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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기 Nov 05. 2023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생각만큼 나에게는 어려운 책이었다. 소설이지만 소설같지 않은 구조도 그렇고, 실제 있었던 시대상황에 대입되어 있는 것도 그렇고, 하나의 일을 여러 인물들과 작가의 시점으로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그렇고, 완벽히 머릿속에 이야기의 흐름이 들어오기 보다는, 군데군데 덩어리로 모여있는 장면들을 머릿속에 담은 느낌이다.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읽어봐야겠다.


우리 인생의 매순간이 무한한 횟수로 반복되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혔듯 영원성에 못박힌 꼴이다. 이런 발상은 끔찍하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 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것을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의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러나 묵직함은 진정 끔찍한 것이고, 가벼움은 아름다운 것일까?
가장 무거운 짐이 우리를 짓누르고 허리를 휘게 만들어 땅바닥에 깔아 눕힌다. 그런데 유사 이래 모든 연예시에서 여자는 남자 육체의 하중을 받기를 갈망했다. 따라서 무거운 짐은 동시에 가장 격렬한 생명의 완성에 대한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짐이 무거 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의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날아가버려, 지상적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기껏해야 반쯤만 생생하고 그의 움직임은 자유롭다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이것이 기원전 6세기 파르메니데스가 제기했던 문제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세상은 빛- 어두움, 두꺼운 것 - 얇은 것, 뜨거운 것-찬 것, 존재-비존재와 같은 반대되는 것의 쌍으로 양분 되어 있다. 그는 이 모순의 한 극단은 긍정적이고 다른 쪽은 부정적이라 생각했다. 긍정과 부정의 극단적 양분이 유치할 정도로 안이하게 보일 수도 있다. 단 이 경우는 예외이다: 무엇이 긍정적인가? 묵직한 것인가 혹은 가벼운 것인가?
파르메니데스는 이렇게 답했다.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 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그의 말이 맞을까? 이것이 문제이다. 오직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가벼운 것 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한 모순이다.
p.11-12


그는 한없이 자책하다가 결국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무엇을 희구해야만 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한 번밖에 살지 못하고 전생과 현생을 비교할 수도 없으며 현생과 비교하여 후생을 수정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테레사와 함께 사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혼자 사는 것이 나을까?
도무지 비교할 방법이 없으니 어느 쪽 결정이 좋을지 확인할 길도 없다.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 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이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초벌그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초벌그림>이란 용어도 정확지 않은 것이, 초벌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밑그림,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란 초벌그림은 완성작 없는 밑그림, 무용한 초벌그림이다.
토마스는 독일 속담을 되뇌였다.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 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p.14-15


그는 테레사에게 얽매여 7년을 살았고, 그녀는 그의 발길 하나 하나를 감시했다. 마치 그의 발목에 방울을 채워놓은 것 같았다. 이제 그의 발걸음은 갑자기 훨씬 가벼워졌다. 거의 날아갈 듯했다. 그는 파르메니데스의 마술적 공간 속에 들어간 것이다. 그는 존재의 달콤한 가벼움을 만끽했다.
우수 어린 이 이상한 도는 일요일 저녁까지 지속되었다. 월요일, 모든 것이 달라졌다. 테레사가 그의 머릿속에 돌연 출연한 것이다. 그는 테레사가 이별의 편지를 쓰며 겪었던 감정을 느꼈던 것이다. 그녀의 손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한 손에는 무거운 트렁크를 들고 다른 손에는 카레닌을 묶은 줄을 잡고 천천히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프라하 아파트의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리는 그녀 모습이 떠올랐고 문을 열었을 때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홀로 된 그녀의 슬픔이 그의 가슴에 와 닿았다.
멜랑콜리했던 아름다운 이틀 동안 그의 동정심이(감정적 텔레파시라는 이 저주) 쉬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노동자가 한 주일 동안 고된 일을 마치고 월요일에 다시 격무로 돌아가기 위해 일요일에 잠을 자두듯, 동정심도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p. 39-40


토마스는 그의 친구 Z에 대해 테레사가 한 말을 떠올리고 그들의 사랑의 역사는 <그래야만 한다!>라기보다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에 근거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7년 전 테레사가 살고 있던 도시의 병원에 <우연히> 치료하기 힘든 편도선 환자가 발생했고, 토마스가 일하던 병원의 과장이 급히 호출되었다. 그런데 <우연히> 과장은 좌골 신경통에 걸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 대신 토마스를 시골 마을에 보냈던 것이다. 그 마을에는 다섯 개의 호텔이 있었는데, 토마스는 <우연히> 테레사가 일하던 호텔에 들었다. <우연히> 열차가 떠나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 그는 술집에 들어가 앉았던 것이다. 테레사가 <우연히> 당번이었고 <우연히> 토마스의 테이블을 담당했다. 따라서 토마스를 테레사에게 데려가기 위해 여섯 개의 우연이 연속적으로 존재해야만 했고, 그것이 없었다면 그는 테레사에게까지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녀 때문에 보헤미아로 되돌아왔다. 이렇듯 치명적 결정은 7년 전 외과 과장이 좌골 신경통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존재하지도 않았을 우연한 사랑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고 절대적 우연의 화신인 그 여자가 지금 그의 곁에 누워 깊은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아주 늦은 시간이었다. 절망의 순간에 항상 그랬듯 위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테레사의 호흡이 한두 번인가 가벼운 코고는 소리로 변했다. 토마스는 추호도 동정심을 느끼지 못했다. 그가 느낀 유일한 것 은 위를 누르는 압박감, 귀향에 대한 절망감뿐이었다.
p.44-45


취리히에서 프라하로 돌아온 이래 토마스는 테레사와의 만남이 여섯 개의 우연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생각 때문에 불쾌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데 한 사건이 보다 많은 우연에 의해 좌우될수록 보다 중요하고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나 않을까?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보여졌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시들이 커피잔 바닥에서 커피 가루가 그린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이,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그 술집에 토마스가 있었다는 것은 테레사에게 있어서 절대적 우연의 발현이다. 그는 책을 펴놓고 혼자 앉아 있었다. 그는 눈을 들어 테레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코냑 한 잔!」 그 순간 라디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테레사는 카운터로 코냑을 가지러 가면서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베토벤의 음악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프라하의 한 사중주단이 이 조그만 마을에 순회 공연을 온 뒤부터 그 곡을 알고 있었다. 테레사는(우리가 알고 있듯 <신분 상승>을 갈구했다) 음악회에 갔었다. 공연장은 텅 비어 있었다. 약사와 그의 부인, 그리고 그녀뿐이었다. 그래서 무대 위엔 사인조의 악단, 객석에는 삼인조의 청중만 있던 셈이었는데, 친절하게도 연주가들은 공연을 취소하지 않고 그들 만을 위해 저녁 내내 베토벤의 마지막 사중주 가운데 세 곡을 연주했다.
그 뒤 약사는 음악가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고 낯선 여자 청중도 그 자리에 합석하자고 청했다. 그후 그녀에게 베토벤은 그녀가 희구하던 세계의 이미지, (저쪽 편〉 세계의 이미지가 되었다. 이제 카운터에서 코냑을 들고 토마스에게 다가간 그녀는 이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썼다. 호감이 가는 이 낯선 남자에게 코냑을 가져다주려는 순간 베토벤의 음악이 들리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우연은 필연성과는 달리 이런 주술적 힘을 지닌다. 하나의 사랑이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는 성 프란체스코의 어깨에 새들이 모여 앉듯 여러 우연이 합해져야만 한다.
p.59-60


사비나에게 진리 속에서 산다거나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군중 없이 산다는 조건하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싫건 간에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게 되며, 우리가 하는 것의 그 무엇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군중이 있다는 것, 군중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거짓 속에 사는 것이다. 사비나는 작가가 자신의 모든 은밀한 삶, 또한 친구들의 그것까지 까발리는 문학을 경멸했다. 자신의 내밀성을 상실한 자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라고 사비나는 생각했다. 또한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자도 괴물인 것이다. 그래서 사비나는 자신의 사랑을 감춰야만 한다는 것에 대해 괴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진리 속에서> 사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p.133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탄 자세로, 두 사람 모두 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그들이 원하는 먼 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그들을 구원하는 배신에 도취되었다. 프란츠는 사비나를 타며 그의 부인을 배신했고, 사비나는 프란츠를 타고 프란츠를 배신했다.
p.138


제네바에서 1년을 자낸 후 사비나는 파리에서 살았으며 여전히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누군가 그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해도 그녀는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할 것이다.
한 인생의 드라마는 항상 무거움의 메타포로 표현될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의 어깨에 짐이 부과되었다고 말한다. 이 짐을 지고 견디거나, 또는 견디지 못하고 이것과 더불어 싸우다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그런데 사비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는 한 남자로부터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떠났다. 그후 그 남자가 그녀를 따라왔던가? 그가 복수를 꾀했던가? 아니다.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녀 앞에 새로운 길이 열리고, 그 끝에는 여전히 또 다른 배반의 모험이 있다는 생각에, 배반의 순간들이 그녀를 들뜨게 했고 그녀의 가슴에 즐거움을 가득 채워주곤 했다. 그러나 여행이 끝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부모, 남편, 사랑, 조국까지 배반할 수 있지만 더 이상 부모도 남편도 사랑도 조국도 없을 때 배반할 만한 그 무엇이 남아 있을까?
사비나는 그녀를 둘러싼 공허를 느꼈다. 그리고 바로 이 공허 가 그녀가 벌인 모든 배신의 목표였다면
p.144


「그들이 당신이 쓴 것을 그대로 발표한 것이 아니라고요?」 
「그들이 삭제했습니다」
「많이요?」
「약 삼분의 일 정도입니다」
내무부 남자는 진심으로 분개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들이 한 짓이 도무지 정당하다고는 볼 수 없군요」 토마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의사 선생님 나 자신도 당신 기사보 읽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토론을 했었습니다. 그들은 당신이 그런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놀라워했어요. 그런데 발표된 당신의 기사가 당신이 쓴 것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설명을 듣고 나니, 이제는 모든 게 분명해졌습니다. 혹시 누군가가 당신에게 그것을 쓰라고 암시하진 않았던가요?」
...
「그리고 누구와 이야기했습니까?」
「기자였습니다」 
「그 사람 이름이 뭐죠?」
토마스는 그제서야 이것이 신문인 것을 알았다. 그는 자기 말 한마디 한마디가 누군가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연히 기자의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부정했다. 「모릅니다.」
「자, 선생!」 남자는 거짓말을 한다는 것에 대해 크게 분개한 것처럼 보였다. 「그자가 자기 소개를 했을 거 아니오!」 다름아닌 우리의 예절바른 교양 때문에 경찰의 끄나풀이 된다 는 것은 희극이자 비극이다. 
p.214-215


토마스는 테레사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다시 베토벤을 좋아하기 시작했지만 음악에 그리 푹 빠져 있는 애호가도 아니었고. 과연 베토벤의 그 유명한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라는 테마에 얽힌 진짜 이야기를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 나는 의심이 간다.
그 이야기의 진상은 이렇다. 뎀브셔라는 사람이 베토벤에게 오십 프로링를 빚지고 있었는데, 언제나 땡전 한푼 없는 이 작곡가는 그에게 빚을 갚아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야만 하는가?>라고 불쌍한 뎀브셔는 한숨을 지었다. 베토벤은 경쾌한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래야만 한다!>라고 하면서 그는 수첩에 멜로디까지 곁들여 이 단어를 적어넣었고 이 사실적인 테마를 중심으로 4중창을 위한 소품을 작곡했다. 3명이 <그래야만 한다, 네, 네, 네> 라고 노래하고, 4번째 사람이 <네 지갑을 열어!>라고 노래하는 곡이었다.
일 년 후 이 테마가 작품번호 135 마지막 4중주 4악장의 핵심이 되었다. 베토벤은 뎀브셔의 지갑은 더 이상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래야만 한다!>라는 단어가 그에게는 운명의 신이 직접 발설한 것처럼 점차 장엄한 톤을 띠게 된 것이다. 칸트의 언어로는 <안녕>이란 말도 그럴듯하게 발음하면 형이상학적 주제와 흡사하게 될 수 있다. 독일어는 무거운 단어로 이뤄진 언어이다. 이제 <그래야만 한다!>는 더 이상 농담이 아니라 신중하게 저울질한 결정이 된 것이다.
이렇듯 베토벤은 회극적 영감을 진지한 사중주로, 농담을 형이상학적 전리로 환골탈태시킨 것이다. 이것은 가벼운 것에서 무거운 것으로의 전이(파르메니데스에 따르자면 긍정적인 것이 부정적으로 변화한 것)라는 흥미로운 예이다. 이상한 노릇은 이 환골탈태가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역으로 베토벤이 사중주의 진지함으로부터 뎀브셔의 지갑에 대한 사중창에서 보여준 가벼운 농담으로 갔다면 우리는 분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완전히 파르메니데스의 정신에 부합하게 행동할 수도 있었다.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그러니까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꿀 수도 있었다! 처음에는 (불완전한 초고 형태로서) 형이상학적 진리였지만 끝에 가서(완성된 작품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가벼운 농담이었을 수도 있었다! 다만 우리는 더 이상 파르메니데스처럼 사고할 수는 없다.
p.223-225


하지만 프라하의 유리창과 진열장 청소 회사의 싹싹한 여자 사장을 만나자 자신이 내린 결심의 결과가 불현듯 적나라하게 실체를 드러냈고, 그래서 그는 거의 공포심을 느꼈다. 그는 이 공포 속에서 새로운 직장의 처음 며칠을 보냈다. 그러나 일단 새로운 삶의 경악스런 이질감을 극복하자(일주일쯤 지난 뒤) 그는 자신이 길고 긴 휴가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어떤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는 일을 했고 그것이 멋졌다. 그는 내면적 <그래야만 한다!>에 의해 인도되지 않은 직업에 종사하며 일단 일을 끝내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사람들(그때까지 항상 동정했던 사람들)의 행복을 이해했다. 그는 한 번도 이런 행복한 무관심을 체험하지 못했다. 예전에 수술이 그가 원한 대로 성공하지 못하면, 그는 절망에 빠져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심지어는 여자에 대한 입맛을 잃기까지 했다. 그의 직업이 지닌 <그래야만 한다!>는 그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와도 같았다.
p.226


이런 질문에 한 가지 해답이 존재할까?
그리고 다시 한번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생각이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만 있는 것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결정을 비교할 수 있도록 두번째, 세번째, 혹은 네번째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지진 않는다.
개인의 삶처럼 역사도 마찬가지다. 체코인들에게 역사는 하나 뿐이다. 토마스의 인생처럼 그것도 두번째로 수정될 기회도 없이 어느 날 완료될 것이다.
1618년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분개한 보헤미아의 귀족은 중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대담하게도 그의 전권 대사 중 두 명을 라트친 창 밖으로 내던져버렸다. 이렇게 해서 체코 국민 전부를 몰살로 이끈 30년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체코인들에게는 용기보다 신중함이 필요했던가?
대답은 간단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320년 후인 1938년, 뮌헨 회의에 따라 세계는 그들의 나라를 히틀러에게 희생시킬 것을 결정했다. 그들은 숫자면에서 그들보다 여덟 배가 우세한 적군에 대항하여 싸움을 시도해야 했을까? 1618년에 했던 것과는 반대로 그들은 용기보다는 신중함을 과시했다. 그들의 타협은 결과적으로 수십 년, 혹은 수세기 동안 국가로서의 그들 자유가 결정적으로 상실되는 것으로 결판난 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초래했다. 그들에게 신중함보다 용기가 필요했을까? 그들이 무엇을 해야만 했을까?
체코의 역사가 반복될 수만 있다면, 매번 다른 가능성을 시도하여 두 가지 결과를 비교해 보는 것이 필경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이런 실험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추론은 그저 일련의 가설에 불과하다.
p.256-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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