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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빛 Mar 04. 2022

1920년대 '분노의 포도' 그 시절의 최저시급

오찬호 경향신문 오피니언 '더 힘들게 일할 자유 주겠다?'와 함께

최저시급을 챙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오찬호 작가는 <진격의 대학교>에서 소개했다. 어느 지방대, 교내 편의점에서 '최저임금 준수'라면서 구인광고를 하는 걸 보고 당연한 걸 대단한 것처럼 표기한 게 의아해 학생에게 물어보고서야, 그곳에서는 최저임금을 잘 주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파악했다.

이러한 사실들을 보며, 가상으로 희망 최저임금이라는 최저임금 경매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사회를 보여준다.


'이른 새벽, 인력사무소에서 사람들이 앉아 있다. 오늘만이라도 일용직 노동자가 되길 희망하는 이들이다. 잠시 후 건설현장의 관리자라는 사람이 방문하여 단순직 희망자를 찾는다며 말한다. "자, 최저임금 9160원부터 시작하죠. 네, 9100원 나왔네요. 아, 8500원 손 드셨습니다. 이제 없습니까? 하나, 둘, 아! 7900원? 어? 6900원 나왔습니다. 대박입니다. 마감합니다. 낙찰자는 봉고차에 타세요."'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가 생각난다. 주인공 가족이 털털이 트럭에 온 가재도구와 살림살이를 싣고 트랙터에 뺏겨버린 중부 곡창지대를 떠나 오렌지와 포도가 유명한 캘리포니아로 온다. 이주민들의 거주지는 부랑자 집단처럼 현지인들의 감시를 받으며, 서부인들이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고 하루 벌어 하루를 살고 있다.

노동 날품을 파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품삯이 떨어졌다. 하기싫으면 하지마라는 지주의 말에 대항할 사람들이 없다. 하루 종일 고된 노동을 하고 받아가는 돈은 아이들에게 그날그날의 빵도 제대로 먹일  없을 지경이다. 가족들이 배고픔을 겪고 소외되는 장면들은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지 보여준다.

세상이 좋아지는 쪽으로 진보한다고만 볼 수는 없다는 걸 알지만, 과학과 기술의 발전과 함께 인간에게 여유가 생기면서 한 단계 더 나아진 것은 분명한데

이제는 조그마한 여유라도 나눌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그 여유를 나누지 못하는 마음들이 지옥의 처음과 끝일지 모르겠다.


지난겨울에 읽었던 신문 한 귀퉁이 글에 적은 감상을 이제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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