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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결 Apr 05. 2024

목련꽃 나무 아래

감성 에세이 23

[에세이] 목련 나무아래

민병식


경기도 연천,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까까머리 소년이었던 초등학교 5학년 때, 아침 등교길에 우연히 마주친 여학생이 있었다. 정갈한 단발머리에 시골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하얀 얼굴의 소녀는 서울에서 전학을 온 아이였다. 학교에서 오다 가다 슬쩍 눈이 마주쳤을 때 무척 새침한 인상이어서 기억에 남았다. 등교를 하려면 학교에 거의 다 가서 폭이 넓은 골목을 통과해야 했는데 골목길 안 쪽의 정갈한 기와집 안 뜰에 목련나무가 있었다. 어느 날  목련 꽃 떨어진 골목길을 지나던 중 집에서 나오는 그 아이와 마주치는 순간 목련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의 첫사랑은 이렇게 시작 되었고 그 해 내가 서울로 전학을 가면서 말 한마디 못한 채 허무하게 끝이났다.


목련의 꽃말은 고귀함인데 목련에게는 꽃말처럼 고고한 아름다움이 있다. 알아서 꽃을 피우고 때가 되면 스스로 꽃 잎을 떨구고 다른 꽃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오고갈 때를 미리 아는 욕심이 없는 꽃이다. 짧게 왔다 가지만 핀 모습이 너무도 깨끗하여 감히 법접하기 어려운, 순백의 마음을 담고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어느 지체 높은 양반댁 규수같은 넘볼 수없는 기품을 자랑한다.


'나무에 피는 크고 탐스런 연꽃’이라 하여 ‘목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데 목련은 절대 자신이 만개하는 모습을 공개하지 않는다. 동그렇게 몸을 말고 있다가 소리 소문 없이 자신의 비밀을 풀어 헤친다. 어떤 신호도 없이 조용히 있다가 깜깜한 밤이나 이른 새벽 뭇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목련꽃이 껍질을 벗고 피어나는 모습은, 스스로 알을 깨고 새끼 새가 나와 짹짹 거리듯 엄숙하고도 신비로운 생명 탄생의 장면을 연출한다. 게다가 오랫동안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도 않는다. 아주 짧은기간만 자신을 보이고 또 보려면 1년의 긴 시간을 기다리라는듯 순식간에 피었다가 진다. 참 비싸게 구는 꽃이다. 게다가 바닥에 떨어진 목련 꽃잎은  금방 초췌해져 어떤 이는 잎이 떨어질 때 지저분하거나 슬프다고 하지만  내게는 색바랜 바나나 껍질같은 모습조차도 자신을 아무에게나 맡기기 싫다는 콧대 높은 도도함의 표현인 듯하다.


목련꽃이 활짝  핀 오늘,  초등학생 시절의 그 날, 바닥에 떨어진 목련 꽃잎이 생각나는 것은 말 한마디 붙혀보지 못한 첫 사랑에 에 대한 아쉬움일까, 목련에 대한 추억일까. 목련꽃 피고 지듯 내 삶의 시간도 어느새 수십 번의 피고 짐의 세월이 흘렀다. 꽃은 떨어져도 향기는 가슴에 남듯 목련의 피고 짐 같이 순식간에  지나버린  삶, 중년이 된 나이에 나는 어떤 향을 갖고 있을까 잠시 생각에 잠겨 본다.


점심 식사를 맞치고 산책 겸 나와 거리를 걷자니 볕이 포근하니 참 좋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목련꽃이 활짝 웃고 있다. 그 어떤 꽃보다 겨울의 회색빛으로부터 벗어나 완연한 봄이 왔음을 알리는 선구자이며 길고 어두운 터널을 헤치고 나온 희망의 눈부심이다. 모질게도 춥던 겨울, 나무가지에 얼어붙은 눈을 떨쳐내고 피어난 목련처럼,  모두가 먹고 살기가 힘들다고하는 지금, 희망을 주는 향기로 내 손을 잡아 이끄는 축복에 감사하며 햇빛 가득히 봄을 맞이하고 있는 순간, 가는 시간을 부여 잡아 멈추고 하얀 구름같은 꽃을 한없이 감상하고 싶다.  목련꽃 나무 아래 세상 근심 걱정 다 잊고 그윽한 향기뿜으며 떨어지는 이 봄의 유혹에 실컷 취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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