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암 진단을 받으시고 수술한 지 5년이 되었다. 완치 판정만을 기다리는 와중에 오른쪽 폐로 전이가 되었단다. 그토록 힘들었던 항암치료를 다시 받으셔야 하고, 어머니의 검사 결과 상 별 다른 치료 방법은 없다는 뜻으로 밖에는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식들은 마음이 급해졌다. 아주버님은 다른 방도를 물색하시다 임상실험 등 폐암에 저명한 분을 찾았다. 다행히 바로 다음날로 예약이 잡혔고, 나는 급하게 이전 병원에서 어머니의 진료기록과 영상자료 CD를 받으러 갔다.
가기 전 필요 서류를 준비했다. 환자의 동의를 받은 경우 “환자의 배우자, 직계 존속·비속 또는 배우자의 직계 존속”은 동의서와 가족관계증명서, 환자의 신분증 사본과 신청자의 신분증이 있으면 발급이 되었다. 그런데 주의하라는 표시(당구장 표시)로 이런 문구가 보였다.
“형제자매, 사위, 며느리는 직계가족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 며느리는 직계가 아니었다. 당연히 가족관계증명서만 있으면 며느리도 가족이니 이깟 서류쯤이야 쉽게 발급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제 3자 며느리는 ‘환자가 지정하는 대리인’으로 위임장이 추가로 필요했다. 편찮으신 어머니께 신분증과 기타 서류를 부탁해야 했고, 늦은 시간에서야 병원에 도착해 필요한 서류들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다음날 자료를 들고 예약되어 있는 병원에 갔다. 이번에는 조직검사를 했던 염색 슬라이드와 비염색 슬라이드가 필요하다. 다시 이전 병원에 전화하니 이번에도 꼭 직계가 와야만 한단다. 며느리가 위임장을 가지고 오더라도 상담에 제한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욕이 나올 뻔했다. 힘들게 이전 병원 의사와 진료예약을 잡고 남편에게 연차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왜? 며느리는 안 될까? 버젓이 가족관계증명서가 가족임을 증명하고 있는데 말이다. 괜히 심통이 났다. 그렇게 속으로 투덜대다가 갑자기 뭔가가 떠올랐다. 막장 드라마.
꼭 막장이 아니더라도 드라마 속에서 시댁의 재산을 가로채려거나 자신의 아이가 남편의 친자가 아닌 것을 들킬까 봐 유전자 검사를 조작하거나 검사지를 빼돌리는 장면을 여러 번 본 듯하다. 며느리가 다 그런 것도 아닌데. 드라마를 떠올리며 잠시 심통을 삭혔다.
그런데 말이다. 직계 가족은 그럼 다 자신의 가족에게 해가 되는 일을 저지르지 않느냔 말이다. 며느리, 사위, 형제, 자매는 모 다 그런 일을 저지르냔 말이다. 구태여 극과 극을 대면서 논리적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좀 씁쓸하다. 어머니의 건강을 걱정하고 어머니를 생각하며 주어진 임무를 다 하고 싶은 마음은 자식이나 며느리나 같은데 말이다.
이 와중에 우리 어머니는 며느리의 통장으로 돈을 보내셨다. 0의 개수를 세보고는 놀라서 전화를 드렸다. 우리 며느리들에게 너무 고마워서 보냈다고 하시는데 괜스레 서운했다. 자식에게 신세지는 것이 싫어서 당신이 해야 할 몫과 자식이 해야 할 몫에 꼭 선을 그으시는 분인걸 안다. 다정다감한 성격이 못되셔서 이렇게라도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려 하셨다는 것도 안다. 어머니가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훨씬 적은 돈이라는 것도 안다. 하니만 이렇게 통장에 들어온 돈을 보니 마음 한 편이 울컥했다. 또 할 말을 해야 하는 이 작은 며느리는 굳이 어머니께 전화했다.
“어머니, 서운해요. 무슨 요양보호사한테 비용 지불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어머니 마음은 이해해요. 저희에게 고마우시면 식사 잘하시고 기운 차리셔서 앞으로 치료 힘내서 잘 받아봐요. 그리고 저번에 약속한 데로 우리 여자들끼리 놀러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