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질 짜내는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면접을 보고 있는 듯하다.
물론 정말 가고 싶은 곳도 있지만, 정말 요즘 같은 시기에 낼 곳이 없어서 이력서를 냈다가 면접 제의가 와서
무기력을 극복해보고자 저벅저벅 면접장으로 향한 일이 많다.
절박함이 절실한 지금과 같은 때, 무기력이라니.
저 멀리 신갈까지 면접을 보러 간 적이 있다. 뭔가 맘에 걸리는 이상야릇한 기분.
거의 ktx를 타고 본가에 내려가는 듯한 시간적 거리로 신갈에 도착하고서야 그 기분의 정체를 알았다.
아. 여긴 회사가 있을 곳이 아니구나.
유난히도 매서운 바람에 손이 찢어질 것 같은 맹추위를 뚫고,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면접은 봐야지라고 들어가서 15분을 창고 같은, 그리고 햇살이 너무 강렬해서 얼음물이 먹고 싶을 정도의 장소에서 대기한 후 면접에 임했다.
짧게 요약하자면, 나에게 관심이 있기보다는 전 회사의 기밀을 빼내고 싶어서 불러본 느낌이랄까.
이력서는 면접을 시작하고서야 보는 듯했고, 팀장이라는 사람은 대표의 기(?)에 눌려 한 번의 질문도 제대로 나에게 던지지 못했다.
그들도 나를 평가하지만, 나도 그들을 평가한다.
신갈의 그 회사, 그 대표는 전 회사 대표와 얼굴만 다를 뿐 비슷한 사람인듯했다.
회사의 성장에 직원들의 무한한 희생이 뒤따라야 하고, 따라오지 못하면 '정리'할 대상.
'정리했다'라고 허세 넘치게 말했지만, 조금만 더 이야기해보면 그가 직원들에게 '정리되었다'는게 뻔하게 드러나는... 그런 사람.
나도 미련이 없었지만, 그들도 미련이 없던 면접.
또 한 번은 지원한 적도 없는데 나의 이력서를 서칭 해서 연락이 온 온라인 패션 spa 브랜드.
인터넷에 그 브랜드 이름만 쳐보고도 알았다. 나와 '결'이 맞지 않는 곳이라는 걸.
깎아놓은 듯한 몸매에 타이트한 핏, 화려한 색감에 나에게는 부담스럽기도 하고, 100벌을 공짜로 줘도 입지 않을 디자인과 스타일의 제품들이 가득한.
면접을 무심결에 응해놓고도 면접 전날까지 고민했다.
합격해도 갈 수 없는 곳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퇴사율이 너무 높았다. 126%라니...
입사를 100명 이하면 퇴사하는 사람이 102명이라는 건데. 문제가 있어도 크게 있지 않겠는가.
예전 준비되지 않았던 때의 6번의 면접 거절이 마음에 걸려, 되던 안되던 면접에 응해보기로 했다.
간단히 결론만 말하면 아닌 건 아닌 거다.
면접 2시간 반의 쾌거. 2시간은 대표가 말했고, 15분은 내가 말했고 나머지 15분은 티키타카 정도가 아닐까.
잡플래닛에 '남자 대표가 말이 많아도 너무 많다'는 후기를 몇 개나 봤었는데...
사실은 사실이었다. 일방적인 그의 비전과 인맥, 열정을 어깨에 담이 올 만큼 듣고 난 후
점심 시간도 훌쩍 넘어 끝난 면접, 그의 마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는 것을'
그리고 또 나는 다음 주 면접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번에야말로 그래도 나와 결도 맞고, 제법 가치가 있는 제품들을 파는 곳이라 면접 제의가 오면 정말 열심히 준비해야지! 했던 곳이었건만..
면접 날을 결정하고, 그다음 날 오후.. 갑작스럽게 메일로 면접 시 필요한 자료가 있다며 당당하고 쾌활하게 과제를 신청하는... 기업이란!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 역시 경력자에 '과제'를 제출하게끔 하는 기업은 믿고 거르는 1순위다.
취업 컨설턴트분까지 말했었다. 경력직에게 과제를 내게끔 하는 곳은 '횡포'이자 '갑질'일 수 있다고.
포트폴리오까지 제출했는데, 무엇을 믿지 못해 과제를 내라고 하는 것일까.
면접을 보고 의심스럽다면, 뽑아놓고 수습 3개월이라는 시간동안 판가름을 내도 되는 상황에서.
실무에 투입되어 인적 자원과 여러 컨디션을 보고 짜도 모자를 2분기-3개월치의 운영계획안을 3일 만에(주말이 꼈고 연휴가 껴있는 슬픈 진실) 달라니.
아무것도 보장받은 것 없이, 아이디어 갈취이자 갑질로 보기에도 충분한 상황.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며 총 2일을 방황과 분노 속에서 보내다, 결국 하기로 맘먹었다.
갈취당할 때 당하더라도, 굳어있던 내 뇌를 돌리는 것 반 / 지금 현재 내가 포기한다면 너무 나약하고 초라해져서라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처음엔 막막하기만 했다. 아무 것도 없이 운영계획을 어떻게 짠담...
달콤한 바닐라 라테를 사들고 들어와, 이상하게 질질 눈물을 흘리며 펜을 들고 과제를 시작했다.
질질 눈물을 짜내며, 과거 내가 진행했었던 하지만 퇴사와 함께 기억에서 지웠던 또 다른 운영계획안도 머릿 속에서 질질 짜냈다.
그야말로 고군분투다.
1년 전의 나는 현재 내가 이런 모습으로 '입사 보장'도 없는 회사의 운영계획안을 짜고 있을지 예상할 수 있었던가.
살기 위해 퇴사하고, 또 다른 삶을 살기 위해 이직을 택하고 고군분투하는 2021년의 나는 2022년의 나에게 어떤 모습으로 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