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와의 대화가 길어지지 않았던 이유

길지 않은 대화가 남긴 거리

by JH


길지 않은 대화가 남긴 거리


대화가 길어지지 않는 날들이 있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말이 멈추는 순간들.


상대방이 더 할 말이 없어서도 아니고,

내가 피곤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그 지점에서 대화는

충분하다고 느껴졌다.


예전에는 대화가 길어지지 않으면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계가 아직 덜 익은 것 같고,

조금 더 애써야 할 것 같았다.

말을 이어가야 친해질 수 있다고 믿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대화가 길어지지 않는 이유를

상대에게서만 찾지 않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누군가가 내 생활 안으로 깊게 들어오는 것을

완전히 원하고 있지는 않았다.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은 분명히 있다.

다만 그 친해짐이

삶의 리듬을 바꾸는 방식이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내 일상에 설명이 필요해지고,

선택에 대해 이유를 덧붙여야 하고,

감정의 결까지 공유해야 하는 관계는

지금의 나에게는 조금 벅찼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에게도 비슷한 거리를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까워지지 않으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깊게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말의 길이를 자연스럽게 조절했다.


필요한 만큼 말하고,

그 이상은 굳이 붙잡지 않는 방식으로.


대화는 점점

필요한 부분만 남게 되었다.


어디까지 이야기할지

굳이 정하지 않아도

서로가 그 선을 알고 있는 것처럼.





어릴 때 자주 들었던 말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전화는 용건만 간단히.


그 말이 이렇게 오래 남아

지금의 대화 방식이 될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해서

대화가 가볍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짧은 말 안에도

상대의 상황은 충분히 전해졌고,

나의 상태도 필요한 만큼 전달되었다.


말이 적다고 해서

관심이 적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제야 받아들이게 되었다.


오히려 대화가 길어질수록

관계가 깊어지지 않는 순간들도 있었다.


장황한 말 끝에

정작 아무것도 남지 않는 날들.

그런 날의 대화는

시간을 많이 썼다는 기억만 남겼다.





관계의 밀도는

말의 양과 꼭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번 확인했다.


필요한 대화만으로도

관계는 유지되었고,

때로는 더 단단해졌다.


서로를 지나치게 해석하지 않아도 되었고,

침묵을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었다.


말하지 않은 부분이

결핍처럼 느껴지지 않는 관계는

생각보다 안정적이었다.


적당한 거리는

관계를 느슨하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숨 쉴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항상 연결되어 있지 않아도 된다는 감각은

혼자 있는 시간을

외로움으로 바꾸지 않았다.


나와의 대화가 있었고,

다른 사람과의 대화도 있었다.


모두 깊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균형.


누군가에게 계속 맞춰야 하지 않았고,

나 자신에게서 멀어질 필요도 없었다.


대화가 길어지지 않았던 이유는

어쩌면 관계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관계를 오래 두고 보기 위한 선택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모든 관계가 깊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 대화가

끝까지 이어질 필요도 없다고 느낀다.


말이 멈춘 자리에는

공허함보다는 여백이 남았다.


그 여백은

지금의 생활을 방해하지 않았고,

앞으로를 조급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아직은,

그 상태가 불편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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