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리는 통계적인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명리의 과학적인 이치가 통계에 근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테면, 통계적으로 봤을 때, 특정 사주를 갖고 있는 사람의 길흉화복 빈천요수가 어느정도 패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A 라는 사람의 사주에 인신사해가 있어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운명을 가졌다고 하자. 그런데 또 다른 어떤 누군가의 사주에 똑같이 인신사해가 있다면 A처럼 비슷하게 떠돌아다니는 운명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유사한 사례들이 통계적으로 누적된다면 이후에 비슷한 사주를 갖고 있는 사람의 운명을 추론하는 것은 일종의 통계에 근거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사주가 통계에 대한 빅데이터를 갖게 된다면 그것은 명리추명에 아주 효과적인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이 운명을 추론해서 축적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은 실질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에 추명가는 경험적으로 많은 양의 데이터를 축적할 수 없다.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사주의 조합은 약 51만개에 해당된다고 한다. 남녀가 다르니까, 두 배가 될 것이다. 더구나 일반적인 사주에서 시간은 보통 2시간 단위로 12개로 나누지만 보다 엄밀한 정단을 위해서는 120분의 시진을 다시 셋으로 쪼개는 시각을 적용하면 그 조합수는 더 많아진다. 수 백 만가지에 이르게 되는 사주의 조합에 비해, 개인이 추명할 수 있는 사주의 수는 아주 제한적이다. 하루에 10명씩 1년에 3000명 정도 될 것이고 10년 보면 3만명 30년 꼬박 추명한다면 9만명 정도에 불과하다. 이런식의 계산은 사실, 연봉 5000만원을 받는 회사원이 그 돈을 모조리 저축해서 10년이 지나면 5억을 만들 수 있다는 식의 계산과 다르지 않다. 수치로는 가능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엄밀히 말해서 명리는 통계가 아니다. 그보다 명리는 계절의 순환과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올해 12월은 겨울이고 춥다. 작년에도 그랬고, 내년에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실이 통계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년 12월에 겨울이 되고 추워지게 되는 것은 통계에 의해서 유추하는 것이 아니라, 계절의 순환이라는 훨씬 더 보편적인 원칙을 근거로 이루어진다. 명리는 바로 이런 계절의 순환을 훨씬 더 정교하게 이론으로 확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지구의 기후역사에 대한 통계적인 데이터를 갖고 있다면 향후 수 천 년 혹은 수 만년 이후의 12월을 예측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과학은 그런 거시적인 예측을 제시해 주고 있다. 지구는 수 만년의 주기로 빙하기와 간빙기를 교차로 겪어왔다.
하지만 그처럼 거시적인 기후는 인간의 경험적인 범위를 넘어서는 부분들이다. 수 천 년간 지속되어온 명리학의 체계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기후의 변화는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고정적으로 변화해왔다. 그리고 그 기후의 변화와 특징이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잠시 생각해 보자. 기후가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준다고? 당연하다. 봄날의 날씨, 여름날의 날씨, 가을과 겨울의 날씨가 어떻게 사람들의 기분에 영향을 주는지 생각해보면 당연하게 보인다. 화창한 날과,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폭풍우가 치는 날과 폭설이 쏟아지는 날은 분명 그 날씨의 영향권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감정과 영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한 산모가 있었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산모가 경험하는 모든 정신적 물질적인 경험들이 아이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음식을 먹거나 영화를 보거나, 운동을 하거나 누구를 만나거나 하는 거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태아에게 영향을 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 영향이 아이가 태어날 때의 생물학적인 상태만을 한정적으로 의미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태어날 아이의 기본적인 성정과, 정서, 성격 그리고 지능과 같은 정신적인 면에서 장기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믿는다. 태교이론은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대단히 광범위하게 널리 퍼져 있으며, 이미 많은 산모들은 아이의 지능을 위해서 미적분을 풀거나 예술적 재능을 부여하기 위해 모차르트를 듣고 있을 것이다. 비록 모차르트 효과라는 것이 EMI의 마케팅 전략에 불과한 것이라 하더라도 산모와 태아 사이의 영향관계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은 매우 본질적이고 부정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사실들이 보편적으로 널리 인정되고 있는 현상이라고 인정 한다면, 산모를 통해 태아에게 전해지는 물리적, 정신적, 문화적, 그리고 기후적인 경험이 태아의 운명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는 공공의 믿음이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산모가 의지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경험이 있고, 의지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경험이 있다. 음식이나, 음악, 그림, 스포츠 활동, 문화생활, 여가와 같은 개인적인 선택이 반영되는 경험들은 충분히 개인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날씨와 같은 것은 그럴 수 없다. 태아에게 전해지는 산모의 경험 중 유독 날씨, 즉 기후와 관련된 부분은 개인의 의지적인 선택범위 바깥에 있는 것이다. 만약 아이에게 전달되는 운명론적인 영향이 산모로부터 오는 것인데, 그것이 인간의 인위적인 영향과 자연적인 영향에서 오는 것이라고 본다면, 과연 어느 쪽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까. 인간의 선택이 개입된 영향이 운명을 결정한다고 믿는 것과, 인간의 선택이 개입될 수 없는 자연적인 힘이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준다고 믿는 것. 인간의 의지에 의한 선택은 무수히 많은 차별과 계급과 갈등의 씨앗을 품고 있다. 그러한 인위적인 선택으로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믿는 것은 마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알파와 베타 그룹이 갈라지는 비인간적인 상황을 받아들이겠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태어날 때부터 건강한 몸과 뛰어난 지능, 수려한 외모를 보장받는 알파그룹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채 신체적, 정신적 열성을 갖고 태어나 죽을 때까지 알파계급에 봉사해야 하는 베타그룹의 아이들이 인간의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선택에 의해서 결정되는 사회, 혹은 그런 믿음이 매력적으로 보이는가?
사실여부를 떠나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다소 순진한 발상을 최대한 받아들여보자. 최소한 모든 인간의 운명이 그가 태어날 때 기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해보자. 의지적으로 태어나는 시간과 날을 바꾸려하는 시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태어나는 달을 임의적으로 바꾸는 시도는 불가능하다. 연도를 선택하는 시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궁극적으로 말해서 인간이 태어날 때 받는 기후의 영향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의지적인 선택 바깥에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만큼 명리학에서 보는 인간의 운명은 하늘의 기운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당장 오늘 당신의 기분이 오늘 날씨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는 것만큼이나 명백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