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마음속 한 구석에서는 특별해지고 싶어 한다. 모두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자기도 별반 다르지 않게 평범하게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속에는 특별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들어 있다. 거기까지는 아무 문제없다. 누구나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하지만 '나는 특별하고 너희들은 비슷하다.'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오만이라고 부른다. 교만 또는 자만이라는 표현도 비슷하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가복음 14:11)
신기한 점은 '나는 너와 달라'까지는 어느 정도 수용이 되지만 '나는 너희들과 달라'는 쉽사리 수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 모두는 각자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고 있지만, 한 개인만이 다른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왜? 그러면 그것을 인정하는 '나'는 필연적으로 상대적으로 낮게 위치되어야 하니까. 나를 낮추기란 매우 고통스럽고 어렵고, 무엇보다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태복음 23:12)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는 특별한 자격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타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 특히 공적 발화는 말하는 이에게 자격을 요구한다. 이것은 순전히 '말'에 대한 이야기이다. 기술은 다른 측면이 있다. 가시적이고 직접적으로 그 과정과 결과를 관찰할 수 있는 기술과 능력은 '자격'의 증명이 용이하다. 문제는 '어떤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대체 누구인가에 대한 것이다. 가족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다. 지음(知音)은 많은 것을 알 수 있지만 대신 말해 줄 수는 없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아는 것과 말하는 것은 다르다. 즉 '말'이라는 것은 자신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이다. '말'은 듣는 이, 읽는 이가 있을 때 비로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믿음이 그토록 멀리 퍼진 이유는 그가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 아닐까. 말할 자격? 예수는 자기 스스로를 버려가면서까지 자신의 말을 살렸다. 이렇게 보면 말이라는 것은 진정성을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그 힘을 발휘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정도까지의 진정성인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래서 말을 조심하라고 하는가 보다. 그래서 말을 줄이라고 하는가 보다.나의 진심이 탄로나지 않게.
자기 자신이 목숨을 걸 만큼 확신하는 진심을 찾아내기는 매우 어렵다. 스스로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자기기만의 알을 깨고 밖으로 나오는 일만큼 힘겨운 일은 없다. 나의 알을 깬다는 것은 나를 지키는 생각들을 부수는 것이니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고 두려움을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낮추게 되기도 한다. 방금 깨고 나온 알을 바라보며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밖의 또 다른 알을 마주하게 된다.
나를 어디까지 깨고 내려갈 것이냐. 얼마나 솔직하게 수많은 자기기만을 마주하고 나를 깨나 갈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