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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ghyun Park Jul 13. 2019

미야자키 여행 5 - 도깨비 빨랫돌

인간의 시간, 자연의 시간

하늘은 미치도록 맑고

제가 갔을 때의 미야자키는 정말 미치도록 날씨가 좋았습니다. 아무리 옛날 율령국 시절 이름이 휴가(日向, Hyuuga)였다지만, 이렇게 해가 쨍쨍 내리쬐면서도 덥지 않기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니니기가 미야자키에 내려온 건 딱히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놀러 와 봤는데 기분이 좋아서 눌러앉은걸 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야자키에 대해 소개하는 페이지마다 무조건 보여주는 곳이 도깨비 빨래판(鬼の洗濯板, Oni no sentaku ita)이었습니다. 원래는 아오시마 신사(青島神社, Aoshima jinja) 앞에 펼쳐진 파도 모양의 파식대(波蝕臺)를 지칭하는데 제 눈엔 다 비슷하게 생겨먹어서 호리키리 고개(堀切峠, Horikiri touge)에서 바라본 게 도깨비 빨래판인 줄 알았습니다. 뭐 어때요 도깨비가 빨랫감이 많았나 보죠.

직접 가보면, 바위에 구멍이 송송 나 있습니다. 타포니(Tafoni)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도깨비 빨래판은 미야자키 앞바다의 역동적인 지형 활동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먼저, 바닷속에서 쉽게 깎여나가는 이암(진흙이 압력을 받아 만들어진 돌)과 상대적으로 잘 깎이지 않는 사암(모래가 압력을 받아 만들어진 돌)이 층층이 쌓여 기반암이 만들어집니다. 그 기반암이 지각활동에 의해 융기하되, 수평선과 살짝 엇나갈 수 있습니다. 바다는 수평선 위에 있는 모든 것을 깎아내므로, 수평선 위의 모든 지형은 (언젠가는)깎여나갑니다. 바닷물이 닿는 부분 중에서 잘 깎이는 돌이 먼저 사라지고, 단단한 부분만 남으면 이런 파도 모양의 지형이 생성됩니다. 여기에서는 잘 깎이는 이암과 단단한 사암이 번갈아가며 쌓였기 때문에 이렇게 파도 모양의 돌이 남게 되었죠. 세월이 아주 오래 지나게 되면 저 단단한 부분도 사라질 겁니다. 그래서 도깨비 빨래판은 미야자키 앞바다에서 '지질학적으로' 최근에 지각활동이 있었다는 걸 증명합니다. 그래도 빨라봤자 1500만 년 전이니 자연의 스케일을 실감하게 됩니다.


살고 싶다, 아니 더 살고 싶다

호리키리 고개에서 바라본 도깨비 빨래판은 하늘과 어우러져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그 하늘 아래 렌터카 안에서, 미야자키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습니다.

모든 순간은 필연과 우연이 뒤엉켜 있었습니다. 여행 계획의 큰 틀을 따라 움직인 건 필연이겠지요. 하지만 우연히 들어간 온천에 사람이 없었던 것은 우연이었고, 트래킹을 하다가 사슴을 만난 것도 우연이었습니다. 키리시마 신궁이 니니기를 모시는 신사였다는 것도 가보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계획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자연도 마찬가지겠지요. 지구가 지각으로 구성되어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 균열이 미야자키 앞바다에 나 있는 건 우연입니다. 도깨비 빨래판의 형성 과정은 자연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게 왜 하필 미야자키 앞바다에 있는지는 전혀 설명할 수 없습니다. 따지고 들면 그냥 우연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질투가 났습니다. 우연이라는 게 1500만 년에 걸쳐 일어나는 사건이라니! 고작 100년도 안 되는 시간을 살자고 아둥바둥하는 인간의 눈에 저 찰나는 영원입니다. 그리고 깨달은 건, 자연은 꽃이요 바위라는 것입니다. 아름다우면서도 영원하지만,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 한순간의 덧없음이라 겸손하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 덧없음의 덧없음만이라도 어떻게 더 살아볼 수 없을까, 소망했습니다.

그리고 그럴 수 없음을 느끼고,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에게는 남은 시간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살아서, 더 오래 살아서, 조금이라도 더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고, 듣고, 느끼고 싶었을 뿐인데, 왜 하필 제 뇌연수막에 암이 옮겨온 걸까요. 왜 하필 저일까요.

무의식 속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서 터져 나오던 순간이었습니다.


참고자료

도깨비 빨래판의 형성에 대한 설명 http://visit.miyazaki.jp/?p=24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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