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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성준 Jun 21. 2023

뉴욕은 100년 전 소도축장, 의류공장, 조선소였다.

뉴욕시는 미국 최대 제조업 도시에서 서비스업 글로벌 허브로 변화

구글은 금융 위기 직후 뉴욕 맨해튼에서 초대형 빌딩 중 하나인 111 8th Ave 건물을 2010년 2조 3천억 원에 구입했다. 이 구글 빌딩은 1973년 Realopco 주식회사가 Port Authority로부터 $24M (300억 원)에 구입하여 수차례 리모델링을 통해 구글의 오피스가 되었다. 빌딩 가격으로 보면 37년 만에 무려 75배가 올랐다. 예전 나비스코 공장에 만들어진 첼시 마켓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구글 빌딩은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빌딩으로 4면이 도로로 둘러싸인 블록 전체를 다 쓰고 있다. 연면적이 8만 평으로 뉴욕의 아이콘인 엠파어스테이츠 빌딩보다 크다.

뉴욕 구글 빌딩 전경


이 빌딩이 있는 지역은 미트 패킹 지역으로 맨해튼 첼시 바로 밑에 위치한 매우 핫한 지역이다. 특히 예전 고가 철도를 개조한 하이라인 공원으로 맨해튼의 주요 관광지가 되었다. 그러나 불과 100년 전만 해도 250개가 넘는 도축업소들이 모여 있는 육가공 지역이었다. 아래의 사진에서 보듯이 수천 명이 사람들이 매우 분주하게 일했다. 왼쪽 위에 보이는 창문이 없는 건물은 1898년 영업을 시작한 맨해튼 냉동 회사로 이 지역의 대표적인 육류 냉동 창고였다.

맨하탄 냉동 회사 앞 전경 Mahattan Refrigerating Company

정육공장에서 처리된 소 돼지 등 각종 고기들은 도축, 분류, 재가공되었고 연결된 고가 철도를 통해 미국 동부 각 지역으로 배송하였다. 서울의 마장동 같은 곳이라 생각하면 된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이 당시 살아 있는 소들을 바지선 배에 태워 뉴저지에서 현재 39번가 컨벤션 센터인 자빗츠 센터 Javits Center 근처에서 소들을 내렸다. 지금 하이라인 공원으로 쓰이는 고가 철도는 1939년에 개통했는데 승객은 타지 않았고 화물 특히 육류를 주로 운송했다. 1950년대 전성기 시절에는 3,000명이 넘는 도축업자 및 도매업자들이 일했다고 한다. 피터 루거 Peter Luger 같은 뉴욕 스테이크 하우스가 유명한 이유 중 하나는 이렇게 신선한 고기들을 공급하는 육가공업체들이 뉴욕 맨해튼에 몰려있었기 때문이다.

DeDelmonico's, Meat House, 출처: The Museum of the City of New York

그러다 1960년대 전국적인 슈퍼마켓 체인의 확산, 냉장 수송 트럭의 등장으로 이 지역은 쇠퇴하기 시작하여 1980년대엔 마약과 매춘의 소굴로 전락하였다. 1990년대부터 재개발이 이루어져 하이엔드 부티끄 숍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여 지금은 최고의 핫한 지역으로 패션숍, 갤러리, 럭셔리 호텔, 식당들이 즐비하다. 지금은 맨해튼의 젊은 세대들이 제일 선호하는 지역이 되었다. 휘트니 미국 미술관, 첼시 마켓, 애플 스토어, 테슬라 매장 등 유명 브랜드 숍들이 모여 있다. 젊은 엔지니어들을 모셔와야 하는 구글이 이 빌딩을 구입하게 된 배경이다.


이렇게 소도축장에서 IT연구소로 변화된 구글 빌딩은 지난 100년간의 맨해튼의 일자리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 100년 전만 해도 뉴욕은 세계 최대 제조업 중심의 도시 중 하나였다. 뉴욕시는 전체 미국 생산량의 12분의 1을 생산했으며 200개가 넘는 뉴욕 해운 물류 업체들이 미국 해외 무역 물동량의 절반 가까이를 수송하였다. 뉴욕 일자리의 31%가 제조업이었고 36%가 무역 물류업이었다. 사무직종은 13% 밖에 되지 않았다.

(출처: https://blogs.ancestry.com/cm/what-was-life-like-in-nyc-in-the-roaring-twenties/)


2차 세계 대전 당시 세계적으로 제일 큰 조선소 중 하나가 뉴욕시 브루클린 (Brooklyn Navy Yard)에 있었다. 당시 43만 6천 평 부지에 7만 5천 명이 수십 척의 군함을 건조했고, 수백 척의 배들을 수리 및 개조했었다. 세계 최대 조선소인 현대중공업 울산 조선소가 220만 평에 호황시절인 2009년 기준 2만 6천 명이 일했다. 즉 뉴욕시 조선소에서 울산 조선소보다 3배 더 많은 인원이 일을 했었다. 그것도 남자들은 군대로 상당수 전장에 보내져 여성들도 용접 등 험한 일들을 맡게 되었다.

2차세계 대전 당시 Brooklyn Navy Yard 전경

아래 지도는 1919년 맨해튼 인근의 제조업 산업별 지역을 나타낸다. 빨간색은 여성 의류 공장들이고 파란색은 남성 의류 공장들이다.  맨해튼 미드타운 및 대부분 도심 중심 지역들에서 의류 공장들이 밀집해 있었다. 100년 전 1920년대에만 해도 대부분의 인구가 맨해튼과 브루클린에 거주했고 그랜드 센트럴역, 펜스테이션역 같은 철도와 지하철 중심으로 교통이 이루어져 공장들이 맨해튼 및 브루클린 도심 지역에 많았다.

지도 출처: https://www.bloomberg.com/news/articles/2016-12-09/the-manufacturing-industries-map-of-new-york-in-1919


특히 뉴욕시는 미국 전체 여성복 제조의 71.7%를 차지하였다. 8,000여 개 공장에서 17만 명이 종사하였다.  1920년 맨해튼 인구가 228만 명임을 감안하면 일하는 사람의 5명 중 한 명이 여성복 제조에 일을 했다. 맨해튼 인구 중 외국 출생 인구가 40%에 달했는데 특히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동유럽 출신들이 의류 제조업에서 많이 일했다. 특히 러시아 출신 유대인들은 의류 사업에 수완을 발휘하여 사업을 많이 키웠다. 맨해튼 차이나 타운과 붙어 있는 리틀이탈리아는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들이 많이 살던 곳이었다. 지금은 의류 제조는 대부분이 아웃소싱되어 중국 인도 등 개발도상국으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쇼룸, 디자인, 패션쇼 등 제조 이외의 활동으로 뉴욕은 세계의 패션 중심지로 연간 10조 원 이상 매출을 내는 글로벌 패션 도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캘빈클라인, 도나 카란 같은 브랜드들이 뉴욕에서 탄생한 배경이다. 지금도 맨해튼 남쪽 타임스퀘어 서쪽 지역을 의류 지역 (Garment District)이라 부른다.


의류제조업 이외에도 상당수 제조업 산업에서 뉴욕의 비중은 압도적이었다. 보석 세공업 (Lapidary work)은 미국 전체의 90%가 뉴욕시에서 생산되었다. 담배도 뉴욕시 생산 비중이 80%를 넘었다. 미용용품 제조업 비중도 70%가 넘었다. 장난감 및 게임도 3개 중 하나는 뉴욕시에서 생산되었다. 그러나 현재 2022년 말 기준 뉴욕 근로자 중 제조업에 일하는 사람은 2.6%밖에 되지 않는다.  즉 100년간 뉴욕시 제조업 일자리 비중이 84%가량 감소하였다.

100년 전 뉴욕시 주요 산업 생산 비중

현재 뉴욕시의 가장 큰 산업은 교육과 의료 서비스가 22.7%, 전문 비즈니스 서비스가 16.5%를 차지한다. 무역 물류업 비중은 100년 전 36%에서 16.2%로 줄어들었다. 금융업은 9% 정도 된다. 100년 전 13%밖에 되지 않았던 사무직종이 여러 가지 서비스업으로 발전하며 뉴욕시의 대부분 일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 세계에서 제조업에서 서비스 중심 도시로 가장 드라마틱하게 변화한 곳이 뉴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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