赤 : 적도가 '빨간 길'인 이유

2부 과학 - 다섯번째 이야기

by 박성봉

초록 지붕집, 빨강 머리 소녀


나는 어릴 적부터 독서를 좋아하지 않았다.

성인이 되어서도 4년 전까지 완독한 책은 서른 권이 채 되지 않았다.

늦바람이 더 무섭다더니.

요즘 고전 명작들을 다시 읽으며,

어린 시절 줄거리만 쫓느라 흘려보낸 장면들을 발견하는 재미에 빠져 있다.

『소공녀』의 세라 크루,

『작은 아씨들』의 조 마치,

『키다리 아저씨』의 제루샤 애벗.

그 사이에서 유독 선명하게 그려지는 이름이 있다.

『빨간 머리 앤』이다.



원제는 《Anne of Green Gables》, 직역하면 '초록 지붕 집의 앤'이다.

일본에서는 '赤毛のアン(아카게노 안)'이라는 제목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고,

한국에서는 '빨강 머리 앤'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초록 지붕' 대신 '빨간 머리'가 강조된 셈이다.

빨강과 초록은 보색(補色)이다.

색상환(色相環)에서 정반대에 위치하며, 서로를 가장 돋보이게 한다.

평온한 초록 지붕 아래, 호박(琥珀)빛의 붉은 머리 소녀.

그녀에게 주근깨와 빨간 머리는 평생의 콤플렉스였지만,

의도했건 아니건 이보다 극적인 대비가 있을까.


문득 색(色)에 대해 여러 궁금증이 생긴다.

우리가 인식하는 색의 실체는 무엇일까?

같은 색이 사람마다 똑같이 보이는 걸까?

색맹인 사람은 어떤 세상을 볼까?

자외선을 감지한다는 조류나 곤충이 보는 세상은 어떨까?

지구의 허리를 가르는 선을 왜 적도(赤道)라 부르고,

교과서에는 왜 황도(黃道) 12궁(宮)이 튀어나와 우리를 괴롭혔나?

예전 우리 장례식에서 흰 굴건(屈巾) 상복을 입던 것이

언제부터 검은색으로 바뀐 걸까?

이 글은 그런 물음들을 따라간다.

먼저 빛과 색의 본질부터 들여다보자.



물리적인 색(色)


엄밀히 말해 세상에 '색'이라는 실체는 없다.

색은 빛이 사물과 만나 반사되고, 망막을 자극하고, 뇌가 해석해낸 감각이다.


17세기, 뉴턴은 색이 빛 속에 있는지 눈 속에 있는지 알고 싶었다.

햇빛이 프리즘을 통과하자 흰 빛은 일곱 가지 색으로 나뉘었다.

백색광 안에 모든 색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뉴턴은 색마다 꺾이는 각도가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빨강은 조금 꺾이고, 보라는 크게 꺾인다.

그에게 색은 빛 자체에 원래부터 깃든 고유한 속성이었다.

굴절이 색을 만드는 게 아니라, 색이 다르기 때문에 굴절이 달라지는 것이었다.

이 발견은 훗날 분광학으로 이어졌고,

천문학에서 화학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꼭 필요한 기술이 되었다.


약 100년 뒤, 괴테는 색을 다르게 바라보았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쓴 문학의 거장, 바로 그 괴테다.

뉴턴이 빛을 쪼개 분석했다면, 괴테는 인간이 색을 어떻게 느끼는지에 주목했다.

노란색 옆에 파란색을 놓으면 둘 다 더 선명해 보인다.

빨간색을 오래 응시하다 흰 벽을 보면 초록 잔상이 남는다.

색은 물리적 속성 이전에 경험이라고 그는 보았다.

과학계는 오랫동안 외면했지만, 현대 심리학과 디자인은 그의 통찰을 되살렸다.

병원 벽이 연두색인 이유, 패스트푸드 로고가 빨간색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색에 대한 두 관점은 현대 기술에서 각각 다른 모습으로 구현되었다.


뉴턴의 분광은 훗날 빛의 삼원색 RGB를 발견하는 토대가 되었다.

스마트폰 화면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면 빨강, 초록, 파랑 점들이 빼곡하다.

이 세 색의 조합만으로 총천연색을 만들 수 있다.

셋을 모두 합치면 흰색이 된다.

가산 혼합(加算混合)이다.

TV, 모니터, LED 조명. 빛을 직접 쏘는 모든 기기가 이 원리 위에 서 있다.


괴테의 색채론은 안료의 삼원색을 다루는 감산 혼합의 토대가 되었다.

시안(Cyan), 마젠타(Magenta), 노랑(Yellow), 그리고 검정(Black의 K).

이 네 색의 조합이 CMYK다.

물감은 빛을 흡수하고 남은 것만 반사한다.

빨강과 파랑을 섞으면 보라가 되지만 선명해지진 않는다.

섞을수록 탁하고 어두워지는 감산 혼합(減算混合)이다.

인쇄소의 윤전기, 화가의 팔레트,

종이 위에 찍히는 모든 색이 이 원리를 따른다.



빛의 색을 직접 보건, 물체에서 반사된 빛을 보건,

색을 인식하는 것은 결국 주관적인 경험이다.

우리 눈의 망막은 스마트폰 뒤에 달린 이미지센서와 비슷한 구조다.

그 안에는 빛의 명암을 감지하는 막대세포(桿狀細胞)와

색을 구분하는 원뿔세포(圓錐細胞)가 있다.

원뿔세포는 빨강, 초록, 파랑 세 가지 빛에 각각 반응한다.

이 세 신호의 조합으로 우리는 수만 가지 색을 인식한다.

색맹은 세 종류의 원뿔세포 중 하나 이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다.

적록색맹은 빨강과 초록에 반응하는 세포에 이상이 생겨 두 색이 비슷하게 보인다.


뇌는 세 채널의 신호를 받아 연산하고, 없는 색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노란색 파장이 눈에 들어올 때와 빨강과 초록 빛이 동시에 들어올 때,

뇌는 둘 다 같은 노랑으로 읽는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라 뇌가 재구성한 그림이다.

그러니 내가 보는 앤의 빨간 머리와

당신이 보는 빨간 머리가 같다고 확신할 수 없다.

색은 빛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의 눈과 뇌 안에 있다.


문화적인 색(色)


색은 단순한 물리적 파장이기 전에 하나의 문화적 코드다.

한·중·일 삼국은 같은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으면서도,

각기 다른 색의 궤적을 그리며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해 왔다.



중국인에게 빨간색은 번영과 생명력의 상징이다.

'홍(紅)'은 단순히 색을 가리키는 명사를 넘어,

'인기 있다', '번창하다'는 뜻의 형용사로 통용된다.

인기인을 '홍런(紅人)', 인터넷 스타를 '왕홍(網紅)'이라 부른다.

붉은빛이 곧 성공의 기운이라는 믿음이 그 안에 있다.

춘절 거리를 뒤덮는 붉은 등과 세뱃돈 봉투 '홍바오(紅包)'도 같은 맥락이다.

빨강은 중국인에게 액운을 막고 복을 부르는 색이다.


일본은 의외로 파랑(靑)의 나라다.

일본어 '아오(青)'는 바다와 하늘의 푸름을 넘어 숲의 초록까지 포괄한다.

신호등 초록불을 '아오신고(青信号)'라 부르는 것은

자연의 푸름을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바라보는 그들만의 감각이다.

축구 국가대표팀 '사무라이 블루'의 유니폼 역시

차분함과 절제를 중시하는 일본 특유의 정서를 담고 있다.


한국은 오랫동안 흰색(白)을 숭상해 왔다.

백의민족에게 흰색은 고결한 삶의 빛깔인 동시에 죽음과 애도의 색이었다.

태어나 처음 입는 배냇저고리도 흰색이었고,

세상을 떠날 때 몸을 감싸는 수의(壽衣)도 흰색이었다.

사람은 흰색으로 왔다가 흰색으로 떠났다.

그 사이, 조상들은 흰 굴건(屈巾)에 삼베 상복을 입고 고인을 보냈다.

거친 삼베의 결은 슬픔의 깊이를 몸으로 표현하는 방식이었을까.

삶과 죽음을 한 색으로 꿰어온 민족이었다.

그 흰 상복이 일제강점기와 서구화를 거치며 검은 양복으로 바뀌었다.

흰색이 사라진 자리를 검은색이 채웠다.



한국은 흰색만의 나라가 아니다.

색동저고리와 단청에는 오방색(五方色)이 살아 있었다.

동양에서 색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우주의 질서인 음양오행(陰陽五行)을 시각화한 체계였다.


동쪽은 목(木), 청색(靑), 청룡(靑龍).

서쪽은 금(金), 백색(白), 백호(白虎).

남쪽은 화(火), 적색(赤), 주작(朱雀).

북쪽은 수(水), 흑색(黑), 현무(玄武).

중앙은 토(土), 황색(黃), 황룡(黃龍).


적도(赤道)라는 말도 여기서 왔다.

남쪽은 화(火), 즉 불의 방향이었기에 그 길을 붉은 길이라 불렀다.

동아시아가 남반구에 있었다면, 북쪽이 더웠을 테고 북쪽이 빨간색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오선(子午線)도 마찬가지다.

자(子)는 북쪽, 오(午)는 남쪽.

12지신에도 방향이 있었고, 그 방향이 하늘과 땅을 나누는 선의 이름이 되었다.


밤하늘에도 같은 질서가 있었다.

태양이 지나는 길은 황도(黃道), 중앙의 색인 황색을 따온 이름이다.

황도 12궁은 그 길 위에 놓인 열두 개의 별자리다.

북극성이 머무는 밤하늘의 중심은 자미원(紫微垣), 보랏빛 성채다.

음(靑)과 양(赤)이 섞인 보라는 동양에서 가장 고귀한 균형의 색이었다.

황제의 색이 보라였던 것은 그 때문이다.

낮의 황제는 황금빛 길을 걷고, 밤의 황제는 보랏빛 성에 머문다.

자금성(紫禁城)의 '紫'는 바로 이 자미원에서 따온 것이다.

하늘의 보랏빛 성채를 이름에 새긴 땅 위의 궁궐.


색은 단순한 반사광이 아니었다.

우주를 이해하고 삶을 견디기 위해 조상들이 덧입힌 철학이었다.

색 안에는 문화가 있고, 문화 안에는 철학이 있다.

그렇다면 색은 애초에 무엇인가.



철학적인 색(色)


근묵자흑(近墨者黑),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

근주자적(近朱者赤), 붉은 것을 가까이하면 붉어진다.

묵(墨)은 먹이고, 주(朱)는 붉은 안료다.

이 대비는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을 떠올리게 한다.

1830년 프랑스, 나폴레옹의 시대가 저문 뒤였다.

적(赤)은 군인의 붉은 제복, 흑(黑)은 성직자의 검은 수단(修段)이라 읽힌다.

평민이 출세할 수 있는 길은 둘뿐이었다.

주인공 줄리앵 소렐은 두 색 사이에서 출세를 꿈꾸다 파멸한다.

색은 그 시대의 욕망을 입고 있었다.



흑(黑)은 색이 아니다.

빛의 부재, 혹은 모든 빛이 흡수된 상태다.

먹구름이 검은 것은 구름 자체가 검기 때문이 아니다.

두터운 수증기가 햇빛을 차단해 우리 눈에 닿지 못할 뿐이다.

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로 올라가면 그 먹구름은 그저 흰 구름이다.

시점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검은 것이 흰 것이 된다.

흑은 어둠의 본질이 아니라, 빛이 닿지 못한 상황이다.


빨강(赤)은 다르다.

가시광선 중 파장이 가장 길어 가장 멀리까지 닿는다.

노을이 붉고, 위험 신호가 붉은 이유다.

갓 태어난 아기를 적자(赤子)라 하고, 빈손을 적수(赤手)라 부른다.

생명의 시작이자 가장 순수한 상태.

흑이 빛의 부재라면, 적은 빛의 출발점이다.


그런데 이 모든 색이 사실은 비어 있다면 어떨까.

『반야심경(般若心經)』에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색(色)은 눈에 보이는 색깔이 아니다.

형체가 있는 모든 물질적 존재를 뜻한다.

그것이 곧 공(空)이라 했다.

양자역학이 말해주는 것도 다르지 않다.

원자 부피의 99.99% 이상은 텅 빈 공간이다.

단단해 보이는 물질도 확대하면 대부분 비어 있다.

우리가 보는 색도 특정 파장의 떨림일 뿐이다.

색은 비어 있고, 비어 있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



90년대 최불암 배우의 홍삼 광고에 이런 카피가 있었다.


"요즘 자꾸 빨간색이 좋아져요."


아직 내 옷장에 빨간 옷은 한 벌도 없다.

하지만 언젠가 정오의 태양 아래 그림자 없는 적도에서

싱가폴 슬링을 홀짝여보고 싶다.

빨강이 좋아지는 나이가 되면,

나는 어떤 색으로 세상을 보고 있을까.




[독자 참여 코너]


L.M. 몽고메리의 소설 《Anne of Green Gables》.

1979년 일본 '세계명작극장' 시리즈로 애니메이션이 제작되었습니다.

이 애니메이션의 일본어 제목은 무엇일까요?


① 赤毛のアン(아카게노 안) — 빨강 머리 앤

② 紅の豚(쿠레나이노 부타) — 붉은 돼지

③ 赤ずきんチャチャ(아카즈킨 차차) — 빨간 망토 차차


정답은 댓글로!




『소공녀』, 『작은 아씨들』, 『키다리 아저씨』.

주인공들의 꿈은 결국 남성의 후원이나 인정 안에서만 허락되었다.

스스로 빛나는 존재였음에도, 그 빛을 증명하는 무대를

언제나 남성이 마련해주어야 했다는 것이 과연 타당(妥當)한가?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