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인쇄술이 남긴 영어의 흔적

by 현현

1440년, 독일 마인츠.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차갑고 어두운 작업실이 낮은 웅성거림으로 활기를 띄고 있다. 작업실의 공기는 잉크와 녹은 납, 나무 부스러기 냄새가 뒤섞인 진한 냄새로 가득하다. 그것은 땀의 냄새, 노동의 냄새, 발명의 냄새, 그리고 야망의 냄새이기도 했다. 구텐베르크의 작업실에는 길고 거칠게 다듬어진 나무 테이블이 있었다. 그 위로, 금속 활자 블록, 아주 단순한 도구들, 잉크로 범벅이 된 헝겊같은 것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낮게 드리워진 대들보에 매달린 등불 하나가 좌우로 흔들리면서 생긴 그림자는 벽에 드리워져 춤을 추는 듯 했다. 그리고, 그 작업실에 압도적으로 위풍당당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기계한대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견고한 참나무로 만든 이 기계는 와인을 짜는 프레스를 닮았지만 훨씬 더 혁명적인 기계였다.


그것은 바로 구텐베르크가 만든 인쇄기였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수년간의 불안한 노력과 잠 못 이루는 밤, 세상을 바꾸겠다는 치열한 결심의 결정체였다. 꼼꼼하게 놓여진 금속활자들이 희미한 조명 아래에서 마치 희망처럼 반짝였다. 그것은 변화의 항구를 비추는 등대처럼, 사막의 밤을 인도하는 북극성의 반짝임 같았다.


구텐베르크는 인쇄기 위에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나무 쟁반 위에 놓인 금속 활자의 정렬을 조정하고 있다. 그림자에 반쯤 가려진 그의 얼굴은 지친 기색과 결연한 의지가 또렷하다. 작업장의 냉기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잉크가 묻은 앞치마에 손을 닦는다. 눈동자가 살짝 반짝이는 것 같기도 했다. 희끗한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흐트러지며 떨어졌다. 긴박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것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다. 이것은 말의 힘, 말을 번식시키고, 의미를 증식시키고, 언어를 순간에서 영원으로 해방시켜주는 능력의 상징이었다. 역사는 이 순간 이전의 언어와 이 순간 이후의 언어로 영원히 구분될 것이다.


구텐베르크는 빈 양피지 한 장을 인쇄기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하얗게 펼쳐진 양피지 위로 이제 세계 문화사의 가장 격동적인 혁명이 새겨질 참이었다. 인쇄기에 달린 나무 레버에 손을 뻗어 꽉 움켜쥐었다. 천천히 신중하게 레버를 당긴다. 인쇄기가 삐걱거리며 신음 소리를 내며 내려오면서 잉크가 묻은 활자를 양피지에 단단히 눌렀다. 어떤 극적인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양피지 한 장이 잉크가 묻은 금속활자위에 눌린 것 뿐이었다. 잠시후 구텐베르크는 레버에서 손을 떼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구텐베르크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손을 떨면서 양피지를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그는 양피지를 등불에 비추며 한 줄 한 줄, 글자 하나하나를 살핀다. 거기에는 최초로 인쇄된 페이지가 있었다. 얼마나 아름다웠을 것인가. 그 최초의 인쇄된 글자는. 그것은 같은 크기로 질서정연하게 찍혀있었으며, 선명했고 읽기 쉬웠다. 하얀 양피지와 대비되어 까맣게 돋보이는 글자들은 하나하나 완벽하게 정렬되어 묘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Gutenberg_Bible,_Lenox_Copy,_New_York_Public_Library,_2009._Pic_01.jpg

그가 처음 찍은 것은 성경의 한 페이지 였다. 인쇄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난 것이다. 그가 만든 것은 단지 잉크와 양피지 이상의 것이었다. 이후로, 혁명이 일어나고, 지식이 들불처럼 번지고, 더 이상 억제할 수 없는 수많은 생각들로 세상은 가득차게 될 것이었다. 이제 지식은 소수의 특권층의 손아귀를 벗어나 마치 아침에 태양의 빛이 세계로 퍼져나가듯, 퍼져나갈 것이었다.


구텐베르크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오늘은 한 페이지. 내일은 수천 장. 그리고 언젠가는 수백만 장이 될 것입니다. 어떤 왕도, 어떤 성직자도, 어떤 문지기라도 이 활자를 침묵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세상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수작업으로 수개월이 걸리던 글은 이제 몇 시간 만에 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인쇄기는 대중 커뮤니케이션을 탄생시켜 르네상스, 종교개혁, 과학 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인쇄술은 지식을 민주화하고 언어를 표준화했으며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1450년에 구텐베르크는 상업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인쇄기를 개발했고, 1455년에 구텐베르크 성경의 완역본을 인쇄했다. 이 성경은 유럽에서 활자를 사용하여 인쇄된 최초의 완전한 책으로 간주되고 있다. .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정보 전달 방식뿐만 아니라 영어 단어의 철자, 표준화, 차용 방식에 획기적인 혁명을 일으켰다. 인쇄술의 출현은 언어적, 문화적, 기술적으로 중요한 변화와 맞물려 영어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인쇄술 발명 이전, 영어 철자는 비교적 유동적이고 일관성이 없었다. 단어는 소리나는 대로 적었고, 하나의 텍스트 내에서도 다른 철자법으로 나타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인쇄술이 등장하면서 이런 현상은 줄어들게 된다.


‘정신’ 또는 ‘영혼’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고스트ghost는 고대 영어 가스트gast에서 유래했다. 중세 영어에서는 종종 gost 또는 gast로 철자가 표기되었다. 하지만 15세기 후반 윌리엄 캑스턴William Caxton이 영국에 인쇄기를 도입하면서 기술뿐만 아니라 수출국의 숙련된 노동자들도 함께 데려오게 된다. 그러다가 영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칵스턴의 플랑드르 조판사 중 한 명은 네덜란드 철자 게스트의 영향을 받아 gost에 불필요한 'h'를 단어에 삽입하게 된 것이다. 네덜란드어는 게르만어 어근인 가이스트geist와 어원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h'가 포함되었고, 식자공은 영어 단어가 이 어원의 스펠링을 무의식중에 반영했을 것이다. 그래서, 고스트gost는 고스트ghost가 되었고, 그 후로 이 단어의 무음 'h'가 포함된 것이다. 인쇄술 이전에는 지역 방언이 번성했고 표준화된 영어 철자가 없었다. 하지만, 책이 인쇄되기 시작하면서, 특히 성경과 같은 종교 서적의 보급으로 철자와 어휘에 어느 정도 통일성이 생나기 시작했다.


“부채debt"라는 단어는 원래 중세 영어에서는 당시의 발음을 반영하여 데테(dette)로 표기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 학자들이 영어 철자를 라틴어 어근과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면서 라틴어 데비툼debitum과의 어원적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무성음 “b”가 다시 추가되었다. 인쇄된 책을 통해, 이 '수정된' 철자는 널리 퍼지게 되었고, 그 결과 발음에서 사라진 지 오래되었음에도 부채라는 단어에는 묵음 'b'가 포함되게 된다. 사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직불카드는 영어로 debit카드라고 부르는데, 이것 역시도 어원상 관계가 있는 단어라고 할 수 있겠다.


인쇄기는 특히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어에서 외국어를 차용하는 데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인쇄된 텍스트를 통해 고전 작품을 더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작가들은 영어를 더욱 풍부하게 하기 위해 이국의 어휘를 부지런히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유입으로 인해 많은 새로운 단어들이 생겨났다.


“발코니balcony”라는 단어는 이탈리아어 발코니에서 유래했다. 16세기에 인쇄된 텍스트를 통해 이 단어가 영어에 들어왔을 때 인쇄업자들은 처음에는 이탈리아식 철자를 사용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철자는 영어 발음 규범을 반영하기 위해 약간 바뀌었다. 하지만 여전히 외국어 같은 느낌은 남아 있었다. 인쇄술은 이런식으로 차용된 언어가 사회적으로 평범하게 사용될 수 있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고, 이를 통해 영어는 풍부한 언어의 태피스트리를 만들어 낸다. 결과적으로 르네상스 인쇄술은 라틴어, 프랑스어, 그리스어 단어의 홍수를 영어로 가져왔으며, 철자는 종종 그 기원이나 명성을 반영하기 위해 조정되었다.


흔히 볼 수 있는 단어의 예를 들어서 살펴보자.


Island: 이 단어는 고대 영어 어근인 아이글란드īegland.에 더 가까운 iland 또는 yland로 표기했다. 그러다가, 라틴어 인슐라insula에 대한 잘못된 연결을 반영하기 위해 무성 “s”가 추가되었다. 그 결과 라틴어 단어와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철자가 수정되었습니다.


Doubt : 이 단어는 고대 프랑스어와 마찬가지로 중세 영어의 스펠링 doute로 표기했다. 하지만, 학자들이 라틴어 어근 두비툼dubitum과 일치하도록 “b”를 추가했다. 그 결과, 묵음 “b”는 르네상스 시대의 라틴어에 대한 매력을 상기시켜 주는 흔적으로 남았다.


Receipt : 이 단어는 원래 고대 프랑스어를 반영하여 receyt 또는 resceyt로 철자를 썼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p”가 추가되어 라틴어 recepta와 연결되게 된다. 그 결과, “p"는 발음되지 않지만 라틴어 기원을 나타내는 어원적 표시로 남아 있게 되었다.


February: 은근히 발음하기 어려운 단어였는데, 이유가 있었다. 이 단어는 원래 Februarie 또는 Feverell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학자들이 2월의 라틴어 철자를 표준화 한다. 이 단어는 발음에서 “r”이 생략되는 경우가 많아 철자와 발음이 일치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Salmon: 아마도 한두번쯤 고민했을 것이다. 저 세 번째 L을 발음할것인지 말 것인지. 하지만, 어느것도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이 단어는 원래 새문samoun 이었다. 이 단어는 라틴어 salmo에서 기원하는데, 뛰다, 뛰어 오르다leap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라틴어 어원의 L이 나중에 다시 추가된 것이다. 물길을 거슬러 뛰어 올라가는 연어를 생각하면 어원히 확 이해될 것이다.

그래서, 두드러지는, 눈에 띈다는 의미의 salient도 역시 같은 어원으로 관계가 있는 단어다. 그렇다면, 흔히 살모넬라균이라고 할때의 그 살모넬라Salmonella도 관계가 있을까? 재미있게 관계가 있다. 살모넬라가 연어salmon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고, 바로 이 균을 발견한 학자의 이름이 다니엘 E. 새먼Daniel E. Salmon이었던 것이다. 이후, 현대의 박테리아 학자 조셉 리그니에르Joseph Lignières가 균의 이름을 처음 분류했던 사람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인쇄술의 발전으로 인해, 더 이상 발음과 일치하지 않는 오래된 철자가 영구적으로 고착화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Knight는 원래 모든 자음이 명료하게 발음되는, 음성학적으로 kniht에 가까운 말이었다. 하지만, 인쇄술은 구어체 영어에서 사라진 'k'와 'gh'를 영원히 각인시켰다. Knife도 원래의 소리는 크니페와 비슷하다. 처음 영어를 배울 때, 다들 그렇게 읽지 않는가?


Autumn에 왜 마지막 n이 있는지 늘 궁금했었다. 원래 이 단어는 프랑스어 automne에 기초하여 중세 영어로 autumpne 또는 autumn으로 철자를 썼다. 그러다가 라틴어 어근인 autumnus를 반영하기 위해 무성음 'n'이 복원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지막 “n"은 발음되지 않지만 여전히 현대 철자에도 남아있다.


hour은 시간을 의미한다. 중세 영어에는 h가 없는 oure로 썼다. 라틴어로 시간은 hora라고 하는데, 이 어원의 스펠링을 반영하기 위해 'h'가 다시 사용되었다. 이것은 현재 horoscope라는 단어에도 남아있다. 호로스코프는 말 그대로 시간을 본다는 뜻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간의 가장 근원은 밤하늘의 별들이다. 그 별들은 곧 시간이기도 하다. 참으로 심오하지 않은가.


밤하늘의 별들이 시간을 가르쳐 주듯, 하나하나의 단어들은 곧 언어의 역사를 보여주는 창이기도 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한국에서 세사미 스트리트 보는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