에는 유독 '여(女)' 자가 부수로 들어간 부정적 글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다음 중 그 예가 아닌 것은 무엇일까요?
① 간사할 간(奸)
② 싫어할 혐(嫌)
③ 뛰어날 걸(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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