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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황 Jul 10. 2022

환경친화적인 과소비

시니컬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

시니콜콜한(시니컬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비정기적으로 써가는 중입니다. 불만보따리를 보러 와주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

https://brunch.co.kr/magazine/cynicalbasic




이직을 한지 이제 1년 조금 넘었습니다. 1년 동안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혹은 이직 소식을 지인에게 전할 때 한 번씩 건네던 명함을 다 소진했고, 총무사이트를 통해 새로 신청을 했습니다. 새로 받은 명함은 처음 받았던 명함과 조금 달라져 있었습니다. 재활용 용지로 제작되어 환경 친화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명함이었습니다. 그렇게 검정색 점박이가 군데군데 찍혀있는 재생용지로 된 명함 두 박스가 제 자리에 놓였습니다.


이전 직정에서는 신규사업 기획과 함께 B2B 영업을 맡았었습니다. 명함을 쓸 일이 많았고, 한번 신청할 때 최소 두 박스, 많으면 네 박스씩도 신청하곤 했습니다. 그마저도 금방 소진되어 한번에 많이 신청할까 고민도 했지만, 조직개편이 나면 버려지는 명함들이 아까워 필요한 만큼만 건건이 주문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직장에서의 새로운 직무는 상대적으로 외부인을 만날 일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책상에 놓인 고작 두 박스의 명함을 보며 '이걸 언제 다 쓰려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번 신청할 때 두 박스씩 주는 것은 그만큼 일을 열심히 하라는 의미겠지요? 일하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해주려는 회사차원에서의 배려일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배려가 재생용지로 제작된 명함 두 박스와 겹쳐져 살짝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환경 용지를 과다하게 사용하면, 그게 과연 친환경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회사원의 얼굴, 회사원으로서의 '나'를 가장 쉽게, 분명하게, 빠르게 알릴 수 있는 명함이 두 박스나 놓인 제 책상은 정말 바쁘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책상 같습니다. 게다가 그 모든 명함이 재생용지로 제작되어 환경을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종종 친환경이라는 단어로 포장되는 많은 제품들에 대한 의구심이 들곤 합니다.


폐그물을 활용해 만든 친환경 플라스틱이 해양쓰레기를 처리하는 훌륭한 수단일 수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더 많은 이산화탄소가 배출될지도 모릅니다. 현수막을 재활용한 가방을 만들어 쓰레기를 줄일 수는 있지만, 그 가방이 대체하는 다른 가방은 새로운 쓰레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기술적인 발전과 활용도를 물색하는 과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하나, 소비자가 자연친화적인 매와 용을 했을 때 진정한 환경보호가 완성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 명함을 받은지 나흘 정도 지나고, 제 책상 위에는 또 새로운 두 박스의 명함이 놓였습니다. 이번에는 신청을 하지도 않았는데 배송된 명함 두 박스입니다. 아무래도 전산 상의 오류이거나 담당자의 실수였을 것 같습니다. 검은색 알갱이가 알알이 박힌 재생용지로 만들어진 명함이 이제 네 박스가 되었습니다. 아주 많이 풍족하게 일하라는 회사의 배려일까요?


재생용지로 만들어진 명함을 건네면 환경친화적인 기업이라는 이미지와 환경을 사랑하는 직장인이라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명함이 네 박스나 쌓인 제 책상은 살짝 감추어두려 합니다. 환경을 아끼는 이미지까지는 좋지만, 친환경을 과다하게 소비하는 사람으로 보여지고 싶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어쩌다보니 재생용지 명함이 네 통이나 생겨버린 이 날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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