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친구 별명이 '된장파리' 된 썰
민병식
초등학교시절 나는 마을에서도 알아주는 개구쟁이였다. 농촌마을이었던 고향은 경기도 연천, 휴전선 근방에 있는 지역으로 직업군인 가족도 많았고,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베이비 붐 세대여서 한 가정에 자녀가 네, 다섯은은 보통이었다. 지금은 국가 유지에 위험이 될정도로 출산율이 낮아 아이 좀 낳으라고 낳아달라고 읍소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1970년대는 '둘만 나아 잘 기르자' 는 산아 제한 표어가 어디서든 보일 정도로 마을에 아이 들이 많았고, 당연히 농촌 경제가 중심이었으므로 학교 수업이 끝나면 부모님의 농사일을 돕거나 소 여물을 베러가는 친구 들이 많았고 집에서 땔나무 담당으로 매일 산에 가는 친구 들까지 있었다. 그때만해도 당연히 Pc나 휴대폰은 생겨날지도 몰랐었으니 놀이는 자연에서 얻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봄이면 냉이를 캐러다니고 아카시아 잎을 따서 먹으며 자연을 즐겼고 여름에는 물고기 잡이, 헤엄치기, 산에 올라가 열매따기로 무더위를 즐겼으며 가을에는 곤충채집, 밤 따기, 겨울에는 썰매타기, 연날리기 등을 하며 여가를 보냈다. 특히, 해가 길어 놀기 좋은 여름 방학은 아침부터 밤까지 개울이나 강가에나가 살다시피했는데, 족대나 어항을 이용하여 물고기를 잡아 집에 가져가면 어머니께서 매운탕을 해주시곤 하였다. 물가에서 자맥질을 하며 실컷 놀다가 심심해지면 개구리를 잡아서 놀기도 하였는데 버들강아지 줄기를 꺾어 개구리 항문에 꽂고는 바람을 훅훅 불어대면 개구리 배가 남산만큼 커지고 물에 넣으면 공기의 부력으로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보고 깔깔 대고 웃던, 지금같으면 동물학대나 생태계 파괴의 주범으로 욕을 먹었을텐데 그때만해도 여름밤 개구리 울음소리에 잠을 못 잘 정도로 개체수가 많았다. 개구리를 잡아다가 어머니에게 드리면 다리 살을 구워 소고기라 속이고 여동생에게 먹였고, 남은 부분은 다져서 닭모이로 주었다. 아버지께서 손수 닭을 잡으시는 날은 가족이 둘러앉아 오랜만에 단백질을 섭취 하는 날이기도 했다.
실컷 놀다가 배가 고프면 종종 서리를 해서 배를 채우곤 하였는데 대상은 수박, 참외, 오이, 토마토 등 과일이 주 였다. 한 집 건너면 모두 동네 어른들이 밭주인이었고 마을에서 만나면 모두 인사를 드리는 분들이었는데, 어느 날 친구 녀석이 자기 집 참외를 서리하자고 하여 친구네 참외 받 한 켠을 초토화한 적도 있으니 원두막에 앉아 계시던 친구의 아버님은 서리의 주범이 당신의 아들인지 모르셨을 것이다.
한 번은 산에 올랐다가 벌집을 누가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단체로 벌에 쏘여서 머리에서 피가 나고 머리가 모두 퉁퉁부은 적이 있었는데 그 중 제일 많이 쏘여 아프다고 엉엉 울던 녀석은 그 녀석어 어머니가 벌에 쏘인데는 된장이 좋다고 쏘인 머리 부위에 된장을 듬뿍 발라주었고 된장을 바르고 괜찮아졌는지 또 집밖으로 놀러나왔는데 그 녀석 머리 위를 파리들이 계속 쫒아다니던 기억이 난다. 그날 이후로 그 친구는 별명이 '된장 파리'가 되었다.
추석 날 아침 부모님 댁을 찾으니 고향 생각도 나고 개구쟁이 친구들도 생각난다. 못배운 한을 자식 들에게 되물림하지 않으려고 집 팔고 논 팔아 서울로 이사를 간 집, 돈을 벌겠다고 고향을 떠난 집, 마을 어르신들은 지금 모두 타계하셨고 겨우 몇 명의 친구들만 남아있는데 중년의 모습으로 변해 머리가 희끄희끗하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친구 들의 웃음이떠오른다. 함께 목장 길따라 걷던 기억, 술집 골목 어귀에서 주은 성인잡지를 숨어서 킬킬 거리며 보던 친구 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다람쥐 쳇바퀴돌듯 도시의 틀안에서 매일 같은 생활을 반복하며 답답함을 벗어날 수 없는 자동차 부속같은 삶을 살고 있는 내게 가장 행복했던 어린시절의 모습과 추억 들이 스쳐 지나가며 자연으로의 회귀를 외치는 듯 자꾸만 오라고 부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