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변해버린 나
꿈을 꿨다.
다시 그 지옥 같은 곳으로 출근하는 꿈. 꿈속에서 나는 업무에 파묻혀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악몽이었다.
새벽 7시.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걸까?
지옥 같은 곳으로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완벽한 주말이자 행복한 앞길만 펼쳐질 것 같았던 퇴사 전 상상 속의 주말과는 조금 다른 날이 시작되었다.
안도감보다 이상하게 무력감이 밀려오고,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었다. 배고픔도 없었다.
퇴사를 결심하기 1달 전부터 나는 식욕이란 중요한 욕구를 잃었고, 퇴사를 결심해서도 꺼져버린 식욕은 돌아올 줄을 몰랐다. 식욕이라는 표현보다는 스트레스로 인한 섭식장애가 생겼다고 하는 것이 좀 더 가까울 것이다.
아직 동도 트지 않았는데... 답답한 마음에 어젯밤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던 상담사 선생님에게 문자를 보냈다.
[ 선생님 한 가지만 묻고 싶어요. 저 절대 대표가 가스 라이팅 하려던 것처럼 약한 사람 아닌 거죠? 아직 꿈에서 회사 일에 고민하고 조급해하는 꿈을 꿔요..ㅎㅎ 조금 심란해서... 상담 끝났는데 이렇게 문자 보내서 죄송해요]
[내가 정말 약한 사람이었다면 대표가 계속 인연을 유지하고 싶어 했을까요? 그 회사에서 몇 년간 버텨왔던 것, 여러 가지 업무를 맡아서 해오셨던 일, 실제로 했던 일들이 반응이 좋았던 것.
다리가 다친 상황에서도 목발을 짚은 채 출근하셨던 것, 퇴사 며칠 전까지도 야근하면서 일하시고 촬영하시고..
정말 약한 사람이 할 수 있었던 것인지 한번 다시 생각해보세요 :)
회사의 문제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대표님은 퇴사의 이유를 '네가 약해서야'라는 식으로 찾을 수밖에 없었던 거고, 그건 대표님 개인의 문제겠죠. 그걸 받아들여서 내 것으로 가져오시지 마세요. ]
[ 하.. 감사해요... 꿈에서 아직 계속 고통을 받으니 또 다운되고 힘들어지려고 해서 도움이 필요했어요. 감사합니다.]
[원래 꿈은 현실보다 한 발짝 느리다고 해요. 아직 꿈은 내가 퇴사한 걸 정확히 인지하지 못해서일 거예요.
자연스럽게 빈도가 줄어들 테니 크게 의미 두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
아침 일찍 불안감에 상담 시간도 아닌데 문자를 보낸 나에게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
나는 약하지 않다.
어제 (퇴사 당일 저녁), 나에게 퇴사 용기를 심어주었던 선생님과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퇴사 심정, 현재 느끼는 나의 마음을 쏟아내며 선생님은 앞으로의 당장의 계획보다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시간을 가져보라는 몇 가지 조언과 충고를 해주었다.
그리고 전문가의 눈으로 바라본 회사 내 가스 라이팅으로 내가 많이 헤지고 바스러져 있음도 상기시켜주셨다.
일에 대한 타인의 책임감을 이용해, '모두 다 너를 위한 거다.', '네가 이번 기회로 성장할 수 있어'라는 식으로 스스로를 의심케 하고 자기 판단 능력을 흐려지게 하여 결국 자신의 의도대로 타인을 조종하는 회사 내 '가스 라이팅'.
나는 '가스 라이팅'이라는 단어를 사실상 이 상담을 통해 처음으로 접해본 것이었다.
비열하고 졸렬한 짓에 내가 말려들었구나 싶은 생각 반, 내가 아직 그렇게 순수(?)했나 싶은 마음 반.
내가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고,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부단히 내가 나 스스로를 괴롭혀왔구나 하는 것도 그날의 상담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었다.
퇴사에도 적응기간이 필요하니 걱정하지 말라는 선생님의 마지막 문자에 조금 안도하며,
두유 한 팩을 꺼내 마시면서도 뭔가 혼자 있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은 생각에 나는 그저 TV를 켜고 쉼 없이 무한 반복되는 드라마를 틀어놓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펜트하우스>... 요즘 난리라고 하던데, 실제로는 처음 본다...
(그 시기 나는 TV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박원순 시장의 잠적과 자살 소식도 나중에서야 알고, 눈을 껌벅껌벅했던 어이없는 기억...)
드라마 속에서 이유 없이 소리부터 지르는 빨간 입술의 김소연을 보며,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불안했다.
'소리를 왜 그렇게 질러대니... 그만 좀 질러...'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정신이 혼미하면서도 자극적인 스토리는 잠시나마 내 시선을 끌었으나, 얼마 못가 나는 채널을 돌렸다.
티브이 속 괴성과 신경질적인 목소리에도 힘들어하는 나라니... 어이가 없었다.
이제 앞으로의 나는 어떻게 될까.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장 취직이 되면 좋을 텐데.... 하지만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너무 많이 지쳐버렸다는 걸. 일을 하고 싶지만 자신이 없었다.
내가 잘하는 일도 잘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내가 모르는 일에는 더욱더 겁이 났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나는 모르는 일도 배워가면 할 수 있고, 닥치면 뭐든 해결할 수 있다는 소위 '자신만만'의 소유자였는데도 말이다. (이것도 가스 라이팅의 후유증이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뭐가 뭔지, 퇴사를 하고 나면 예전의 나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이상했다.
도저히 혼자 있어서는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계속되는 섭식장애에 자의로 굶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캐리어를 꺼냈다.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짐을 쌌다.
초겨울, 늦가을의 날씨.
멋 부리고 싶지도 않았고, 멋 부릴 옷도 그저 무겁게만 느껴져 가장 가벼운 퀼팅 점퍼를 꺼내 입었다.
어느새 자란 내 긴 머리도 질끈 묶었다.
'멋없어...'
멋과 스타일을 따지던 내가 그렇게 영혼 없이 옷을 입고 아무 신발이나 신고 떠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순간의 나를 벗어나고자 했던 의지이자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방을 한번 청소하고 밀린 설거지(설거지도 없었다. 계속 두유만 먹어댔으니)를 하고 미련 없이 집을 나섰다.
그리고 30일 동안,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