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가 환호한 재판장에서의 이야기
잠시 조용해진 재판장. 손을 조심스레 들고, 용기 내어 말했다.
"존경하는 판사님, 혹시 제가 한 말씀드려도 될까요?"
"말씀하세요."
처음 스스로 입을 열겠다는 발언에 판사도, 변호사도, 심지어 상대측 변호사까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저는 이제 지쳤습니다. 어린 시절 창작의 고통과 가난으로 인한 배고픔을 참아가며 혈기왕성한 젊음만으로 끝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소중한 추억이 자본주의 시장의 숫자놀음으로 덮어져 함께 하지도 않았던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현실에 마음도 아픕니다."
골방에 틀여 박혀 예술을 하겠다던 젊은 청년의 열정이 훗날 여러 사람의 입방아에 오르며 편 가르기를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기나긴 재판 기간 동안 처음으로 입을 열고나니, 감정이 벅차 마른침을 삼키고,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발언을 이어갔다.
"지금 이 시점에 분명한 것은 지난 십수 년간 피고가 원작자의 허락 없이 작품을 베껴 마케팅 활동에 활용했다는 것입니다. 피고가 수년간 진행해 온 드라마를 접목한 광고는 연간 5천억이 넘는 경제적 이익을 발생시켜 왔다고 피고 스스로도 강조해 온 사실입니다."
피고석은 물론 배심원단의 시선이 입술에 날아와 꽂히는 느낌이다.
"피고가 벌어들인 그 천문학적인 금액이 모두 제 어릴 적 소설 덕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정작 제 소설을 앗아간 당사자는 이미 이 자리에 없고, 단지 회사에 남아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이런 살얼음을 걷는 분위기를 견디며 서로 상처되는 말을 하는 상황, 그리고 한 푼이라도 보상액을 줄여보려는 피고 측의 노력도 이해가 갑니다."
피고 측을 쳐다봤다. 다들 지치고, 억울한 눈빛이 가득이다.
"판사님, 지금 어느 누구도 수년간 이어온 피고의 광고용 드라마가 표절이다를 논하고 있지 않습니다. '일부러 베꼈다', '몰라서 원작자에게 연락할 수 없었다', '드라마 마케팅으로 얻은 수익은 실제로는 얼마다' 등을 논하고 있을 뿐입니다. 결국 우리는 지금 표절은 표절이고, 그 표절의 대가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배심원들이 속닥이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그래서 돈을 내놓으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비록 30여 년이 훌쩍 지난 작품이지만 제게는 그 시절 제 20대의 전부를 걸고 썼던 소설입니다. 비록 아무런 빛도 못 보고 묻혀버린 소설이지만 누군가가 제 작품을 활용하려면 동의를 구해야 하고, 그 값을 치르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배심원석에서 수근거림이 들린다.
'돈 내놓으라는 거 맞네'
"판사님, 우리는 순수 창작물에 대한 창작자의 저작권이 무분별하게 훼손되지 않도록, 그리고 훼손된 저작권을 뒤늦게라도 정상화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비록 얼마를 주고, 얼마를 받을 것이냐로 벌써 몇 년째 첨예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지만, 본질은 창작물에 대한 권리보호임을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이곳에 모인 모두가 그 부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네,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짚어주니 좋군요. 더 하실 말씀은 없나요?"
판사는 20대의 내 모습을 그리는 중인지 그윽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처음 광고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제가 쓴 소설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제 소설이 빛을 발한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무지한 탓이죠. 수년이 지나 유능한 변호사가 저를 찾아왔고, 그렇게 시작된 소송이 이렇게까지 전 국민, 아니 전 세계의 관심을 끌 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30년 전 통신선을 몇 번 타보지도 못한 한 20대 청년의 인터넷 소설은 이제야 진짜 유명세를 타고 있습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는 옆자리 변호사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저는 지금 불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속이 후련하고, 정년을 앞둔 직장인이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는 것 같아 희망도 품게 됩니다. 어릴 적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한 글자씩 써냈던 웹소설을 다시 시작해 볼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름 열심히 살아온 덕분에 경제적으로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피고 쪽을 향해 눈을 부릅뜨며 한 문장을 더했다.
"물론,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만요."
피고 측이 움찔하는 모습이다.
"피고분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피고가 제 소설을 무단으로 베껴 마케팅을 한 대가로 2천억 원을 제게 주실 차례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천문학적인 금액을 서로가 윈윈 할 수 있는 곳에 쓰는 것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피고인 전부는 당황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허둥지둥했다. 그리고 이내 대표자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 결론이 다 난 상황에서 저희를 배려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떤 제안일지 들어보고 싶은데,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조금은 안도하는 눈빛으로 대화를 청하는 피고 측 대표의 목소리는 한결 부드럽고 묵직했다.
"제가 받을 2천억 원을 귀하의 회사에 재투자하고 싶습니다."
배심원들의 수근거리는 소리가 사라졌고, 불편한 적막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 돈으로 자라나는 새싹들을 키우는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아마도 저보다는 대표님께서 기업측면에서 관리해 주심이 어떠실까요? 제가 그 돈을 다 투자한다고 해도 기업에서 관리하는 편이 훨씬 전문적이고, 좋은 인재들을 많이 배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재단을 설립하자는 말씀이신가요?"
탕탕탕. 판사는 망치를 두드렸다.
"본 재판과 무관한 이야기이며, 이 얘기는 나중에 따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원고 측의 생각은 잘 알았습니다. 본질을 다시 꺼내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 모두를 일깨워준 것 같습니다. 이 외에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실까요?"
판사는 대화를 끊었지만,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피고가 악의 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비록 재판 과정에서는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바람에 이미지에 타격을 입었지만, 최근 알려진 것처럼 정말로 나쁜 회사라 생각지는 않습니다. 일부러 공개석상에서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냥 이대로 끝내면 다시는 만나 뵙기 힘들 테니까요."
"말씀하세요."
다행히 재판이 끝난 판사는 너그러웠다.
"창작물에 대한 국민의식을 함양하고 아이디어가 가득한 청년들에게 고루 기회를 줄 수 있는 방안을 차차 얘기했으면 좋겠습니다. 저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 생각하기에 전문적인 조직의 관점에서 좋은 방안을 고민해 주시고,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피고인 대표는 잠시의 망설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선생님의 뜻에 따르도록 하겠고,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지 진지하게 고민하여 답하도록 하겠습니다. 더불어 그간 치졸하게 대응하여 선생님을 비롯해 사회에도 물의를 일으킨 점 깊이 사죄드립니다."
양쪽으로 갈라서 첨예한 긴장감이 흐르던 재판장에는 경계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배심원들은 손뼉 쳤고, 카메라 플래시는 미러볼 마냥 끝이 없이 번쩍이고 있었다.
"자, 진정들 하십시오. 오늘 재판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양 측이 협력하여 좋은 결과를 이끌어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소식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이상."
'탕탕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