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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성지 Jan 09. 2017

9/11 메모리얼 (파트 1/2)

뉴욕이 상처와 아픔을 보듬어 안는 법


2001년 9월 11일 세계 무역 센터 테러 사건. 


전 세계를 경악시키며 세계사를 흔들어 놓았던 이 사건이 일어난 지도 어느덧 16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이 사건은 많은 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이다. 뉴욕에 3대째 살고 있다는 한 할머니는, 2001년 이후로 이 지역 일대에 차마 발걸음을 돌릴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 아픔을 어루만지기 위해서 만들어진 국립 9/11 테러 기념관 & 박물관은 이제 매해 약 400만 명의 방문객들이 찾는 뉴욕의 필수 방문 코스가 되었다.


이 글은 총 2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편에서는 인공 폭포로 이루어진 기념관 공원을 다루고, 2편에서는 박물관과 주변 건축들을 다룹니다.


9/11 메모리얼에는 쌍둥이 빌딩이 서 있던 곳에 두 개의 폭포가 있다. 사진은 남쪽 풀(South Pool).


인공 폭포의 이름 – 부재의 반추 (ReflectingAbsence)


9/11 기념관은 2001년 9월 11일에 무너져 내린 세계 무역 센터(World Trade Center) 건물 2개가 나란히 있던 자리에 새로운 건물을 짓지 않고 오히려 그 공간에다가 인공 폭포를 조성함으로써 완성되었다. 


2개의 인공 폭포는 각각 북쪽 풀(North Pool)과 남쪽 풀(South Pool)로 나누어진다.



이 두 개의 풀이 있는 전체 공간의 이름은 ‘부재의 반추(Reflecting Absence)’이다. 


말 그대로 한 순간에 목숨을 잃은 3,000여 명의 희생자들이 떠나간 자리, 그 빈 곳을 돌아본다는 의미다. 사건이 일어난 지 13년이 지난 2014년에 개장했으며 지상에서 30피트(9.1 미터) 아래로 물이 떨어지게 고안된, 미국 최대 면적의 인공 폭포다.



재개발 부지의 반을 공원으로 


세계 무역 센터가 원래 들어서 있던 자리에 이 정도 크기의 추모 공원이 들어선다는 점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무엇보다 이 지역은 뉴욕에서도 가장 부지가 비싸기로 유명한 로어 맨해튼(Lower Manhattan)으로 주위에 포천(Fortune) 100대 기업들이 포진해 있으며, 세계 금융의 중심지 월 스트리트(Wall Street)를 연해있다. 재건해야 할 총면적은 약 16 에이커(약 2만 평) 였는데, 당시 이 땅의 공동 소유주는 유대인계 부동산 재벌 래리 실버슈타인(Larry Silverstein)과 '뉴욕/뉴저지 항만청(Port Authority of NY/NJ)'이었다. 


실버슈타인은 9/11 테러 사건이 일어나기 불과 7주 전에 무려 99년 장기 임대 조건으로 세계 무역 센터를 구매했는데, 구매 후 7주 만에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음모론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공동 소유주인 실버슈타인의 입장에서는 이 사건은 국가 재난으로 인한 막대한 손실이었다.


그가 소유한 상업 빌딩들이 테러로 무너져 내렸기에 이를 당연히 회복하는 게 급선무였는데, 이 사건으로 인한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16 에이커 중 무려 50%에 해당하는 8 에이커의 공간에 추모 공원을 설립하기로 결정한다.


여담으로 ‘테러’가 보험 처리됨에 따라 실버슈타인은 천문학적인 보험금을 받을 수 있었다.

문제는 이 사건을 하나의 사건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두 개의 사건으로 볼 것이냐의 여부였다. 사건 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보상받을 금액이 수조 원대를 오갔기 때문이다. 

실버슈타인: 비행기 두 대가 각각 건물에 부딪혔기 때문에 두 개의 별개 사건이다 <-> 보험회사: 계획에 따라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을 뿐, 이는 하나의 사건이다

이 두 주장은 매우 팽팽해서 초미의 관심사였는데, 오늘날에도 이 사건이 정확히 어떻게 해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된 부분이 없다.



5201:1의 경쟁을 이긴 침묵의 디자인


8 에이커가 되는 부지에 추모하는 공원을 설립하기 위해 국제 공모전을 열었는데, 이때 혜성처럼 마이클 아라드(Michael Arad)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마이클 아라드가 이 국제 공모전에서 우승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는 만 34세에 지나지 않은 ‘초짜 건축가’였다. 심지어 그는 이스라엘 출신으로 뉴욕에 거주한 지 약 4년밖에 되지 않았으며, 외국인으로 미국에서 언제 추방을 당할지 모른 체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그가 무려 5201:1의 경쟁률을 뚫고 9/11 기념관의 디자인을 책임지게 되면서, 30대 초반의 신예 건축가는 뉴욕에서 가장 어려운 디자인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의 디자인은 제출된 그 어떤 디자인 안들보다도 무거웠고, 매우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심사 위원 측도 ‘너무 무겁다’라는 이유로 채택하는 걸 고심했을 정도였는데 그의 디자인이 5,000대의 경쟁률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심사위원 중 한 명이 바로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관(The Vietnam Veterans Memorial)’으로도 유명한 마야 린(Maya Lin)이었기 때문이다.


마야 린 (Maya Lin)

마야 린은 여러모로 아라드와 닮은 구석이 많다. 

예일대 건축학과에 재학 당시, 불과 21살의 나이로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관 공모전에 도전해서 무려 1,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미국 근대사에 이정표가 될 건축 디자인을 담당했다.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관은 오늘에도 매해 약 370만 명의 방문객들이 찾는 워싱턴 DC 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다.



채우는 공간이 아닌, 비우는 공간


아라드의 디자인에서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바로 ‘물’을 사용한 부분이다. 


사실 사진으로만 이 공원의 모습을 처음 봤을 때에는 물소리가 너무 시끄럽지는 않을지, 그리고 과연 이 공간이 ‘추모’의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을지 궁금했었다. 그런데 실제로 가보니 오히려 잔잔한 물소리는 주변 거리의 부산함과 소음을 가라앉히는 효과를 주었고, 생각보다 많은 방문객들이 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천천히 바라 보고 있었다.


특히 일반적인 폭포와는 달리, 이 인공폭포는 아주 일정한 간격으로 물줄기가 배치되어서 동일한 양의 물이 정확한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물이 떨어지는 모양과 양까지 설계를 했는데, 분당 약 10만 리터(26,000갤런)의 물이 떨어지며, 가까이서 살펴보면 물이 방울 방울져서 떨어지는 모습도 볼 수가 있다. 


아래 지반으로 떨어진 물은 이내 가운데에 위치한 정사각형의 구멍으로 흘러들어간다. 


이 구멍에는 또다시 30피트(9.1미터)에 달하는 2번째 폭포가 있는데, 방문객의 시야에서는 바닥이 보이지 않아서 마치 끝이 없는 심연으로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건축 전문 사이트 Archdaily에서는 이를 두고 ‘뉴욕이라는 도시의 정수가 담긴 기반(Bedrock)까지 물이 흘러가는 모습’이라고 표현했다.



유족들의 바람이 빠짐없이 반영된 3,000여 명의 비석


폭포를 둘러싼 난간도 많은 고민과 생각이 담겨 있다.


난간은 동판으로 만들어졌는데, 사선으로 기울어진 채 방문객들에게는 난간의 역할이자, 유족들에게는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겨 넣은 비석의 역할을 한다.


그 위에는 9/11가 발생하기 훨씬 이전인 1993년 6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계 무역 센터 지하 주차장 테러 사건’의 희생자들을 포함해서, 9/11 사건의 희생자까지 총 2,98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특히 이 이름을 넣는 부분에서 아라드는 매우 고심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할 때 ‘알파벳 순서’대로 희생자들의 목록을 넣을 수 있지만, 희생자들 목록 중에 우연히 동명이인이 있었고 아라드는 똑같은 이름을 ‘바로 옆에다 두는 건 시각적으로나 감성적으로도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무작위 방식으로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기거나, 시차 순을 따른다거나, 앉았던 자리, 혹은 층수에 따라서 이름을 새기는 방식도 검토되었지만 이내 폐기되었다. 이러한 방식들을 사용할 경우 이름의 위치를 두고 의도치 않은 위계가 생기거나, 반대로 혼란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이름을 어떤 방식으로 배치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데에만 무려 3년의 세월이 걸렸다. 


아라드의 회고에 의하면 처음 2년 동안은 모든 대화가 ‘이름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에 있었다. 심지어 프로젝트의 진행 및 추가 자금 확보 등도 미뤄둔 채 모두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골머리를 앓았다.



결국, 아라드는 ‘의미 있는 이웃들(Meaningful Adjacencies)’이라는 개념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유족들에게 편지를 부쳐서 ‘의미 있는 이웃들’의 목록을 적어달라고 부탁을 하며, ‘희생자의 이름 옆에 누가 있어야 하나요?’의 질문을 던졌다. 유족들의 요구 사항은 참 다양했는데, 희생자 이름 옆에 있어야 할 사람들로 친한 친구, 직장 동료뿐 아니라 생의 마지막을 함께 한 사람들 (핸드폰 등을 통해서 유족들이 희생자 옆에 누가 있었는지 알게 된 경우) 등을 적어서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라드는 유족들로부터 1,200건의 ‘의미 있는 이웃들 목록들’을 받는다. 그리고 그는 이 많은 요청을 단 한 건도 빠트리지 않고 모두 다 수용하기로 작정한다.


처음에는 인덱스카드 등을 사용해서 1,200건의 요청을 모두 다 수용하려고 했지만 이내 한계에 부딪혔다. 그러자 아예 컴퓨터 프로그래머를 고용해 이 문제를 풀기 위한 알고리즘을 만들었는데, 단순히 여기서 그치지 않고 3,000여 개의 이름들을 시각적으로도 아름답게 배열하기 위해서 수학 공식까지 사용했다. 


결국 1년을 추가로 투자함으로, 총 3년의 기간 동안 3,000여 명에 달하는 희생자 이름은 단 한 명의 유족도 실망하게 하거나 상처받지 않는 방향으로 정확하게 유족들이 원하는 곳에 배치될 수 있었다.



뉴욕의 역사가 된 9/11 기념관


이렇듯 천문학적인 비용과 오랜 시간을 걸쳐서 9/11 기념관이 개관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념관은 적지 않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특히 뉴욕의 한 건축 비평가는 "짧은 바지와 슬리퍼를 신고 희생자들의 동판을 둘러보는 곳은 경건하지 않다"고도 말했다. 또 이 두 개의 ‘인공폭포’를 만드는데 들어간 돈이 6천억이 된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빌딩의 숲 맨해튼에 뉴욕의 아픔을 애도하는 공원이 들어선 것 자체는 매우 긍정적이라 생각된다.


특히 마이클 아라드의 인공 폭포 ‘부재의 반추’ 작품은 시민들이 이 자리에 오게끔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는데 그 힘의 원천은 다름 아닌 이 공간에 담긴 세심함과 고민과 배려이다. 이 공간에 오는 모든 이들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한 마음으로 동판에 새겨진 이름에 눈길을 주고, 또 쏟아지는 폭포 사이로 이 사건에 대해 단 몇 초라도 생각할 수 있다면, 이미 이 공간은 충분히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아라드는 이 공간이 ‘삶과 죽음의 공간이라고 표현했다. 


죽은 이들을 기리는 공간임과 동시에 지금도 부단히 일상을 살아가는 회사원들이 점심을 먹으러 올 수도 있는 곳이라고 덧붙이며 말이다. 이렇듯 사람들의 무관심, 혹은 호기심 사이에서도, 묵묵히 물길을 흘려보내는 9/11 기념관은 뉴욕의 아픈, 그러나 결코 잊을 수 없는 역사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리의 과거 또한 그러하듯.




추가 정보를 얻고 싶다면


9/11 메모리얼 웹사이트 – 9/11 Memorial


이 시리즈에 대하여


<뉴욕 건축을 만나다>는총 15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뉴욕 곳곳의 공간에 담긴 사랑, 열정, 상상, 그리고 영감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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