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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기 Aug 24. 2021

욕망의 탄생

생소한 분야라 잘 읽히지 않았으나, 1/5쯤 지나면서는 흥미진진하게 읽게 되었다.

욕망에 대한 것, 모방과 경쟁 등에 관련된 이야기가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라 재미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이렇다고 믿지는 말아야 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건 본인이 만든 이론을 설득하는 측면도 있으니까.

주제와는 상관없이, 사고하거나 생각을 풀어내는 과정에서 배우는 것들도 있었다. 이를 테면, '욕구는 생물학적인 범주이고, 욕망은 심리적인 범주에 속한다. 그리고 순수한 욕망과, 욕구와 겹쳐지는 부분이 있는 욕망 사이에 존재하는 단계와 전이를 생각해볼 수 있다'와 같이, 분류를 명확히 하고, 대신 그 분류 사이에 존재하는 스펙트럼 혹은 전이를 생각한다는 구분법과 전개 같은 것은 아주 깔끔해서 '그렇겠군!'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이런 욕망이라는 것을 얼마나 많이 느끼고 갖게 되고 전달하게 되는지 생각해본다. 별로 없지 않나 생각이 들면서도, 다시 하나하나 떠올려보면, 작은 것들까지 끄집어내보면 그래도 나도 여러 스쳐지나간 순간들에서 상호작용을 많이 했다고 생각이 든다. 물론, 다른 사람들보다 일상적이지는 못했다는 생각은 들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런 모방, 욕망이라는 것이 자극적이고 부정적인 뉘앙스로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서로가 서로에게 빛이 된다는 이 세상에 대한 이야기와 비슷한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에서 가장 깨우침을 주었던 것은 이런 내용들이다.

욕망은 자아에 영향을 끼칠 뿐 아니라, 사실상 자아를 창조한다. 이런 점에서 자아는 욕망의 자아다.
자아는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놀라서 "이건 말도 안 돼. 내가 변했어"라고 중얼거린다. 우리는 늘 같은 존재가 아니며, 자아는 변한다. 상태의 연속성에 대한 기억과 자신의 욕망의 기원을 감추는 망각 덕택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지속성과 정체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욕망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며, 우리가 열정적으로 모방하는 제삼자에 의해 암시받는 것이다.
자아를 형성하는 욕망 그 자체는 타인에 의해 모방되고 영감을 받고 전달되는 것이다. 우리 자아를 만들어낼 욕망이 생기도록 하는 것은 바로 타인의 욕망이다.


다 비슷한 이야기인데, 


결국 나를 형성하는 자아는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고, 

그 자아를 만드는 것은 욕망이며,

그 욕망이라는 것은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는 것. 

그것은 내 마음 근원이나 무의식에서 비롯되는게 아니라는 것.


이라는 이야기이다. 깜짝 놀랐다.



아래는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다. 너무 많아서, 지난 3월 제주도에서 읽었던 책의 밑줄친 부분을 조금씩 생각날 때마나 옮기다 보니, 8월이 다 지나가고 있다. 아마도 그 5개월 동안 나는 누군가들로부터의 욕망을 모방하고, 자아는 조금 바뀌었을 것이다.




서문


나는 항상 욕망이 인간관계의 핵심이자 원동력이며 우리를 생으로 이끄는 첫번째 운동이라고 생각해왔다. 수년의 연구와 임상을 거친 끝에 나는 우리를 인간이게 하고 하나로 모이게 할 뿐 아니라,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우리를 서로 닮은 존재로 만드는 것이 바로 욕망이라고 믿게 되었다. 욕망은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감정을 일깨우는 만큼이나 우리 성격을 결정짓기도 한다. 그러나 욕망은 우리가 타인과 가까워지도록,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우정과 지지와 인정을 추구하게도 하는 반면, 경쟁을 일으키고 사랑만큼이나 증오를 유발하기도 한다. 욕망은 그러므로 우리의 최고의 우군이기도 하지만 최악의 적이기도 하다. 이 최악의 적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파멸로 이끌 것을 바라게 하고 고통을 유발할 것을 추구하게도 한다. 

p.29-30


따라서 욕망의 또 다른 진실은 욕망에는 항상 경쟁이 붙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타인과 똑같은 것을 욕망하면서도 타인의 욕망이 나의 욕망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고 그를 내 욕망의 장애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타인은 나의 경쟁자가 되고 나는 이 경쟁자에게서 그가 욕망하는 것을 빼앗기 위해 그의 욕망을 한층 더 강하게 욕망하게 된다. 욕망은 이처럼 우리를 더 나쁜 쪽으로 몰아간다.

p.31-32


1부 1장. 모방적 욕망


인간들은 자신의 행동이 어디서 결정되는지 모르면서도 그 행동을 의식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자유롭다고 여긴다 - 스피노자

p.39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일찌감치 모방적 욕망이론에 빠져들었다. 이 이론은 '우리의 욕망은 항상 다른 사람의 욕망을 베낀 것'이라는 아주 소박한 인류학적 가설에서 출발한다.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의 욕망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며, 우리가 열정적으로 모방하는 제삼자에 의해 암시받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에 빠졌을 때 나의 욕망이 자연발생적으로 갑자기 모든 여자들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그 여인을 향하게 되었다고, 다른 사람은 못 보고 지나갔지만 숨겨진 그 보물을 알아본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고 스스로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역시나 매력적인 다른 여자들보다 그 여자를 특별히 인정하고 높이 평가한 것은, 그녀의 드러나지 않은 매력과 멋진 미덕을 나만이 알아보았거나 그녀만이 나에게 어떤 울림을 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그 이전에 체득한, '욕망할 만한 사람'을 가르쳐준 일련의 문화적 모델들과 그 여성이 제대로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p.40


물론 경쟁심 때문에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내 파트너가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간에 행동으로는 욕망을 부추기면서도 말로는 자신을 욕망하지 못하게 막는 경우가 있다. 뜨거운 입맞춤 중에 그녀가 이렇게 말한다. "날 사랑하면 안 돼. 애석하지만 난 이미 약혼한 몸이야. 그 사람은 날 많이 사랑하고 결혼을 생각하고 있어. 그 사람 청혼을 받아들였을 때는 널 알기 전이었어. 그 사람을 버릴 수가 없어.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이란 게 정말 애석하긴 하지만 우리 사랑은 안 돼" 라고 말이다.

이건 정말 전형적인 상황이다. 이런 말을 들은 사람은 우리가 흔히 보는 "우리 사랑은 안 돼"라는 '금기'와 '경쟁'이라는 두 개의 매커니즘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욕망이 번쩍거리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열렬한 입맞춤 중에 이런 말을 듣고, 코르네유 식으로 말하자면 "뜻밖의 공격으로 마음 깊은 곳까지 뚫린" 이 연인은 그때부터 그 금기를 깨뜨리는 것과 경쟁자를 이겨 사랑하는 사람을 쟁취하여 결혼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유일한 목표가 되고 만다. 이때 상대가 세상에서 유일하고도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흔히 사랑에 눈이 먼다고들 말하지만, 정작 더 눈이 머는 것은 사랑보다는 그 사랑을 일으키는 욕망이다. 왜냐하면 욕망은 항상 자신이 추구하는 대상보다는 다른 사람의 영향을 더 많이 받기 때문이다. 모방적 욕망이 작용하는 전형적인 예라 할 의상의 유행이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시대정신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p.41-42


경쟁의 상승 작용과 경쟁심이 격화된 결과인 차이 소멸 현상은 개인들 간의 대치와 대립을 더 많이 만들어내면서 르네 지라르가 '모방 위기'라고 부르는 상황으로 몰고 간다. 우리는 경쟁자를 자신의 행복의 실현을 가로막는 부당한 박해자로 여기게 되고, 처음의 경쟁심은 격렬하고 파괴적인 의지로 변질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른 사람을 좌절시키고, 전복시키고, 압도하고, 격리시키고, 지배하고 심지어는 파멸시키고자 하는 의지 말이다. 애초의 욕망은 사라지고 욕망이 낳은 경쟁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특히 커플들의 관계를 황폐화시키는, 임상에서 '경쟁의 병리학'이라 부르는 현상을 만나게 된다.

p.49


'포르투갈 수녀의 편지'는 이와 같은 열정의 폐해를 아주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자신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한 장교에게 반한 수녀 마리안은 장교에게 "당신을 보지 못하느니 당신을 사랑함으로써 불행해지는 것이 더 낫습니다. 당신이 저의 운명이 나아지는 것을 원하지 않기에 저는 이제 불행한 운명을 아무런 불평 없이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편지를 쓴다. 그녀는 자신을 배척한 그 사람에게 완전히 굴복하여 그 사람의 뜻에 자신을 내맡긴다. 그녀에게 장교는 자신의 삶에 대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신과 같은 존재이다.

장교는 수녀로서는 감히 범접도 못할 엄청난 초월성을 갖고 있기에, 그녀는 자신의 고통이야말로 가까이 있고 싶은 그 장교의 매력을 말해주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따라서 수녀는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기도 하지만, 벗어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의 고통은 그녀가 자신의 신 가까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불에 타 죽는다면, 그것은 바로 그가 발산하는 강렬한 빛에 닿았기 때문이고 그녀를 고양시킬 수 잇는 마력의 존재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고통은 일종의 대상이 된다. 마리안은 빈 공간을 껴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껴안는다. 그 고통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다리와 같은 것으로, 멀어진 그 사람을 항상 자기 안에 둘 수 있고 무한히 가까이 다가설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고통에 빠져들수록 마리안은 그리던 그와 광명의 세계에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고 믿는 것이다.

p.51-52


욕망과 욕구, 본능이라는 말은 자주 혼동되어 쓰이는데, 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욕구는 그것을 만족시켜주는 대상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배고픔은 그것을 잠재워줄 것이 있기 전에 나타난다. 그에 비해 욕망은 우리에게 대상이 제시되거나 암시되는 바로 그 순간에 생겨난다. 갑자기 어떤 여인에게 느끼는 억누를 길 없는 욕망, 얼마 전만 해도 존재하지 않던 욕망은 그 여인의 존재를 발견한 바로 그 순간에 생겨난다.

욕구는 수많은 다른 대상으로도 채워질 수 있다. 갈증은 물이나 우유, 과일, 술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해소될 수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특정한 대상에 고정되어 있는 욕망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만족시킬 수 없다. 말하자면 욕망의 대상은 교체가 불가능하다. 욕망은 내가 그의 욕망을 모방한 다른 사람에 의해 암시된 것이기 때문에 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친한 친구의 여자와 사랑에 빠졌을 때, 친구가 나에게 다른 멋진 여자를 소개시켜주어 내 욕망을 돌려보려고 애를 쓰더라도, 그 여자는 나의 관심을 끌 수도 친구의 여자를 대신할 수도 없다. 유일한 방법은 친구 스스로가 자신의 여자로부터 마음을 돌려 다른 여자를 좋아하는 것이다. 친구가 자신의 욕망을 돌리는 바로 그 순간 내 욕망의 방향도 돌아설 것이기 때문이다.

욕구는 일단 만족되면 진정이 되고 그 만족감은 기쁨이 된다. 욕망은 그러나 만족도 모르고 평온도 모른다. 그것은 결코 쉬는 법 없이 타인의 욕망에 자극받아 끊임없이 탐색을 계속한다. 욕망은 끊임없이 마력을 행사하는 모방을 벗어날 수가 없다. 조르주 바타유는 '할렐루야'에서 이렇게 말한다. "쾌락의 추구는 소극적인 행위로 해소되면 그만이다. 하지만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 것에 목말라 한다." 욕구는 대상이 바뀌어도 상관없지만, 욕망 대상의 결정에서 모방은 필연적이다. '모방'은 언제 어디서나 작동하는 보편적인 매커니즘으로, 우리는 그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이 필연성이 결정론적인 것은 아니다 '선험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누구든지 모방할 수 있고 누구라도 나의 모델로 선택할 수 있다.

거울뉴런의 발견은 어떤 대상을 소유하려는 사람과 그런 행위를 바라보는 사람에게서 똑같은 신경반응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모방 가설을 입증했다. 그러나 나는 욕망이 나를 지나쳐 갈 때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어떤 욕망이 내 신념과 어긋날 때 그 욕망을 거부하고 다른 모델을 모방할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 그러나 거부를 하려면 우리를 지배하는 이러한 매커니즘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항상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우리 욕망은 '선험적으로' 타인을 모방한다. 그런데 우리가 모방 할 수 있는 욕망 중에는 우리 신념과 모순되는 것도 있다 어떤 욕망이 우리의 관심과 확신과 믿음, 즉 우리의 문화적 모델과 역행할 때 우리는 그런 욕망을 거부하게 된다.

p.55-57


욕구는 생물학적인 범주에 속한다. 반면에 욕망은 심리적인 범주에 속한다. 욕구는 주체의 생물학적 요구에서 생겨나고, 욕망은 모방적이기 때문에 타인 속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문학상을 받고 싶다는 식의 완전히 모방적이며 심리적인 순수한 욕망과, 욕구와 '겹쳐지는' 부분이 있는 욕망 사이에 존재하는 단계와 전이를 생각해볼 수 있다. 가령 좋은 와인을 마시고 싶다는 '모방에 의해' 알게 된 욕망은, 마시고 싶다는 욕구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생겨날 수 없는 욕망이다. 욕구는 생물학적인 차원과 무관하게 정신적인 것일 수가 없는 반면에, 욕망은 그럴 때가 많다.

모방 없는 욕구는 욕망을 만들어내지 못하지만, 욕망은 욕구를 만들어낼 수 있다. 가령 어떤 커플의 사랑을 제삼자가 질투함으로써 오히려 이 연인들의 사랑이 더 커질 수 있는데, 그때 연인들이 나누는 "나는 당신이 필요해" "너 없이 못 살아" "너 없는 세상은 아무 의미가 없어"와 같은 전형적인 말들은 이들의 내면을 잘 드러낸다. 이 순간 욕망은 상대방에 대한 육체적인 욕구를 만들어내는 듯 보이지만, 이 욕구는 실제로는 심리적인 욕망에 머물러 있다.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이라면 사랑하는 사람 없이는 당장 살 수 없고 앞으로도 살아갈 수 없으며, 그를 빼앗긴다면 죽어버릴 것 같은 절대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p.58-59


에너지이자 운동인 욕망은 다른 모든 힘들이 그런 것처럼, 결국 저항에 부딪혀야 그 힘이 발휘된다. 이때 저항은 꼭 실제의 저항일 필요는 없다. 상상 속의 저항일 수도 있다. 끝없는 질투심으로 사람들은 경쟁자 때문에 불안해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사실 경쟁자가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온갖 배신의 가능성을 생각하는데, 괴로워하면 할수록 배신 생각에 더 깊이 빠져든다. 상상적인 장애물을 포함하여 모든 장애물은 욕망을 배양한다. 저항이 사라지거나 줄어들면 욕망도 줄어들면서 사라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욕망은 저항이 존재할 때에만 힘을 발휘하는데, 그 힘은 저항의 크기에 비례하여 저항이 사라지면 욕망도 소멸된다.

발몽이 투르벨 부인에게 보낸 아주 잔인한 편지의 다음 구절은 욕망과 저항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전에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만, 더 이상 아닙니다. 내 잘못은 아닙니다. [......] 내 욕망은 당신이 정절을 지키고 있을 동안에만 계속됩니다" 여기서 "내 잘못은 아닙니다"라는 구절에 담긴 심오한 심리학적 진실에 대해 강조할 필요가 있다. 욕망은 자아에 영향을 끼칠 뿐 아니라, 사실상 자아를 창조한다. 이런 점에서 자아는 욕망의 자아다. 그러므로 욕망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욕망은 자신의 운명, 자신의 논리에 따라 장애와 저항이 사라지자 스스로도 사라졌던 것이다. 자아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며,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p.61-62


사실 정체성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현재의 나를 만든 숱한 모델에 대한 계속적인 동일화의 총합에 다름 아닐 것이다.

p.64


1부 2장. 미분화개체 간 심리학


욕망이라는 이 심리학적 운동의 에너지는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일까?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온다. 타인과의 관계. 그것은 아주 밀접하고도 근본적인 관계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단순히 두 개인이나 두 주체 간의 관계가 아닌 두 개체 사이를 오가면서 '자아'라 불리는 실체를 파들어가는 왕복 운동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르네 지라르와 기 르포르와 내가 '세상 설립 이래 감추어져온 것들'에서 우리의 응용 인류학과 심리학 연구들을 가로지르며, 더 이상 개인이나 단자로서의 주체에 관한 심리학이 아닌 새로운 관계의 심리학을 시작하며, 이것을 '미분화개체 간 심리학'이라 명명했던 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마음의 운동에 필요한 심리적 에너지를 제공해주는 것은 바로 사람들과 만날 때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유혹의 힘이다. 따라서 모방적 욕망은 타인과의 관계, 다시 말해 미분화개체 간의 관계를 통해서만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여기서 나온 운동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에너지는 같은 속성을 지닌다.

p.65-66


자아는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나는 심리학에서 자아라고 부르는 것이 고정된 것이 아닌,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항상 품어왔다. 이런 추측이 심리학적으로 옳은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우리가 처음에 갖게 되는 직감을 거스르는 것 같다. 평소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지 않고 스스로가 완전히 자율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심각한 고민에 시달리거나 낙심하게 되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잘 모르겠다고 느낀다. 또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놀라서 "이건 말도 안 돼. 내가 변했어"라고 중얼거린다. 우리는 늘 같은 존재가 아니며, 자아는 변한다. 상태의 연속성에 대한 기억과 자신의 욕망의 기원을 감추는 망각 덕택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지속성과 정체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 가수 겸 배우였던 레몽 드보는 "우리는 실은 여러 사람이면서도 종종 자신을 어떤 한 사람이라고 여긴다"라고 이런 상황을 아주 적절히 표현한 바 있다. 타인들이 관통해 지나가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주조된다.

p.66-67


최면은 자아가 욕망의 바깥에 있는게 아니라는 사실, 다시 말해 자아에 생긱를 불어넣는 것은 바로 욕망이며, 자아는 바로 욕망의 자아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우리의 의식이 최면에서처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변형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타자성에 의해 주조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최면이 쉽게 설명되지 않으며 마술적으로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p.69


르네 지라르의 이론을 논하면서 '개인individu'라는 개념을 거론하지 않았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왜냐하면 개인이라는 개념은 자신의 정체성과 자유로움의 기원이 스스로에게 있다고 보는, 스스로에 닫혀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개인을 특징짓는 '고전적인' 심리학을 거부하고, 대신에 미분화개체 간 심리학을 택하였다. 이 심리학에서는 진정한 심리적 진실이 한 개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관계 그 자체에 '있다'고 간주한다. 이러한 심리적 관계와 멈춤 없는 상호작용은 전적으로 모방에 의한 현상으로, 이것은 대칭을 이루면서 끊임없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주조해낸다. 우리의 욕망과 자아는 타인과의 사이, 즉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자아는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주변 사람들과의 대칭적인 교환과 만남의 한가운데서 일어나는 지속적인 창조 행위의 결과다. 이러한 교류와 교환을 벗어나서는 우리의 자아가 생겨날 수가 없다는 말이다.

p.70


우리가 자아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자아가 순간순간 끊임없이 반짝거리는 빛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제대로 이해할 때 우리의 욕망은 복잡한 굴절 과정을 거치면서도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고, 또 삶의 흐름과 가능성의 물결 속에서도 모방의 운동을 멈추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진정으로 위협하는 것은 욕망이 모방 운동을 멈추고 단 하나의 모델에만 매달려 거기에 고착화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욕망은 더욱 심각한 경쟁을 유발함으로써 온갖 병리적 증상을 불러올 것이다.

p.71


스스로의 삶을 곰곰이 되돌아보면, 우리는 자신의 자아가 여러 개의 자아들로 이어져왔고, 때로는 그것들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어제의 나와 똑같지 않으며 누군가와 똑같은 사람도 아니다. 이는 커플 관계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면 자아는 상대의 욕망에 의해 다시 길들여진다. 다시 말해 자아가 바뀐다. 우리는 종종 사랑에 빠지는 것을 벼락에 맞는 것에 비유하는데, 이는 사랑이 우리를 완전히 뒤바꾸어버리는 변화를 일으키는 것과 관계가 있다. ... 이런 새로운 자아의 '탄생'에는 가혹한 대가가 따른다. 만일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자아가 사랑하는 이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버림받으면, 자아는 곧 무너져내리고 사라지게 된다. 버림받는 두려움에 따라오는 죽음의 불안은 실제의 불안이다.

p. 72-73


2부. 창조와 추락

사실 심리학적인 인간의 창조에 필요한 것은 분신일 것이다. 신이 남자의 '맞은 편en face de'에 '반대하는' 이 분신을 창조하지 않았다면 변증법이나 심리 변화, 혹은 욕망은 아예 존재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리하여 신은 여자를 만들었다. 여자의 창조에 대해서는 앙드레 큐라키의 번역이 아주 많은 것을 시사한다.

'여호와 하느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는 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남자Ish에게서 나왔으니 여자Isha라 부르리라" 하니라.(2장 21-23절)'

 ... 유대의 많은 문헌, 특히 '조하르'경은 아담 창조에 대해 다른 해석을 제공한다. 이 기록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 우선 무엇보다도 아담은 '이중으로double' 창조되었다. 말하자면 아담은 자웅동체인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원하던 '마주보며 도움이 되는 존재'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왜야하면 아담에게 들어 있는 두 개의 개체는 샴쌍둥이처럼, 서로 등을 맞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자웅동체 아담의 두 부분을 분리시킨다. 이 경전은 다음과 같이 읽으라고 권하는 것 같다.

"하느님은 아담의 갈비뼈cotes 하나를 취한 것"이 아니라 "아담의 옆구리cotes 하나를 취한 것"이라고 말이다.

p.101-103


사랑이란 결국 연인들 안에 상대를 욕망하는 자아라는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내는 관계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이별이나 상대방의 무심함은 항상 엄청난 고통을 낳는다. 왜냐하면 욕망의 자아는 상대의 욕망에 의해 유지되거나 지탱이 되지 않으면 와해되거나 사라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정절로 명성이 자자했던 투르벨 부인의 마음도 발몽 자작으로부터 외면을 당하자 한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왜냐하면 명성이란 것도 미분화개체간 관계 밖에서는 아무런 존재 의미가 ㅇ없기 때문이다.

p.115-116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이 동산에 있는 나무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되, 죽지 않으려거든 이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어."(3장 2-3절)

이 순간 심리학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적 매커니즘이 이 여인의 정신에 개입하는데, 그것은 바로 '비교'라는 것이다. 뱀이 이브에게 암시한 그 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 사이의 비교가 그것이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비교로부터 차이가 생겨나는데, 이 나무와 다른 나무의 차이는 금기에 의해 확인된다.

p.123


신과 이브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신) 암시 : 그 과일을 먹지 마라

(이브) 모방 : 그 과일을 먹지 않는다

이에 비해 이브와 뱀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뱀) 암시 : 그 과일을 먹는다

(이브) 모방 : 그 과일을 먹는다

자신의 암시를 신의 암시처럼 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뱀은 스스로가 경지에 있음을 자처한다. 선과 악의 차이를 비롯해서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고, 과일을 먹으면 이브가 어떻게 될지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뱀은 아는 것에 있어서 신의 위치에 자리 잡는다. 그리고 뱀의 암시는 신의 암시를 대신할 뿐 아니라 신의 암시를 퇴색시킨다.

뱀의 거짓말은 문제의 상황을 왜곡시키는 데까지 이른다. 뱀의 거짓말은 하느님이 그것을 하느님에게 지식과 능력을 주기 때문에 그 나무를 욕망한다고, 또 하느님이 그 나무를 허락하지 않은 것은 아담과 이브를 죽음에서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스스로가 그 나무를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기게 한다. 이때부터 그 나무를 욕망하게 된 이브는 하느님의 욕망을 모방하여 하느님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여기면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다음과 같이 되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신) 암시 : 그 과일을 욕망한다. 그래서 나를 위해 남겨둔다.

(이브) 모방 : 그 과일을 욕망한다. 그래서 나는 먹는다.

p.131-132


유명한 솔로몬 왕의 재판이 뛰어난 것은 정확히 말해 판단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의 현명함은 경쟁의 대상물을 나누어 가지라고 명한 데 있다. 하지만 아이를 나누면 죽는다. 이 판결로 왕은 두 여인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모방적 경쟁에 빠져들 것인지 아니면 아이를 구할지를 선택하게 한 것이다. 이때 나쁜 엄마는 승리를 선택한다. 다시 말해 아이가 죽는 것보다는 자신의 욕망이 더 중요한 것이 되기를 선택한다. 나쁜 엄마는 이리하여 경쟁자에 대한 승리, 경쟁자에게서 아들을 빼앗는 것인 이 승리만이 자신의 관심사라는 것을 보여준다. 반면에 아이를 구하기 위해 경쟁자에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을 받아들인 진짜 엄마가 밝혀진다. 경쟁자에게 넘어갈지언정 아이는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을 구한 이 비폭력의 선택을 통해 엄마는 자신이 그 아이의 진짜 엄마라는 것을 왕에게 보여준 것이다. 이때부터 솔로몬은 더 이상 '판단'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단지 자명한 사실과 태도를 확인만 하면 된다. 모방적 경쟁이 드러나는 조건을 만들어놓고 두 여인들이 자기가 한 선택에 책임을 지게 하였던 것이 바로 솔로몬 왕의 지혜의 핵심이라 하겠다.

p.141


아담의 심리변화를 유도하여 그를 불복종으로 이끌어 금지된 과일을 먹게 할 수 있는 것은 모방적 욕망뿐이다. 하느님이 "너의 마음 혹은 너의 의식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라고 묻지 않고 "누가 일러주더냐?"라고 '중개자'에게 집중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개자가 있으니 하느님의 결론은 "내가 따 먹지 말라고 일러둔 그 나무 열매를 네가 '그래서' 따 먹었구나!" 정도가 된다.

p.145


모방적 욕망이 심리 변화의 원동력이란 것을 받아들이는 것, 타인의 욕망은 악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선이라고 주장하는 우리의 욕망의 거짓 정당화를 반박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런 밝은 눈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모방적 욕망이라는 이 개념부터 깨달아야 할 것이다. 나의 욕망과 그의 욕망은 서로가 서로를 모방한 결국 똑같은 것이란 것을 우리는 지금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p.158


3부 1장. 선구자들

여기서 흔히 하는 오해를 하나 지적해야겠다. 모방, 반복, 재생산은 모방의 과정들이지만 그 과정이 동일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가 부모를 닮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부모의 '클론(복제인간)'인 것은 아니다. 남의 흉내를 아무리 잘 내는 사람도 모델과 똑같은 목소리를 가질 수는 없고, 열심인 학생이 선생님이나 그 모델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모방은 복제가 아니다. 만유모방은 정보 습득도 가져올 수 있지만 동시에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 플라톤은 모방의 이런 측면을 이미 알고 있었다. 탁자에 대한 플라톤적인 이데아에는 '잠재적으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탁자들이 다 들어 있다. 탁자의 이데아와 구체적인 탁자 사이에는 그러므로 정보의 거대한 손실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릴 때 완성된 그림에는 물론 모델 모나리자 부인에 비해 많은 정보 손실이 있다. 그녀의 몸짓이나 웃음, 성격, 목소리, 정신, 향기 따위는 표현되어 있지 않고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다빈치가 뛰어난 솜씨로 그 모델에게 특별한 자질을 첨가했고, 이 자질 때문에 이 그림이 수 세기에 걸쳐서 뛰어난 걸작으로 통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201


시간은 물질계의 만유인력과 정신계의 만유모방이라는 영원한 이중 운동에 의해 지속된다. 이 운동들이 한편으로는 두 물질의 상호작용을, 다른 한편으로는 심리 주체들의 상호작용을 똑같은 원칙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이 운동은 영원한 운동이 된다. 이때의 원칙은 서로를 향하는 물체의 운동이 서로를 밀어내는 운동에 의해 어긋나는 원칙이다. 물질적이고 심리적인 이 주체들은 그러므로 완전히 헤어질 수도 완전히 멀어질 수도 없다. 이것들은 서로의 주위를 영원히 선회하고 있다. 운석이나 우주 물체가 자신의 궤도를 벗어나는 것은 더 강한 인력을 가진 물체의 궤도로 끌려들어가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그 자신이 또 다른 주체의 인력에 끌려들어가기 때문이다.

p.203


3부 2장. 거울뉴런의 발견

손이 어떤 물건을 잡으려고 움직이는 것을 본 원숭이 뇌의 전운동 영역의 F5 영역이 강한 반응을 나타냈다. 하지만 어떤 것도 잡으려 하지 않고 '그냥' 움직이는 손을 볼 때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더 흥미로운 것은, 실험자가 원숭이가 보는 데서 사과를 놓고 불투명한 막으로 가린 다음 손을 그 막 뒤로 밀어 넣으면 이를 바라보던 원숭이의 F5 영역이 활성화되면서 반응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토리오 갈레스는, 사람에게서 원숭이에게 혹은 어떤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행동만이 아니라 그 행동의 의도도 같이 전달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관찰자의 거울뉴런에 포착되면서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달되는 이 의도는 그 행동을 하는 사람이나 그것을 행할 의도를 표명한 사람의 뇌 속에서 반응을 나타내는 영역과 똑같은 영역에 있는 거울뉴런의 반응을 일으킨다.

p.207-208


이쪽으로 연구를 계속한 학자들은, 인간의 모방은 항상, 즉 아주 근본적인 차원에서, 행동과 표현에 대한 모방이라기보다는 의도나 목표에 대한 모방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숱한 실험 결과에서 나온 결론이라고 보는 것이 마땅할 이 가설에는 목표지향 모방이론 이란 이름표가 붙었다.

멜초프의 업적이나 목표지향 모방이론은, 우리는 단지 타인의 겉모습이나 몸짓, 소유만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특히 그리고 아주 중요한 사실인데, 어린 나이 때부터 타인의 의도, 바꾸어 말해 타인의 욕망도 모방하고 있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거울뉴런을 발견했던 자코모 리졸라티는 소유 모방을 두고 이렇게 지적한 적이 있다.

원숭이에게서 이런 모방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이런 식의 모방은 그들에게 아주 위험하기 때문이다.

모방의 위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원숭이가 어떤 물건을 집는다는 식의 구체적인 목표를 갖고 행동을 할 때 전운동 피질의 뉴런들이 활성화된다는 리졸라티의 연구 결과를 상기하자, 이번에는 어떤 물건을 붙잡으려는 원숭이와 이 원숭이를 기계적, 맹목적으로 모방하는 다른 원숭이 한 마리를 상상해보자. 똑같은 대상을 향해 뻗은 두 개의 손은 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p.210-211


거울뉴런 덕분에 우리는 욕망의 모방성과 타자성을 수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거울뉴런 연구 결과, 욕망의 기원은 더이상 무의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내면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심리학과 신경학의 측면에서 타인 안에 있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우리 욕망의 책임과 유죄성을 감면시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층촬영 화면을 통해서 우리는 욕망이 한 주체에서 다른 주체에게로 '거울처럼' 모방적으로 전달되는 것을 가시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p.213-214


3부 3장. 새로운 욕망이론

생존과 욕망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생명 저 깊은 곳에서 끌어오는 것이 자아가 아니다. 오히려 자아를 만들어가는 것은 바로 우리의 욕망이다. 말하자면 욕망에 의해 욕망의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자아를 형성하는 욕망 그 자체는 타인에 의해 모방되고 영감을 받고 전달되는 것이다. 우리 자아를 만들어낼 욕망이 생기도록 하는 것은 바로 타인의 욕망이다.

p.222


미분화개체 간 심리학은 그래서 시점 1의 욕망이 이용하고 있는 정상적이거나 신경증적이거나 정신질환적인 여러 가지 전략과 시점 2의 자아가 모델의 욕망보다 자신의 욕망이 선행하기에 우선권이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이용하는 전략을 연구하게 될 것이다. 이런 두 가지 전략을 사용하게 되면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의 순서가 뒤바뀌고, 그래서 물리적 시간의 방향도 뒤바뀌면서 심리적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내는 결과를 낳게 된다.

보다시피 시점 2에서 자아 B가 욕망 B보다 선행하고 있고 또 자기 스스로 대상을 향한다고 여기는 욕망 B는 시점 1에서 욕망 A보다 선행하고 있는 등, 심리적 시간은 완전히 전도되어 있다.

p.224-225


4부 1장. 상호성의 논리

사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사람들이 연속적인 경쟁에 몰려 경쟁이 아닌 미분화개체간 관계는 맺을 수 없게 되고, 경쟁 그 자체가 모델이 되는 것을 너무나 자주 관찰하게 된다. 장애물을 모델로 여기는 사람들은 대개 문자 그대로 일차원적인 추론을 한다. 내가 바라는 것을 감추거나 못 가지게 막는 사람이 바로 장애물이고, 바로 그렇기에 그것을 바로 욕망할 만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이다. 이런 불가능한 추구에서 이들로 하여금 '발길을 돌리게 하는 것'은 정말 힘들다.

나는 모든 심리 치유의 최종 목표는 환자들을 지혜롭게, 그러니까 행복으로 들어설 수 있게 유도하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과연 어떤 것일가? 감히 말하자면, 지혜는 바로 자신이 가진 것을 욕망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동시에 지혜는 사랑을 지키는 것인데, 사랑은 항상 경쟁에 의해 위협받는다. 

p.263-264


4부 2장. 반쪽의 질투

상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역설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커플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한 파트너가 상대를 보호한다거나 '상대의 행복을 위해' 충고한다는 미명하에 끊임없이 상대를 비난하는 이런 커플은 항구적인 고통과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상대에 대해 좋은 감정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 뒤에는 종종 공격성이 감추어져 있다. '왕보다 더한 왕당파'라고 부를 수 있을 이런 파트너는 목표를 상대의 능력 밖에 성정해놓고 스스로의 이해에도 상반되는 태도를 요구함으로써 상대와의 관계를 곤궁에 빠뜨릴 것이다.

성에도 경쟁이 스며들 수 있다. 과거 프랑스 상류 사회의 귀부인은 사교계의 멋진 파티에서 정부에게 "내가 불감증인 게 정말 다행이야. 덕분에 가련한 여자들처럼 한 남자에게 매여 깊이 빠져들 일이 없잖아. 대신 기분 따라 남편이든 애인이든 마음대로 고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 계책 덕분에 그녀는 막대한 재산도 모으고 신이 여인에게 약속한 그 유명한 '탐욕'으로부터도 안전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쾌락을 준 남자를 극도로 원망하는 여자들도 있다. 이런 여자들은 자신이 싸움에서 졌고, 약점을 내

p.268

 

때로는 욕망과 경쟁의 모방적 실상을 알고, 또 남편-아내-술 혹은 남편-아내-애인으로 된 삼각형적 구조를 깨닫는다 해도 그들 부부를 시소에서 내려오게 하지 못할 때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내가 시도했던 것처럼 시소의 왕복 운동을 느리게 함으로써, 경쟁의 그 미친 왕복 운동 덕분에 밉상으로만 보였던 상대방의 얼굴을 지우고 그 대신 원래 사랑했던 그 사람의 얼굴이 다시 떠오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p.276


메살리나 유형의 또 다른 여자는 자신이 남자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설명해주었다. "남자란 게 뭔 줄 아세요? 남자는 걸어다니는 액세서리랍니다." 거리를 걷다가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면 그녀는 "아, 가능성이 보이는군" 하면서 쾌재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상 그 여자는 지독한 고독 속에서 살고 있었다. 단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할 뿐이었다. 나는 그 여성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모든 남자를 갖는 것은 한 남자도 갖지 못하는 것이며, 한 남자를 갖는 것은 모든 남자를 갖는 것입니다." 그녀는 처음으로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p.292


4부 3장. 제삼자의 질투

"제가 생각하는 이유를 설명해보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영원히 생성되면서 변화하는 존재입니다. 우리 자아를 만들어내 그것이 존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바로 우리의 욕망이지요. 모든 인간관계보다 욕망이 우선합니다. 당신과 그녀를 하나로 묶고 있는 욕망이 얼마나 강한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리고 최근 몇 달 동안 그 욕망은 더 격렬해지면서 당신은 도처에서 새로운 라이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자아', 정확히 말하면 욕망의 자아를 만들어낸 것은 다름 아닌 당신과 그녀를 묶어두고 있는 그 욕망입니다. 그녀가 갑작스럽게 떠난 것이 당신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던 당신의 자아를 허물어뜨리고 말았습니다. 갑작스런 이별의 결과 욕망이 당신의 자아에 생기를 불어넣던 일을 갑자기 중단하게 된 것이지요. 그렇게 되자 당신은 정말 견딜 수 없는 죽음의 번뇌에 사로잡혀서 그 고통을 끊을 수 있는 해결책으로 자살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은 당신의 과거 자아들에 매달려보십시오. 당신의 아내와 아이들과 친구들과 같이 나누었던 당신의 자아들 말입니다. 그 여자 이전의 당신의 삶을 떠올려보십시오. 그리고 주어진 일에 몰두하고요. 당분간 당신이 중점적으로 생각하면서 되찾아야 할 것은 바로 직업인으로서의 당신의 자아입니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또 다른 여자를 만나 또 다른 욕망이 당신의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주게 될 것입니다."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하지만 지금까지 그냥 그렇게 존재한다고 여겨온 제 아내와 아이들과 친구들, 그리고 제가 하는 사업에 대해 제가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은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라르는 그 뒤로도 2년간 고생을 했다. 하지만 자살은 하지 않았다.

p.314-315


에필로그

또 다른 어려움은 남녀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변덕스럽고 쉽게 사라지는 것이라고 여기는 데서 발생한다. 사람들은 사랑이 찾아올 때 그런 것처럼 한순간에 떠나간다고, 그리고 사랑의 생명은 그 본성상 유한하다고 여긴다. 따라서 사랑을 보호하려고 애를 써봐야 마음만 힘들고 실망이 커질 거라고 여긴다. 하지만 사랑은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또 더 강화되어야 한다. 사랑이 성숙하는 데에는 시간과 지혜가 필요하다. 욕망 때문에 걸려드는 암초와 같은 우리의 잘못에 대해 사랑은 절대 미리 대비하고 있지 않다. 로렌스는 "격렬한 포옹과 뜨거운 애무에도 작은 틈새는 있는 법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불행하게도 사랑은 선망, 탐욕, 질투 그리고 타인을 지배하거나 통제하려는 욕구로부터 우리를 절대 보호해주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사랑의 결점이나 환상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관심이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징표다.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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