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와 사주명리학-리어왕

by 사주영웅

셰익스피어의 비극들 중에서도 『리어왕(King Lear)』은 독보적인 위치를 점한다. 『햄릿』이 사유의 비극이고, 『맥베스』가 야망의 비극이라면, 『리어왕』은 인식의 비극이다.


모든 것을 잃고 난 뒤에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


플롯은 단순하다.

브리튼의 노왕(老王) 리어는 세 딸에게 왕국을 나누어 주려 한다. 그는 딸들에게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느냐를 묻고, 거너릴과 리건은 화려한 언어로 아버지를 치켜세우며 영토를 받는다. 그러나 막내딸 코딜리아는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사랑밖에 없습니다"라는 말 외에 아무것도 더하지 않는다. 리어는 격노하고, 코딜리아를 내쫓는다. 그 뒤에 펼쳐지는 것은 한 인간이 가진 모든 것 — 권력, 존엄, 자식, 이성 — 을 잃어가는 과정이다.

비평의 역사에서 이 작품은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왔다. 18세기 네이엄 테이트(Nahum Tate)는 이 결말이 너무 가혹하다며 코딜리아를 살려두는 개작본을 150년 가까이 무대에 올렸다. 그만큼 이 작품의 결말 — 코딜리아의 죽음과 리어의 죽음 — 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충격으로 다가왔다. 셰익스피어 비평으로 유명한 A. C. 브래들리는 이 비극을 셰익스피어 최고의 성취로 꼽으면서도, "무대에서 완전히 실현될 수 없는 비극"이라고 평했다. 규모가 너무 방대하고 고통이 너무 절대적이어서, 무대라는 물리적 공간이 담아낼 수 없다는 뜻이었다.


20세기에 들어 얀 코트(Jan Kott)는 리어를 부조리극의 원형으로 읽었다. 그는 이 작품에서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같은 의미의 공허를 발견했다 — 글로스터가 눈을 뽑힌 채 절벽 끝에서 뛰어내리는 장면, 그러나 절벽은 없고 그는 그냥 넘어진다. 이것은 우주적 잔인함인가, 아니면 우주적 무관심인가. 코트의 리어는 신도 섭리도 없는 세계에서 홀로 폭풍을 맞는 인간이다.


페미니즘 비평은 거너릴과 리건에 주목해왔다. 이들은 오랫동안 단순한 악녀로 읽혔지만, 캐럴 토마스 나이리(Carol Thomas Neely) 등은 이들이 가부장제적 교환의 산물임을 논했다 — 아버지의 사랑을 언어로 증명해야 영토를 받는 구조 자체가, 딸들을 경쟁적 수행자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반면 코딜리아의 침묵은 그 구조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해석의 중심에는 하나의 질문이 있다. 그것은 동양에서도 오랫동안 성찰해왔던 복덕불일치의 문제와 같다.


왜 착한 사람이 죽는가.


코딜리아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리어는 어리석었지만 그 어리석음이 이토록 극단적인 형벌을 받아야 했는가. 케네스 뮤어(Kenneth Muir)는 이 물음 앞에서 셰익스피어가 의도적으로 독자를 불편한 자리에 세워놓는다고 말했다. 위로 없는 비극, 해석 불가능한 고통 — 그것은 『리어왕』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세계관은 단일하지 않다. 그의 작품들은 운명에 대한 다양한, 때로는 모순된 입장을 동시에 품고 있다.


한편에는 결정론적 운명관이 있다. 『맥베스』에서 마녀들은 예언하고, 그 예언은 결국 실현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두 연인은 스스로를 "별이 불길한"(star-cross'd) 존재라고 부른다. 르네상스 시대의 영국은 점성술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인간의 운명이 출생 시의 천체 배치에 의해 어느 정도 결정된다는 관념이 교육받은 계층에게도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반대편에는 의지의 자유를 옹호하는 목소리도 있다. 『리어왕』에서 가장 선명하게 이 대립이 드러나는 것은 에드먼드(Edmund)의 독백이다. 서자(庶子)인 에드먼드는 자신의 불운을 별의 탓으로 돌리는 당대의 관행을 조롱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재앙에 있어서 태양, 달, 별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 마치 우리가 어리석음에 있어 필연에 의해, 방탕에 있어 별들의 강제에 의해 악당이 되는 것처럼 — 이것은 훌륭한 우리 자신의 본성에 대한 대단한 탈선이다."


에드먼드의 이 말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자유의지론적 흐름을 대변한다 — 인간은 별의 노예가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으로 자신을 만든다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을 하는 에드먼드 자신은 그 이후 자신의 "선택"들에 의해 철저히 파멸한다.


글로스터는 에드먼드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이 일식과 저 일식은 좋은 예언을 드리지 않는다. 자연은 이런 징조들로 인해 사랑은 냉각되고, 우정은 끊기고, 형제들은 갈리게 된다." 글로스터는 별자리가 불길하기 때문에 세계가 무너진다고 믿는다.


『리어왕』의 셰익스피어는 이 두 입장 중 어느 하나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는 두 관점을 충돌시켜 독자가 그 긴장 속에서 스스로 답을 찾게 만든다. 다만 극 전체의 구조를 보면, 셰익스피어는 "성격이 곧 운명"이라는 헤라클레이토스적 명제에 가장 가까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리어의 오만과 성급함, 코딜리아의 타협 불능한 정직함, 거너릴과 리건의 탐욕 — 이것들은 별이 새겨준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들 자신이 선택해온 것이기도 하다.


사주명리학은 인간의 삶을 宇宙 에너지의 흐름 속에 놓인 하나의 패턴으로 읽는다. 출생 시점의 천간지지(天干地支) 조합이 그 사람의 본질적 기질과 삶의 역동을 암호화한다는 관점이다. 물론 『리어왕』의 등장인물들에게는 실제 사주가 없다. 그러나 명리학적 사유의 틀은 이 인물들의 성격과 관계, 그리고 운명적 흐름을 놀라울 만큼 정밀하게 포착하는 언어를 제공한다.


리어를 명리학적 언어로 표현한다면, 양화(丙火) 일간 의 인물에 가장 가깝다. 병화는 태양의 불이다. 온 세상을 비추고 싶어 하고, 자신이 중심이어야 하며, 그 빛이 인정받지 못할 때 분노가 폭발처럼 터진다. 리어가 코딜리아의 소박한 대답 하나에 왕국 분배 계획 전체를 뒤집고 저주를 퍼붓는 첫 장면은 전형적인 丙火의 감정적 과잉이다. 태양은 자신의 빛이 외면당하는 상황을 용납하지 못한다.


십성(十星) 구조로 보면 리어는 편관(偏官) 과다 의 인물이다. 편관은 칠살(七殺)이라고도 불리며, 통제받지 않을 때 강한 지배욕, 충동적 결단, 그리고 외부 압박에 대한 극단적 반응으로 나타난다. 리어의 왕국 분배 행위 자체가 편관적 발상이다 — 미리 모든 것을 통제하고 정리하여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노년을 보내겠다는 것. 그러나 편관 과다는 反동을 불러온다. 통제하려 할수록 상황은 통제를 벗어난다.


더 핵심적인 것은 戊土(무토)의 붕괴 이다. 사주명리학에서 土는 중심성, 포용력, 현실 판단력을 상징한다. 리어에게는 이 土의 기운이 처음부터 약하거나, 노년에 접어들면서 급격히 쇠잔해진다. 土가 약한 丙火 일간은 자신이 만들어낸 열기를 흡수하고 조율하는 能力을 잃는다. 왕국 분할 이후 리어는 점점 더 극단적이 되고, 거너릴·리건의 도발에 이성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며, 폭풍 속에서 실제로 정신이 무너진다.


리어의 폭풍 장면을 명리학적으로 읽으면 처절하게 아름답다. 그는 폭풍을 향해 소리친다 — "불어라, 바람아! 볼이 터지도록!" 이것은 더 이상 자신을 지켜줄 어떤 기운도 없는 상태, 완전한 기운의 소진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소진의 과정에서 리어는 비로소 정관(正官) 적 지혜에 눈뜨기 시작한다. 그는 노숙자들을 발견하고 "나는 지금껏 이들에 대해 너무 적게 생각했다"고 말한다. 과다한 편관이 소진된 자리에서, 올바른 도리(正官)가 싹튼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코딜리아는 임수(壬水) 일간 의 기질을 지닌다. 壬水는 大海(대해)의 물이다. 깊고 고요하며, 표면이 잠잠해도 바닥에는 방대한 것이 잠들어 있다. 코딜리아의 침묵은 이 壬水의 특성이다 —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본질적으로 거부하며, 언어보다 존재 자체로 말하는 사람.


십성으로 코딜리아는 정인(正印) 이 강하게 발현된다. 정인은 원칙, 진정성, 도덕적 순수함을 상징하는 星이다. 코딜리아가 아버지에게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제 의무만큼"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말재주 부족이 아니다. 정인의 기질은 과장하거나 포장하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 진실만을 말하겠다는 정인의 고집이 그녀에게 재앙을 불러왔다.


그러나 코딜리아의 비극적 원형은 원진살(怨嗔煞) 의 관점에서도 읽힌다. 원진살은 서로 가장 진실한 관계에서 오히려 가장 큰 오해와 상처가 발생하는 에너지 구조다. 리어와 코딜리아는 실제로 가장 깊이 사랑하는 부녀이지만, 그 사랑이 표현되는 방식에서 철저히 엇갈린다. 丙火 일간 리어는 자신의 빛이 반사되는 것(뜨거운 언어적 사랑)을 원하지만, 壬水 일간 코딜리아는 오히려 그 열기를 냉각시키고 가라앉히는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火와 水의 충(沖) — 이것이 이 부녀 관계의 명리학적 핵심이다.


코딜리아의 운명에서 더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녀가 관성(官星) 을 용신(用神)으로 하는 구조라는 점이다. 그녀에게 프랑스 왕과의 결혼은 표면적 성취처럼 보이지만, 그 결혼 자체가 그녀를 리어로부터 멀리 보내는 원인이 된다. 용신이 작동하는 방향이 비극의 방향과 겹쳐지는 아이러니다. 壬水가 가장 맑고 순수할 때, 세상은 그 맑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적대한다. 이것이 정인형 인간의 비극이다.


거너릴과 리건은 개별 인물이기도 하지만, 명리학적으로는 하나의 기운 축이 두 얼굴로 나타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두 자매는 모두 金(金) 의 기운이 강하게 지배하는 인물들이다. 金은 결단력, 날카로움, 그리고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집착의 에너지다.


거너릴은 경금(庚金) 일간 의 기질에 가깝다. 庚金은 원석(原石), 斧(도끼)의 금속이다. 직접적이고 공격적이며,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주저 없이 자른다. 십성으로는 식신(食神) 이 발달해 있다 — 식신은 자신의 욕망을 정교하게 포장하고 실현하는 능력이다. 거너릴이 아버지 리어를 해치기 위해 구사하는 방식은 직접적인 폭력이 아니라, 매우 계산적이고 논리적인 박탈이다. 기사의 수를 줄이고, 대우를 낮추고, 모욕을 점진적으로 누적시키는 것. 이것이 식신이 비겁(比劫)의 지지를 받을 때 나타나는 냉혹한 실행력이다.


리건은 신금(辛金) 일간 에 가깝다. 신금辛金은 宝玉(보옥), 칼날의 금속이다. 경금庚金보다 섬세하고 예리하지만, 그만큼 더 잔인해질 수 있다. 리건의 잔인함은 거너릴보다 더 날것에 가깝다 — 글로스터의 눈을 뽑는 장면에서 리건은 직접 행동하고 명령한다. 신금의 냉정함이 아무런 완충재 없이 드러난 것이다. 십성으로 상관(傷官) 이 과다하다. 상관은 기존 권위와 질서를 뒤흔드는 에너지인데, 리건은 아버지를 포함한 모든 기존 질서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이 상관의 에너지를 가감 없이 사용한다.


두 자매 관계에서 핵심적인 명리학적 구조는 자형(自刑) 과 형(刑) 이다. 庚金과 辛金, 즉 동일 오행 내의 음양이 경쟁할 때 발생하는 형살形殺 — 이것이 두 자매 관계의 본질이다. 처음에 두 사람은 공동의 목표(아버지로부터의 권력 쟁취)를 위해 완벽하게 협력한다. 그러나 그들의 기운 자체가 공존을 허용하지 않는다. 金은 金을 극할 수 없지만, 금끼리의 지나친 과다는 오히려 서로를 갉아먹는다. 에드먼드라는 남성(관성)을 두고 벌이는 경쟁이 그 자형의 뇌관을 건드린다. 거너릴은 리건을 독살하고 자신도 죽는다 — 같은 기운이 서로에게 칼을 겨눈 자형(自刑)의 극단적 발현이다.


사주명리학에서 형충파해합(刑沖破害合) 은 지지(地支)들 사이의 에너지 반응 구조다. 이 개념으로 『리어왕』의 관계 역학을 읽으면, 이 비극이 단순한 가족 갈등이나 도덕적 타락의 이야기를 넘어, 기운의 충돌과 균형 파괴의 이야기임이 드러난다.


리어와 코딜리아의 관계는 자오충(子午沖) 의 구조에 해당한다. 자(子)는 수(水), 오(午)는 화(火)의 정기(正氣)가 집약된 지지다. 子와 午는 서로 정반대 방향에 있으며, 충(沖)할 때 에너지가 극적으로 폭발한다. 이 충은 파괴적이지만 동시에 서로에 대한 강한 인력을 내포한다. 리어와 코딜리아는 가장 사랑하는 동시에 가장 충돌한다. 충의 에너지는 서로를 밀쳐내는 동시에 끊임없이 끌어당긴다 — 그래서 추방당한 코딜리아는 돌아오고, 리어는 그 딸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거너릴과 리건의 자형(自刑)은 다른 차원의 비극이다. 자형은 같은 오행의 과도한 축적이 스스로를 해치는 구조다. 두 자매가 처음에 완벽히 협력할 수 있었던 것은 같은 금(金)의 기운이 공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金이 너무 과다해지면 더 이상 정련되지 않고 서로 충돌하며 부서진다. 에드먼드를 향한 경쟁이 그 임계점을 넘게 했고, 그 결과 거너릴은 리건을 독살하고 자신도 자살한다 — 金이 金을 베는 자형(自刑)의 완성이다.

리어와 두 딸들의 관계는 명리학의 재성(財星) 파괴 구조이기도 하다. 丙火 일간에게 金은 재성이다. 재성은 물질적 풍요이자 다루고 통제해야 할 대상이다. 리어는 왕국(재성)을 딸들에게 넘기는 순간, 자신의 재성을 스스로 포기했다. 명리학에서 재성을 겁재(劫財)에게 빼앗기는 구조는 재물과 지위를 잃고 의탁처가 없어지는 패턴으로 읽힌다. 거너릴과 리건은 말 그대로 아버지의 재성(왕국)을 탈취한 겁재의 화신이다.


사주명리학에서 정인(正印) 은 가장 순수하고 보호적인 기운이다. 그것은 학문, 원칙, 어머니의 사랑과 같은 무조건적 헌신을 상징한다. 그런데 이 정인의 기운은 세속의 권력 구조에서 매우 취약하다. 정인이 강한 사람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책략에 서툴고, 타협과 위장에 본능적으로 저항한다. 코딜리아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코딜리아의 죽음이 극의 청중을 400년 동안 충격에 빠뜨려온 이유는, 그것이 도덕적으로 납득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악인들은 죽었지만 선인도 죽었다. 이것을 사주명리학의 언어로 옮기면 이렇게 된다 — 정인은 용신(用神)이더라도, 대운(大運)의 흐름이 기신(忌神)의 방향일 때 보호받지 못한다. 코딜리아의 기운 자체는 순수하고 올바르다. 그러나 그녀가 돌아온 시점은 이미 모든 관계의 형충파해가 극에 달한 시점이었다. 그 기운의 폭풍 속에서, 정인의 순수함은 오히려 어떤 방어막도 없이 노출된다.


셰익스피어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주지 않는다. 켄트는 코딜리아의 죽음을 목격하고 침묵한다. 에드거는 말하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리어는 딸을 안은 채 죽는다. 그것이 전부다. 해석도, 위로도, 교훈도 없다.

사주명리학도 동일한 곳에서 멈춘다. 명리학은 운명을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설명이 고통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정인이 먼저 소멸하는 세계 — 그것은 기운의 논리가 도덕의 논리보다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도덕의 논리가 기운의 논리 안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리어왕』의 마지막 장면에서 에드거가 말한다.


"우리는 이 슬픈 시대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우리가 느끼는 것을 말해야지,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면 안 된다."


이것은 사주명리학이 가르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대운의 흐름, 오행의 충돌, 십성의 충격 — 이 모든 것은 "지금 실제로 일어나는 기운"을 읽는 것이지, "일어나야 마땅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수백 년 동안 리어의 폭풍 속에서 자신을 보았다. 왕국을 분할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잘못된 언어로 잘못된 질문을 던져본 적 있을 것이다. 코딜리아처럼, 진실을 말했다가 더 큰 고통을 받아본 적이 있다. 거너릴처럼, 갖고 싶은 것을 갖기 위해 선을 너무 멀리 너머버린 적이 있을 것이다.


동서(東西)를 막론하고, 오래된 지혜들은 같은 것을 이야기해왔다. 기운의 과잉은 반드시 충(沖)을 부른다는 것. 사랑도 권력도 정직함도, 그것이 균형을 잃을 때 그것이 바로 비극이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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