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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결 Jan 10. 2024

눈사람

감성 에세이 6

[에세이] 눈사람

민병식


토요일이다. 강추위로 인해 외출을 삼가고 있는 즈음 주말이라고 딱히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요즘은 집에서 주로 책을 읽는다. 평소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어 놓았던 숙제를 하는 기분인데 그리 나쁘지는 않다. 나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이 얼마나 오랜만이던가. 평소 좀이 쑤셔서 집안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임에도 겨울 추위는 나의 일상을 완전 뒤집어 놓았다. 억지로든 어쩔 수 없든 마음의 양식을 쌓는 일은 게을리 할 수 없기에 굴속에서 겨울을 보내는 개미라고 생각하고 나름 안락하게 보내려고 노력을 한다. 그러나 책을 읽기 위해서는 먼저 내게 주어진 임무를 완성해야한다. 바로 집 안청소다. 청소기를 돌리고 거실을 닦는다. 내 시간을 갖기위한 정지 작업인 셈이다. 마음의 모든 근심을 털어놓는다는 해우소까지 말끔히 청소를 하니 숙제를 마친 후의 홀가분처럼 상쾌하다. 이제 자유다.


하늘이 온통 뿌였다. 웬지 오늘은 눈이 올 것같은 날씨, 일기예보를 검색하니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는데 마음은 그저 그렇다. 언제부터인가 하얀 설레임보다는 눈이 얼어서 길이 미끄러울 걱정이 앞서는 것을 보니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가나 보다. 적막이 감도는 분위기 속에 따뜻한 커피 한잔과 함께 책을 읽자니 창 밖으로 눈이 펑펑 내린다. 커튼을 젖히니 뽀족히 솟아 있는 아파트의 회색벽을  정화시켜 주는 듯 날리는 눈발이 깨끗해 보인다


어린 시절, 눈이 올 때의 광경이 떠오른다. 경기 북부의 고향  마을의 겨울은 눈이 자주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허벅지까지  찰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고 그런 날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무들이 나와 눈사람을 만들고 눈을 모아 토닥토닥 삽으로 다진 뒤, 물을 뿌려 얼려 미끄럼틀 만들어 에스키모가 되고자 이글루를 만들었다. 한참을 놀다가 시큰둥해지면 개울가로 가서 썰매를 지치며 소나무 가지를 쌓아놓고 불을 지펴 고구마를 구워먹기도하고  산토끼를 잡겠다고 앞 산을 올라  하루종일 노루처럼 뛰어다녔다. 갑작스럽게 손님을 맞은 산의 나무들은 우리들이 떠드는 소리에 놀라, 무더기로 눈을 떨어 뜨리고, 햇살을 받아 은빛 얼음 가루가 하늘을 유영한다. 어린시절의  추억 들이 눈송이처럼 눈 앞에 무수히 날리고 가까이서눈 구경 좀 해야겠다고 밖으로 나선다.


아파트 놀이터에는 벌써 눈이 쌓이고 여기 저기서 아이 들이 눈사람을 만드느라고 신이 났다.만들어 놓은 눈사람이 이곳저곳에 보인다. 화단 위에, 농구코트에 작은 눈사람들이 서있다. 올해 처음  눈다운 눈이 내린덕에 모두가 설렜나보다. 나도 같이 어린아이가 되어보기로 했다. 실로 수십년 만에 눈사람을 만들어 보는 것 같다. 숯 눈썹 대신에 나무가지로 눈, 코, 입을 만들고, 떨어진 잎을 주워 머리카락 까지 만드니 제법 그럴듯하다. 어렸을 때 손을 호호 불면  눈덩이를 굴리던 소년이 지금 앞에 있다.  눈사람을 만들며 하얀 동산을 만들던 그시절의 눈 속 동화나라에 푹 빠졌다가 나온다. 딱딱한 블럭과 화공약품 페인트의 세상이  아름답고 포근한 세상으로 바뀌었다. 아직도 내게 하얀 꿈이 남아 있는 것만 같다.


해가 뜨면 녹아 없어져 버릴 존재임에도 왜 눈사람을 만드는 것일까. 눈이 오면 눈사람을 반드시 만들어야할 공식이 있는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다. 다음날 아침 출근할 때 빙판길이 되어 나를 괴롭힐지라도 어릴 적의 순수했던 마음을 떠올리고 싶은 거다. 다 만들어 놓고 감탄하고 애지 중지하던 눈사람이 녹아 그 자리에 아무것도 없는 흙바닥이 되어도 시린 손 불어가며 만들던 그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 가장 행복하고 순수했던 나를 찾고 싶은거다. 언젠가 만들었던 눈사람이 녹아 없어진 자리, 동네어귀, 대문 앞, 골목길 그 자리 들에는 가장 아름다운 나의 모습이 가공하지 않은 원석처럼 잊혀지지 않는 순수함으로 찬란한 빛을 내면서 남아 있지 않은가.


눈은 하염없이 내리고 쌓이는 눈 만큼이나 세상은 더 없이 평화롭다. 시끄러운 도시도 도시의 외로운 나무도 눈 이불을 덮고 쉬어간다. 오욕칠정으로 얼룩진 내 마음도 눈 송이를 맞으며 어느 새 하얀 색깔이 되고 눈은 열심히 세상을 색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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