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대기업 팔자는 무슨
무기력에 한참을 시달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시작되는 단전에서부터 뻗어오는 우울감과 초조함.
그리고 오늘은 어떤 일들로 하루를 보내야 할지, 그리고 나는 초겨울에 퇴사한 것 같은데 벌써들 SNS에서는
봄이 온다며... 나만 시간이 멈춘 듯. 시간이 흐름을 행복해하는 소식들로 가득해서랄까.
한동안 인스타그램은 잠깐의 눈팅으로만 즐기고, 나의 어떤 소식도 이야기도 전하지 않았다.
SNS는 자신이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운지 과대 포장하고 남들에게 보여주려는 허영이 담겨있다고 하더니,
정말인가 보다.
내 무기력함을 타인들의 행복 속에서 도드라지게 만들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러던 와중에 갑작스럽게 헤드헌터를 통해 서류 전형 합격 소식을 받았다.
무기력한 와중에 흘러가는 시간은 아깝고, 돈을 벌긴 해야 할 텐데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았고
움직이기 싫었기에 이력서만 줄곧 내고 있던 참이었다. 그동안 취소시킨 면접은 총 6건...(배가 불렀다)
특히 헤드헌터에게 이메일로 던지는 이력서는 잡코리아나 사람인의 지원보다 빠르고 안전했으니까,
그냥 시험 삼아 내본 터였다.
그런데 합격? 합격이라고?
그제야 내가 지원한 곳의 이름과 업무를 제대로 눈뜨고 바라보았다.
내가 아는 것 같지만, 또 아리송한 포괄적 업무들. 그리고 꽤나 이름 있는 회사명..
대기업이라고 할 만큼 높은 인지도는 무기력에 빙글빙글 돌던 나를 책상에 앉혔다.
이번만큼은 면접을 취소할 수가 없었다. 합격한 이상, 그들이 그래도 나를 보고자 한 이상 면접을 준비하고 면접을 간다면 창피하지 않을 만큼은 해야 한다는 내 자그마한 열정의 불씨가 피어올랐다.
면접날도 잡히지 않았는데 미리 자기소개부터 회사에 대한 사전 조사를 시작했다.
면접 관련 책도 사고, 그 회사 사장이 쓴 브랜딩 관련 책도 사들고 들어왔으며, 꼴도 보기 싫은 이커머스 관련 도서도 집어왔다.
갑작스레 주름 없던 뇌에 주름을 잡듯, 분주해진 나는 며칠은 마음을 잡지 못했다.
불안함과 동시에 스스로를 압박하던 회사 다닐 적의 습관이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면접을 취소할 수 없으니까.
생애 최초 화상면접을 준비하며 스터디룸 대여도 하고, 줌 카메라를 켜고 내 얼굴 상태를 점검하기도 하면서
도저히 들어오지 않는, 굳어버린 혀를 원망하며 동네 숲을 돌며 마음을 다잡으며 면접 D- Day를 준비했다.
1분 자기소개는 얼마나 외웠는지 지금도 시. 작! 하면 튀어나올 정도.
내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고, 생각보다 면접 분위기도 좋았고, 마지막엔 직무에 욕심이 나서 '그 직무는 제가 적격일 것 같은데 저만의 생각일까요~'라며 너스레까지 떨었건만.
생각보다 빨리 '불합격' 소식이 날아왔다.
그래도 긍정적인 소식을 기대했던 내게 조금은 가슴이 쿵.. 그리고 속이 시원한..
합격했으면 설 연휴엔 사전 과제로 골머리에 심층 면접 3시간은 어떻게 견뎠을까... 하는 다행스러움이
복합적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심층면접까지 다 보고 불합격했으면 더 속상했을 거야... 라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가족들에게 '떨어졌다'라고 알리고, 어제 미친 듯이 싸운 남자 친구에게도 소식을 알렸는데,
그 녀석이 '그럴 수도 있지. 거기서 떨어졌다고 다 그런 것도 아니니 기죽을 필요 없다'라고 말해주는 순간
살짝 눈물이 나왔다.
속상해...
그렇지만 이번 면접으로 얻은 건, 나의 무기력은 우울증에 파생된 것도 아닌, 그저 내가 집중하고 욕심낼 그 어떤 이슈가 없어서였다는 것.
바쁘게 움직이고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나에게 무기력은 올 수 없다는 것.
나의 무기력은 병원에 가서 의학의 도움을 받아야 극복할 수 있는 그런 무거운 형태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은 점.
그것만 해도 큰 전환점이 되어주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이다.
똑 떨어졌지만. 이제 알겠다.
다시 목표를 정하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자.
그리고 내가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지 준비하자.
그것이 지금 내가 현재를 현명하게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