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읽지는 않았지만, 2주 정도의 꽤 짧은 시간 동안 읽은 책이다. 한 세번 정도는 오랫 동안 읽었다. 읽는 시간이 즐거운 책이었다. 그리고 꼭 우리말로 글을 쓴 것처럼, 문장도 무척 세련되고 멋진 표현들이 좋았다.
작가의 환경과 관련된, 백인 혹은 미국과 같은 주제의 이야기가 섞여 있어서 작가의 생각을 온전히 느끼기 힘든 부분들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부분들도 마찬가지로 읽는 나의 경험과 생각으로 글을 다시 해석하고 느끼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작가보다 많이 어리기 때문에, 작가의 생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특히 나이듦과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의 생각들 말이다. 하지만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리고 나도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 서게 되는 시기가 되면 같은 생각을 하기를 바라게 되었다.
아래는, 읽으며 좋았던 부분들이다.
나이듦이 좋은 것은 무엇보다 끝자락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놀랍기 때문이다. 내 생애가 완전한 파노라마로 들어오는 것이다. 상쾌한 산들바람이 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일깨워준다. 커트 보니것의 작품 ‘자동 피아노’에서 한 등장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가장자리에서는 한가운데서 보지 못한 온갖 것을 볼 수 있다.”
돌아보건대, 나는 내게 지루함과 영감, 분노와 사랑, 고뇌와 기쁨이 왜 필요했는지 이제 알 것 같다. 어둠에 압도되는 절망의 시간 속에서조차 그 모든 것이 어떻게 어우러지는지를 알겠다. 내가 한때 탄식했던 불운도 이제는 더 커다란 직조물에 엮인 튼튼한 실처럼 보인다. 그것이 없었다면 내 생의 직조물은 지금만큼 탄탄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 단계에 다다르기 위해 조급해하느라 누리지 못한 충만함의 순간들은 이제 다시 상기되고 음미되어야 할 시간으로 떠오른다.
p.14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아는 바가 없지만 이른 아침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천국에 왔다는 걸 알 수 있을 터이다. 이렇게 믿는 데는 이유가 있는데, 지옥에서는 커피콩을 볶을 수만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확실하게 아는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신비로부터 왔고 신비로 돌아간다는 것. 또 이것도 안다. 죽음의 실체에 가까이 다가서면 삶의 선물에 눈이 뜨이며 경외감이 생긴다는 것.
…
그리고 지옥에서 볶은 커피를 천국에서 마시면서 스스로 웃음을 짓기도 했다. 영혼의 양식은 유머로 발효되지 않으면 복통을 일으킨다.
코트니에 따르면 그녀의 딸은 “세상이 즐겁게 하리라는 크고, 분별없는 기대 하나만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간다”. 16개월짜리 마야처럼, 나도 여든 줄에 들어서면서 오직 하나의 기대를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고 싶다. 세상이 나를 즐겁게 할 수 있음을 알 만큼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내 기대는 세상이 아닌 나 자신을 향해 있다. 즉, 삶의 선물을 즐기는 것 그리고 감사하는 것이다.
P.32-33
새와 나무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안다. 그들은 삶에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다. 미워시가 쓰듯이, 그들은 자신들을 예찬하며 올려다보는 이들에게 ‘친구’라고 말한다. 그들은 자연계가 무상으로 베푸는 선물을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고양되는 나 같은 사람에게 친구가 되어 준다.
미워시는 말한다. “그렇게 바라보는 이는 자기 마음을 치유하네 / 여러 질병으로부터, 자기도 모르게.” 이것은 바로 내가 여러번 경험한 바이기도 하다. 삶의 중요성을 알아차리고 그 힘으로 마음을 회복하려면, 숲이나 산속을 또는 해변을 따라 혹은 사막을 걷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 그런 곳에서는 자연의 만물이 나를 위로하고 고양시킨다. 거기서 나는 내가 “만물 가운데 하나일 뿐” 이라는 앎에 다다른다.
물론 동물과 식물은 자기들이 단지 거기에 있음으로써 우리 삶을 고양시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바로 이것이 그런 작용을 탁월하게 해낼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다! 반면에 우리 인간 종은 이 세상에서 늘 스스로를 의식한다. 우리가 어떤 결과를 겨냥해 노력을 기울일 수 있고, 올바르게 수행하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환상으로 스스로를 부추긴다.
그렇게 해서 고통스러운 세상이 펼쳐지는데, 자칫하면 “내 삶에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은 우리를 그쪽으로 몰아갈 수 있다. 내 목표가 아무리 분명하고 내 기술이 아무리 탄탄해도, 내가 종국에 누구에게 도움을 주거나 무엇에 기여했는지는 종종 모르며 알 수도 없다는 것, 이것이 진실이다.
p.36-37
나는 지금 ‘내 삶에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거나 그에 대해 답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편안하게 머문다. 내가 할 일은 여럿 가운데 하나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뿐이다. 태양 아래 서서 자신과 타인들이 생명과 사랑으로 성숙해갈 수 있도록 돕기를 희망하면서 말이다.
며칠 또는 몇 주 후에 중대한 질문이 내게 다시 떠오르고 그에 대해 내가 ‘그렇다’ ‘아니다’식으로 답을 찾으려고 허우적거린다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미워시의 시가 내게 준 것과 같은 탈옥으로 치자면, 나는 일생토록 상습범이다.
p.38-39
나이와 경험은 내게 멘토링이 일방통행로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것은 두 사람이 서로 잠재력을 일깨워주는 상호작용이다. 신학자 넬 모턴의 표현을 빌리자면, 멘토링은 “서로의 말을 듣는 것”이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으로, 멘토링은 우리의 취약함과 상호 필요를 존중하는 관계 속으로 서로를 초대하도록 기회를 열어준다. 멘토링은 멘토가 주는 만큼, 혹은 종종 더 많이, 멘티와 주고받는 선물이다.
p.58
끝으로, 저는 “매일 죽음을 눈앞에 두라”는 성 베네딕트의 말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마치 죽음을 연습하라는 말처럼 들리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건강하게 의식할 수 있다면, 삶의 위대함과 영광에 눈이 열릴 것입니다. 또한 앞서 언급한 모든 미덕과 희망, 너그러움, 감사 등 언급하지 않은 미덕까지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면밀히 들여다보지 않은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면, 마찬가지로 생기 없는 삶은 면밀히 들여다볼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자기 삶을 살아가기에 대해 상기시켜주는 작가 다이앤 애커먼의 글을 인용하면서 제 축사를 마칠까 합니다.
삶과 연애라는 위대한 일은 최대한 다채롭게 살아가는 것, 고급 순종마처럼 자기의 호기심을 가다듬고, 매일 숲이 울창하고 햇빛 쨍쨍한 언덕을 달려 올라 넘어가는 것이다. 위험부담이 없는 곳에서는 정서의 지형도 평평하고 탄력이 없다. 그리고 그 모든 차원, 계곡과 산봉우리, 우회로에도 불구하고, 삶은 길이만 있을 뿐 장엄한 지형은 전혀 없을 듯하다. 삶은 신비에서 시작되어 신비로 끝난다. 그러나 얼마나 야생적이고 아름다운 시골이 그 사이에 놓여 있는가.
p.77-78
토머스 머튼은 그 친구를 ‘참자아’라고 불렀다. 이것은 우리를 부풀리려는 에고적 자아가 아니다. 논리적이지만 땅에 발을 딛지 못한 생각들로 자질구레한 삶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맴돌고 싶어하는 지적 자아도 아니다. 이는 다른 누군가의 ‘당위성들’에 따라 살길 원하는 윤리적 자아도 아니다. 천국으로 곧장 날아가려는 영적 자아도 아니다.
참자아는 우리가 지상에 도달할 때 함께하는 자아이며, 그저 태어난 모습 그대로의 우리가 되길 원하는 자아다. 참자아는 우리가 누구이며, 삶의 생태계 내 어디에 놓여 있는지, 어떠한 ‘올바른 행동’이 우리를 위한 것일지, 그리고 어떻게 좀더 온전하게 우리 자신의 잠재성 안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옛 하시디즘 이야기가 상기시키듯, 우리의 사명은 다른 누군가의 삶의 형상이 아닌 참자아의 형상으로 사는 것이다.
랍비 수시야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세에 내가 듣게 될 질문은 ‘너는 왜 모세처럼 살지 않았는가?’가 아니다. ‘너는 왜 수시야로서 살지 않았는가?’일 것이다.
p.107-108
나이가 들수록, 직업과 소명을 명확하게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노인, 특히 남자들이 퇴직 이후 절망에 빠지는데, 이는 주요 수입원만이 아니라 (그중 많은 이가 아르바이트나 최저임금을 받는 다른 직업을 찾는다), 정체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밥벌이를 위한 직업이 있었지만,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소명, 즉 사람이 죽을 때까지 추구할 수 있는 소명이 없었다.
나의 할아버지 제시 파머는 존디어 트랙터 회사에서 일하던 전동 공구 기사였다. 예순다섯 살에 퇴직을 강요받았을 때, 기계들이 쌓여 있던 일터와 정든 동료들을 떠나기가 괴로웠다고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소명은 트랙터 부품 만들기가 아니었다. 그분의 소명은 원재료를 유용하거나 아름다운 것으로 바꾸는 일이었고, 할아버지는 퇴사 이후에도 이 열정을 이어갔다.
P.122
어떤 이들은 이런 류의 질문이 신앙에 반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우리가 우리 모순을 온전하게 의식하면서(그런 의식은 진실한 신앙의 핵심인 겸손함을 불러일으킨다) 살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과 종교 공동체 내의 모순들이 두려운 나머지 그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듯이 언행하는 것은 신앙심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영적인 삶에 모순이 없다고 믿는 것은 신앙이 없는 것보다 더 나쁩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자들이 인종차별, 여성 혐오, 동성애 혐오, 제노포비아 등의 악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도록 오만을 부추깁니다. 심지어 모든 인간 존재는 하느님의 이미지로 창조되었다고 선언하면서 말입니다.
p.135
내게 생물 다양성과 사회 다양성 간의 유사점은 명확하고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 가운데 몇 가지만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다양성은 우리 삶을 더 활기있게 한다. ‘타자성’의 잦은 경험은 똑같은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들의 끝없는 순환에서 비롯되는 권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지상에서의 안락함을 가로막는 ‘타자’에 대한 두려움도 덜어준다.
…
둘째, 다양성은 우리를 더 현명하고 창조적이게 해준다. 배경이 다른 사람들은 다른 것들을 알고, 아는 것을 다르게 해석한다. 우리가 ‘다름의 대화’안으로 모일 때, 집단은 그 안에 있는 개인들보다 더 현명해진다. 이러한 원칙은 현실적인 문제 해결에서부터 과학적 탐구, 영원한 신비에 대한 사색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적용된다.
…
셋째, 다양성은 우리 개개인에게 회복 탄력성을 증진할 기회를 부여하며, 오늘날 우리가 그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신은 알고 있다. … 2017년 대통령 취임 이후 고통스러웠던 수개월 동안, 나는 스스로 건강한 칠십세라기보다 마치 므두셀라(‘창세기’에서 969세까지 살았다고 기록된 인물)처럼 느꼈다. ‘이게 진짜일까?’ 나는 생각했다. ‘존엄성, 품위, 민주주의, 그리고 진실 그 자체에 대한 참신한 공격들에 매일 고통스러워하면서, 그로 인해 사기가 꺾이고 미국인임을 부끄럽게 여기면서, 내 인생은 이렇게 자물어가는거야?’
나는 몇몇 친구와 대화를 나누면서 회복탄력성을 되찾을 수 있었는데, 그들은 수 세대에 걸친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태어난 날부터 이러한 공격의 표적이 되어왔지만 겁먹지 않은 이들이다.
내 무슬림, 멕시코인, 그리고 아프리카계 미국인 형제자매들은 우리 모두가 실천할 수 있는 영적 연금술을 개발했다. 이는 정치적 사악함의 찌꺼기를 정치적 행동주의의 황금으로 변형시키며, 우리가 항상 그래야만 했던바 참여하는 시민이 되도록 다시 활력을 불어넣어준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영혼이 공격받을 때 그것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노력을 배가할 이유로 삼는 것을 보면 회복탄력성이 생겨난다.
넷째, 다양성은 우리가 인간 희극의 이점들을 누릴 가능성을 높인다. 문화 간 오해가 항상 파열음을 내는 것은 아니다. 그중 일부는 치유력이 있고 생명을 주는 유머를 낳는다. … 그는 내게 센터 또한 종교 간 관계의 중요성을 증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무엇보다 종교적으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직원으로 고용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다 보면 웃음이 터지고 사랑스러운 순간들이 생깁니다. 최근 우리는 본사 접수 담당자로 비유대인을 고용했습니다. 그녀에게 전화를 받을 때는 “유대인 커뮤니티 센터입니다, 샬롬”이라고 말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우연히 사무실에 있을 때 그녀는 첫 전화를 받았고, “유대인 커뮤니티 센터입니다, 샤잠(수리수리마하수리)”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이야기에 스며 있는 선의는 우리의 인간성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전선에서 이 위험한 시기로부터 우리가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북돋아준다.
p.182-187
한번은 믿을 만한 상담자이자 친구(신학자 넬 모턴의 말을 빌리자면 “말을 이끌어내는 경청”의 방법을 아는 사람)에게 내 결점 하나를 털어놓은 적이 있는데, 그때 나는 잊을 수 없는 말로 축복을 받았다. “인류가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내 친구는 내가 넘어졌다는 사실에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그 모든 이야기를 이전에도 많이 들었고, 그 자신 역시 넘어진 적이 있으며, 신학자 하워드 서먼이 “인간적 허약함”이라고 부른 것을 기꺼이 환대했다.
p.206-207
새로운 생명이 죽음 속에 숨겨져 있다는 희망적 관념은, 가을의 시각적 장관에 의해 확실하게 강화된다. 어떤 화가가 자연이 사용하는 선명하며 생생한 팔레트로 임종 장면을 그리겠는가? 죽음은 그것을 두려워하며 추하고 심지어 불쾌하게 여기는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은총을 품고 있으리라. 알다시피 파괴적일 수 있는 죽음 그 자체가 어떤 아름다움의 희망을 지니고 있다는 자연의 증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근접한 답은 앞서 인용한 토머스 머튼의 말과 함께 시작된다. “보이는 모든 것 안에 (…) 숨겨진 전체성이 있다.”
가시적인 자연계에서, 위대한 진실은 평범한 광경 속에 감춰져 있다. 쇠락과 아름다움, 어둠과 빛, 죽음과 삶은 대립물이 아니다. 이들은 ‘숨겨진 전체성’의 역설 안에서 결합된다. 역설 안에서, 대립물들은 서로를 부인하지 않으며, 현실의 중심에서 신비한 통합을 이루고, 동거하며, 함께 창조한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보면 이들은 건강을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한다. 우리의 안영이 들숨과 날숨에 달려 있듯이.
둘 다both-and의 복잡성보다 이것 아니면 저것either-or의 용이성을 선호하는 문화에서 사는 우리는 대립하는 것들을 붙들고 있느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우리는 어둠 없는 빛, 가을과 겨울이 필요 없는 봄여름의 장관, 죽음의 고통이 없는 삶의 쾌락을 원한다. 원하는 것을 얻고자 파우스트의 거래를 하지만, 그것은 결코 우리에게 진실한 생기를 주지 못하고, 역경의 시기에 우리를 지탱해주지도 못할 것이다.
p.227-228
이 책의 처음 어딘가에서 심리학자 플로리다 스콧맥스웰의 말을 인용했다. 책을 마무리하며 다시 그녀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자신을 스스로의 것으로 만들려면, 삶의 여러 사건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만 하면 된다. 자신이 어떤 존재였고 무엇을 했는지를 진정으로 소유하면 (…) 현실을 치열하게 대하게 된다.”
p.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