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해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조용히 나를 지키는 방식

by JH


어떤 자리는

사람을 만나기 전에

먼저 자세를 만들게 한다.


무슨 말을 어디까지 해야 할지,

어디에서 웃고 어디에서 넘겨야 할지

몸이 먼저 가늠하는 시간이 있다.


질문은 늘 비슷하다.

형태만 조금 다를 뿐

닿는 자리는 거의 같다.


연애는 해봤는지,

마지막은 언제였는지,

요즘은 누구를 만나는지.

혼자 살 수는 있는지,

결혼 생각은 없는지,

왜 아직 혼자인지.


그 질문들 앞에서 나는 종종

하나의 삶이 아니라

설명이 필요한 상태가 된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보다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가

더 먼저 요구되는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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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내 하루를 안다.

어떻게 벌고,

어떻게 버티고,

무엇을 줄이고 무엇을 붙잡으며

여기까지 왔는지 안다.


투잡을 하며

먹고 사는 일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주말에도 내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으려 애쓴다.


운동을 하고,

일을 하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몫을

조용히 끝내며 산다.


그런데 그런 말들은

대개 충분한 답이 되지 못한다.


듣는 쪽은 질문을 던질 때부터

이미 다른 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결론은 자주 같은 자리로 돌아간다.

그건 조금씩 사람을 닳게 한다.


설명하는 일 자체보다

설명 끝에 남는 공기가 더 피곤하다.


아, 그래도.

하지만 결국은.


그 짧은 말들 안에

내 삶은 자꾸 미완의 것으로 정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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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하는 사람의 자세


해명은

잘못한 사람이 하는 것처럼 들릴 때가 있다.


나는 틀린 답을 쓴 적이 없는데

자꾸만 정정할 기회를 받는 기분.


정답이 있는 문제라면

이렇게 오래 흔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의 삶은 결혼으로 정리되고,

누군가의 삶은 가족이라는 단어로 설명되지만

모든 생이 같은 결말을 향해 간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나는 정답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오답으로 분류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아직 채점할 수 없는 시간을

성급하게 매겨진 점수로 읽고 싶지 않을 뿐이다.


어떤 삶이 맞았는지는

끝에 가서야 알게 되는지도 모른다.


내 마지막이 후회로 가득했는지,

아니면 서툴렀어도 내 쪽으로 살았는지.

그건 지금 미리 답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중간의 삶을 자주 결론처럼 말한다.


혼자라는 상태를

잠시 지나가는 구간으로만 여기거나,

어딘가 잘못 접힌 결과처럼 받아들인다.


그 단순한 해석 앞에서

나는 점점 말수가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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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쪽으로 조용히 기울어가는 일


그래서 어느 날부터는

설명하지 않는 쪽을 택하게 되었다.


무례하게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내 시간을 아끼기 위해

조용히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혼자 있는 공간에서는

아무도 나의 현재를 수정하려 들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그 이유를 장황하게 꺼내놓지 않아도 된다.


주말에도 일을 하고

운동을 하고

할 일을 하나씩 끝내고 나면

하루는 의외로 또렷한 모양을 가진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안다.


오늘도 쉽게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것.

오늘도 내 몫을 대충 넘기지 않았다는 것.


그런 날에는

혼자라는 말이

결핍보다 질서에 가깝게 느껴진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안에서

나는 비로소 내 속도로 돌아온다.


남의 기준에 맞춰 접어두었던 세포들이

조금씩 펴진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질문들보다

내가 실제로 살고 있는 하루를

더 중요하게 봐주는 시선.


그 조용한 신뢰가

생각보다 깊은 곳까지 닿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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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아도 열리는


이제는 안다.

나를 설명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숨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어떤 날에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선명해지는 나도 있다는 것을.


세상은 여전히 단편적인 답을 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조금 오래 걸리는 삶을 살고 있다.


지금 당장 이해되지 않아도

한 칸으로 정리되지 않아도

내가 감당하며 지나온 시간은

이미 내 안에 분명하게 남아 있다.


그래서 해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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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나를 지키기 위해

내가 내 쪽으로 문을 여는 시간에 가깝다.


누군가의 질문으로 시작되지 않는 하루,

누군가의 판단으로 마무리되지 않는 저녁.


그 시간 안에서는

굳이 증명할 것이 없다.


나는 그대로 밥을 먹고,

일을 하고,

몸을 움직이고,

해야 할 것을 하고,

내가 살아낸 하루를 내 쪽에서 받아들인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가슴 어딘가를 오래 눌러오던 문장들이

조금씩 힘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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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직, 왜 그렇게, 왜 굳이.


그 질문들은 문밖에 남고

나는 내 안으로 조금 더 들어온다.


해가 기울고

하루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시간.


그때의 나는

무언가를 증명한 사람이 아니라

더는 해명할 필요가 없는 사람처럼 가볍다.


그리고 그 가벼움은

누가 허락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돌려준 자리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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