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를 이해하면 영문법이 쉬워진다: I’ve got company. I’
명사를 중심으로 보면 한국어와 영어의 가장 큰 차이는 개체에 대한 중요성이다. 한국어는 개체보다 전체를 중시하고, 영어는 전체보다 개체를 중시한다. 홍 길동이라고 하고, Tom Cruise 라고 하는 명명법은 한국어와 영어에서 개인과 집단이 가지는 중요성을 직접적으로 말해준다. 주소의 체계도 비슷하다. 해외 직구를 한두번쯤 해봤다면 영어로 주소를 쓰는 방식은 정확하게 한국어와 반대의 순서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한국어는 가장 큰 도시에서부터 동, 아파트, 호수, 그리고 개인이 맨 마지막에 온다.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가는 순서이다. 하지만 영어는 개인의 이름을 가장 먼저 쓰고, 그리고 동, 호수, 동네, 도시, 주 이런 순서로 쓴다.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가는 순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사로운 차이를 가지고 거창하게 개인과 집단의 중요성을 판단한다는게 가소롭게 들릴 수 있겠지만, 문화의 차이는 거시적인 것보다 미시적인 것에서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개인, 혹은 개체성을 중시하는 영어의 특성은 명사에 대한 강조로 이어진다. 반면, 집단, 그것도 나와 집단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한국어의 특성은 동사에 대한 강조로 이어진다. 영어권의 아이들은 한참 언어를 습득할 때 명사를 중심으로 어휘를 확장하지만, 한국어권의 아이들은 동사를 중심으로 언어를 확장한다. 성인들의 언어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표현을 아주 간략하게 한다고 했을 때, 한국어는 주어를 생략하고 동사를 중심으로 말한다. 친구가 맥주를 한잔 했다면, 더 권유할 때, “더 마실래?” 보통 이렇게 말한다. 영어권이라면 “More beer?”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한국어로는 노래를 “잘 하느냐” 물어보겠지만 영어로는 분명 Are you “a good singer”? 라고 묻게 될 것이다.
개체를 중심으로 하는 영어에서 명사의 가산성은 대단히 중요하다. 과장해서 말한다면 명사가 셀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모를 때, 문장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셀 수 있는 명사들은 일단 그 단어를 들었을 때 개체 이미지가 우선적으로 떠오른다. 자동차, 사람, 책상, 컴퓨터 이런 단어들을 연상할 때, 수 십 대의 자동차가 함께 모여 있는 모습을 연상하는가? 플래쉬 카드를 만든다면 책상이라는 단어를 써놓고 책상 수 십 개를 그려놓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셀 수 없는 것들은 그렇지 않다. 구분할 수 없는 물이나 기름은 말 그대로 어떤 특정한 형태로 연상되지 않는다. 하지만 곡식류들은 좀 다르다. 쌀은 셀 수 있는가? 쌀은 셀 수 없는 명사다. 쌀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한톨의 이미지보다는 수북이 쌓여 있는 쌀을 연상하는게 더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손끝으로 조금만 집어서 보면 낱낱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우기고 싶겠지만 가마니에 들어 있는 쌀은 구분하기 어렵다. 밥지을 때 쌀알을 세서 넣는가? 쌀 한톨을 의미하기 위해 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지극히 예외적일 것이고, 그나마 그런 경우라면 애초에 쌀 한톨이라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쌀이나 기름, 물 이런 것들은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물질적인 성격으로 셀 수 없는 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셀 수 있는 명사들이 모여서 어떤 전체를 이룰 때, 이것도 역시 셀 수 없는 명사가 된다. 한국 학생들이 너무 자주 혼란스러워 하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책상, 의자, 침대, 옷장, 서랍장, 이 모든 것을 합쳐서 우리는 가구라고 부른다. 너무나 일상적인 말이다. 가구점에서는 가구를 판다.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자. “가구” 라는 이름의 가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구점에서 가구를 산다고 말할 수 있지만, “가구” 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가구는 없는 것이다.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책상이거나, 의자이거나 침대이지 그것은 가구가 아니다.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는 광고문구에는 카피라이터가 의도하지 못했던 심오한 의미가 들어있다. “전체”라는 개념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며 가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이 전체의 의미를 종종 실체를 가진 개념과 혼동한다. 그래서 Furnitures, mails, homeworks 와 같은 “문법적으로 부적절한” 표현들이 나타난다. FURNITURE, MAIL, HOMEWORK 과 같은 말들은 일종의 전체를 의미하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전체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개체들이 함께 모여 있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가 있을 뿐이다. 어떤 사물들의 전체라는 것은 관념적인 추상을 의미하므로 셀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전체를 의미하는 명사들은 모두 셀 수 없고, 단수로 취급한다. 비약해서 부연한다면 영어에서 명사와 관사가 만들어 내는 의미의 차이는 플라톤 이후로 서양 철학자들이 끊임없이 제기해 왔던 실재론과 유명론의 논쟁과도 관련이 깊다.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가산적일 수 있지만, 시간과 공간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는 가산성을 부여할 수 없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에도 구분이 있다.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단계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은 말 그대로 순수한 관념이다. 그래서 가산성의 표지가 결합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관념들이 상대적으로 구체성을 띠게 되면 이런 추상적인 관념들에도 가산성이 부여된다. 시간은 관념이다. 그래서 TIME is money. 이렇게 쓴다. 하지만 “We had a great TIME.“ 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아주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의미가 부각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TIME 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시간이다. 하지만 A TIME 은 어떤 특정한 때, 즐거운 때를 의미한다. 두 단어는 단지 관사 하나의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어에서 명사를 구분할 때 셀 수 있는가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단순한 문법적인 지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영어권 화자들은 직관적으로 명사의 셀 수 있는 여부를 판단한다. 하지만 한국인 입장에서 이런 직관은 좀처럼 쉽게 얻기 어렵다. 애초에 처음 명사를 공부할 때 a book, a car, an apple 이런 식으로 관사와 결합하여 배워야 하는데, 주변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교재들에는 book, car, apple처럼 관사없는 명사만 쓰여진 책들이 수두룩 하다. 안배우느니만 못하다. 이건 단어를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인 직관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관사와 결합하여 명사를 습득하는 것은 세상을 인식하는 과정에 그 문화권의 직관적인 필터를 끼우는 것과 같다. 한국식 영어교육은 이런 필터를 후천적인 문법학습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I’ve got company.” 는 헐리우드 액션 영화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표현이다. 일반적인 의미는 “동행이 있다” 정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헐리우드 액선 블럭버스터속에서는 주로 적들이 자신을 노리거나 추격하고 있는 상황에서 쓰이는 전형적인 미국식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적들의 눈을 따돌리고 은밀하게 작전을 수행하는데, 멀리서 총을 들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무리들이 보이면, 영화속의 주인공은 긴장과 자신감이 묘하게 어우러진 말투로 “I’ve got company”라고 말한다. 당연히 주인공은 이런 상황을 능숙하게 해결하고 살아남는다. 하지만 “I’ve got a company” 라고 말하는 건 전혀 다른 뜻이다. 여기서 A company는 회사라는 의미가 된다. 관사 때문이다. 관사가 붙어서 명사의 구체성의 의미가 강조된 것이다. Company는 친구나 동행의 의미로 쓰일때는 불가산 명사이다. 왜냐고? 친구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단 한명의 얼굴이 떠오르는가? 억지스럽게 들리겠지만, 그래도 까먹지 않는게 더 중요하니까,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