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영어교육
보험회사의 광고 한편이 기억난다. 생일날 라면을 끓여먹고 있던 아빠는 미국에서 걸려온 가족들의 전화를 받고 기뻐한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들의 목소리. “아빠, 미역국은 드셨어요?” 라면을 끓이던 아빠는 대답한다. “그럼, 벌써 끓여 먹었지, 아들, 영어 한번 해봐” 전화기 너머의 아들은 뭐라고 말했는지, 아빠는 크게 웃으며 아들의 영어실력을 자랑스러워 한다.
어려서 유학을 갔는지, 어학연수를 떠났는지, 아빠는 홀로 남아있고 나머지 가족들은 미국으로 영국으로 혹은 영어권의 휴양지같은 나라로 떠나있다. 엑소더스(Exodus)와 에듀케이션(Educaton)을 결합한 엑소듀케이션(Exoducation)이라는 신조어를 한번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사실상, 신조어만 없을뿐, 한국의 현실은 이미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엑소듀케이션이 넘쳐나고 있다. 그들은 해외교육의 이점보다 한국교육의 문제 때문에 해외조기육학을 선택했을 거라고 나는 순진하게 추측하지만, 사실상 교육과정이 끝나는 시점에서 해외교육의 이점은 그들이 한국으로 돌아올 때 정점에 달하게 될 것이다. 일단 영어는 되니까. 영어가 되는 사람에게 한국사회는 너무 헤플정도로 젠틀하니까.
자식들에게 어려서부터 영어를 가르치려는 능력있는 부모들은 서너살-혹은 그보다 더 어린 경우도 쉽게 찾을 수 있지만-부터 영어유치원을 보내고, 수업이 영어로 진행되는 학교를 찾아 보내고, 국제 중학교, 특목고나 외국어 고등학교를 보내려고 한다. 특히 부모들이 고학력에 경제적 능력이 충분한 경우는 더 그렇다. 그런 부모들은 한국 사회에서 영어가 얼마나 필요한지, 학력보다 학벌이 얼마나 더 중요한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경제적 가난의 대물림은 교육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진다. 높은 학력을 가진 부모들은 학벌이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학교선택에 온갖 정성을 쏟지만, 학력이 높지 않은 부모들은 학벌이 중요한 사회, 경제, 문화적 네트워크에 소속될 기회가 없어서 자식들에게 학교가 얼마나 중요한지의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결국 그러한 환경에서 자랄 경우, 좋은 학교와 높은 학력으로까지 연결되는 것은 특별히 개인적인 노력이 수반되지 않는 한 정말 드문일이 되었다.
특히, 영어에 관한한 더욱 그렇다. 영어에 있어서 빈익빈 부익부라고나 할까. 부모가 영어에 익숙하면 당연히 자식들도 영어에 쉽게 친숙해진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부모가 영어에 불편하면 그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영어에 노출될 기회가 줄어든다. 하지만 이젠 많은 부모들이 자신들의 영어능력에 관계없이 자식에게 영어만큼은 잘 가르치고 싶어한다. 학교의 문제는 나중이더라도 일단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회에서 잘 적응해 나갈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너도나도 자식의 영어실력을 위해 경제적, 정신적 지출을 마다하지 않는다. 특히나, 어려서 영어를 배우면 더 효과적이라는 매우 “과학적이고 학문적”인 이유 때문에 아이들은 채 한국말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영어를 배운다. 심지어, 부모가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싶지 않아도, 아이들은 어린이집에서 혹은 또래 친구들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영어를 접할 수 밖에 없는게 현실이다.
어려서 영어를 배우는게 좋다는 믿음은 촘스키를 비롯 몇몇 언어학자들이 주장하는 언어습득이론과 관계가 있다.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언어를 배우는 데에는 결정적인 시기가 있고, 그 시기를 지나면 언어습득의 효율성이 급격이 감소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뇌속에 있는 일종의 언어습득장치는 아이들이 노출된 수많은 소리들 중에서 언어적인 소리들을 간파하고 이해하여 언어를 스스로 습득하는데 도와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습득장치의 활동은 어린시절 활발하게 진행되지만, 사춘기 즈음이 되면 현격하게 줄어들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언어학적 근거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국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영어교육에 있어서 그것은 일종의 맹신이 되다시피했다. 많은 부모들은 능력이 된다면 아주 어려서부터 아이에게 영어교육을 시키려 하고 있다. 실제 강남구의 영어유치원의 수를 살펴보면 이런 경향이 매우 실질적이며 해마다 초등학교 수준에서 지출하는 영어사교육비도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사립초등학교의 경우, 전과목을 영어로 수업(영훈초등학교, 금성초등학교)하는 학교부터 부분적으로 수업을 영어로 진행하는 학교들까지 다양하게 분포해 있는 현실은 많은 부모들이 조기 영어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어려서 영어를 잘 배워두는 것은 분명 훌륭한 미래의 자산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난 그것을 아직 걷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산악자전거를 사주는 것에 비유하고 싶다. 산악자전거는 그것 자체로 훌륭하지만, 아직 걷지 못하는 아이에게 어떤 쓸모가 있을까? 자라서 걷고 뛸 수 있을 때까지 그 자전거를 그대로 유지하려면 얼마나 노력이 필요할까? 크게 자라서 마음껏 뛰고, 멀리 여행도 가며, 산에도 갈수 있을 때 산악자전거는 때로 필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때 준비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언젠가 신문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정치적으로 암울하던 유신시대, 생각있는 어른들은 불행했고, 아이들은 행복했었다. 정치적으로 민주화된 지금, 생각있는 어른들도 불행하지만, 아이들은 더 불행해졌다고. 많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현재 한국의 사회/경제/문화적인 역량을 배출해낸 40-50대들이 초등학교 교육을 받았을 때를 생각해보자. 조기영어교육은 물론, 사교육 자체도 흔하지 않았던 시대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아이들은 행복해 보인다. 사진작가 최민식의 사진을 한번 보자. 아이들은 가난했지만 해맑았고, 교실에서는 정말 뭔가를 배웠으며, 골목에는 항상 함께 뛰어놀 친구들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의 아이들은 풍요롭지만 짜증을 많이 내고, 학교보다 학원에서 더 많이 배운다. 형제는 적어졌지만 늘 사랑에 목말라 하고, 놀이터는 많아졌지만 정작 놀 시간도 친구도 없다. 부모들의 교육수준은 높아졌지만 아이들에 대한 사랑의 수준은 낮아졌다. 교실엔 첨단 기기들로 가득 차 있지만 정작 존중과 예절은 사라졌다.
말이 이렇게 나오고 보니, 한국은 비단 조기영어교육만이 아니라 교육일반이 참으로 큰 문제라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어느 재수학원에서는 학생통제를 위해 남학생과 여학생간의 대화조차도 금지한다고 한다. 바로 옆에서 함께 공부하고 식사하는데, 말은 주고받을 수 없단다. 삶의 기본적인 조건마저 부정하는 공부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인지 한국의 대학일선에서 가르치는 교수들 중에는 자식들을 해외에서 공부시키는 경우가 허다하게 많다. 부모는 한국에서 가르치는데, 정작 그들의 자식들은 한국의 교육시스템을 피해 외국에서 공부를 한다는 게 정상적인 모습일까? 가르치는 당사자들조차 신뢰하지 못하는 한국의 교육시스템 속에서 일찍 영어를 가르친들 그게 제대로 된 효과가 있을까? 심히 의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