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열 Aug 01. 2019

공감능력 떨어지는 사람의 속내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유난히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대체로 상사가 공감능력이 부족할 때 부하직원들의 마음고생이 더 심해지는 경향이 있지만, 직급에 관계없이 그런 사람들과 소통하는 일은 퍽 고단한 일이다. 사적인 대화나 일상 생활에서는 공감을 바라지 않으면 그만이다. 동료 직원은 어디까지나 같이 일을 하는 사람이지 백년해로를 할 사람이 아니다. 사적으로 공감하는 관계가 되지 않아도 큰 상관은 없다. 하지만 일을 함께 할 때는 그 결여된 공감능력이 스트레스를 가중시킨다. 조급한 사안으로 팀 전체가 이리 뛰고 저리 날고 난리인데 자기 일 끝났다며 무덤덤하게 퇴근 인사를 올리는 팀원을 보면 속이 아무렇지 않기가 어렵다.


직장에서 각자의 역할과 책임이 있는 것은 맞지만 업무라는 것은 결국 결국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어깨를 부딪히며 함께 해야 한다. 그런 와중에는 당연히 감정이 발생하고 업무를 위한 소통(communication)에는 그런 감정의 공유도 포함된다.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과는 그러한 감정의 공유가 어렵다. 그러다 보니 소통도 잘 되지 않아 업무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효율이 떨어지는가 하면 괜한 마음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일도 생긴다.


공감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는 당사자는 '자기 맡은 일 잘하면 되는 것 아니냐'라고 반문한다. 심지어 그 부류의 사람들은 공감능력이 부족하다는 지적마저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인다. 대화라는 것은 단순히 말만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감정도 오가는 행위다. 한쪽에서 감정의 피드백을 거부하면 원만한 대화가 되지를 않는다. 한쪽의 감정이 갈 곳을 잃고 공중에 떠버리는 순간 진지한 물음은 영양가 없는 지적질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쯤 되면 그 사람의 속내가 뭘까 하는 궁금증은 미궁 속에 빠져버린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도, 남의 감정에 공감하려 들지도 않는 그들의 속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싫음과 미움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말이나 행동에는 더 많이 공감하려고 한다. 그 공감이 친밀감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을 거꾸로 하면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공감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얘기가 된다. 사람이 싫을수록 그 사람에게 공감하고 싶지 않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싫은 대상이 뿐만 아니라 미워하는 대상도 같은 처지다. 미워하는 대상에게는 미워서라도 공감하지 않는 것이 사람이다.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은 상대를 멀리 하고 싶어 하는 감정이다. 멀리하고 싶은 대상에게 감정 이입을 하고 공감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공감능력이 떨어지거나 공감에 인색한 그 직원은 어쩌면 나를 미워하거나 부서나 회사를 싫어할 수 있다. 밉고 싫어서 공감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할 수도 있다. 애정이 없음과는 다른 얘기다. 애정이 없어도 감정을 실은 대화는 나눌 수 있다. 친밀감이나 유대감 정도만 있어도 적당한 공감을 동반한 대화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끼리 사랑 고백을 하는 것도 아닌데 가벼운 공감 정도야 못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런 공감이 직장생활의 윤활유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직장생활을 굳이 해보지 않은 사람도 안다. 하지만 대상이 밉고 싫다면 그런 친밀감이나 유대감조차 생기지 않는다. 그런 상태에서 공감을 바라는 것은 무리다.


자기애의 과잉

자기애의 과잉에 빠진 사람들도 공감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애의 과잉'은 칸트가 말한 '자기 보존의 충동' 수준을 넘어 나르시시즘(자기애적 인격 장애)에 가깝다. 자기애가 과잉된 사람은 외부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도 당연히 관심이 없다. 의지로 그러한 태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자기애의 과잉으로 구축된 정신의 메커니즘에 따라 그렇게 움직인다. 자신에게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행동인 것이다. 자신의 그러한 상태에 대한 지적에도 무덤덤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지적에 실린 감정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무덤덤한 것이다.


특히, 상사가 자기애의 과잉에 빠졌을 경우 그의 무관심은 '오만'이라는 감정으로 부하직원들에게 표현된다. 스피노자의 정의를 빌자면 오만은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정당한 것 이상으로 느끼는' 감정이다. 오만은 자신의 지위에 대한 우월감에서 온다. 그 우월감은 그 지위를 획득한 자신에 대한 애정을 과잉 상태로 만들고 상사 스스로를 직원들 이상의 존재로 여기도록 한다. 그런 상사가 직원들의 감정 따위에 관심이 갖을 리 없다. 또 다른 우월감을 획득해 더 오만해지고, 자기애에 더욱 함몰하는 데 열중할 뿐이다. 


오해하지 말하야할 것은 자기애의 과잉은 이기주의와 다르다는 점이다. 이기주의는 공감을 한다. 다만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 일을 하지 않을 뿐이다. 쉽게 말해 "갑자기 일 터져서 힘들겠네..."라고 공감은 하지만 그 뒤는 "그런데 내 일은 아님."으로 마감하는 것이 이기주의다.


지능의 문제

공감능력의 결여는 지능의 문제일 수도 있다. 결코 비아냥 거리는 얘기가 아니다. 말이 쉬워서 공감이지 공감은 누구나 쉽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서점에 공감의 위력과 방법을 설명하는 책들이 즐비한 이유가 다른 데 있지 않다. 그만큼 어렵고 힘들기 때문이다. 공감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상황을 분석하고, 자신의 경험과 통찰력을 동원해 상대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유추해야 한다. 시간도 한정 없이 주어지지 않는다. 한참을 생각할 시간의 여유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화를 나누는 도중 순간적으로, 때로는 몸짓이나 표정만으로도 상황을 분석하고 상대의 감정을 알아내야 한다. 이는 매우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과정이다. 지능의 역할이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하다. 쉽게 말해,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으면 공감도 어렵다.


한 가지 보태면, 공감은 연민이나 동정과는 다르다. 연민, 동정은 상대를 타자(他者)의 위치에 두었을 때 갖게 되는 '정신의 반응', 즉 감정이다. 반면에 공감은 나를 상대에게 대입해야 가능하다. 유시민 작가의 말을 빌자면 그 사람이 되어서 생각해보는 '내재적 접근'이 필요하다. 이 작업에서 이성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비록 지능이 이성을 대표하거나 이성의 전부를 차지하지는 않지만, 내재적 접근에서 지능이 역할을 빼버리면 '동감(同感)'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동감은 글자 그대로 심리적 동일감을 느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외에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 성향이 있는 사람에게서도 공감능력의 결여를 찾을 수 있겠지만 그런 극단적인 경우는 일상적인 직장생활에서는 적용하기 어려우므로 논외로 하자. 또, (상황을) '몰라서'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공감능력의 결여는 누구나 알만한 상황에서도 공감이 안 되는 경우를 뜻하니 역시 논외다. 


직장생활에서 공감능력이 모자라거나 공감을 거부하는 사람의 속내는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아쉽게도, 그 속내를 짐작할 수 있다고 해서 단번에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아보면 알게 되듯이, 사람은 쉽게 성향을 바꾸지 않는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결방법들이 쏟아져 나오긴 한다. 하지만 수학 공식처럼 딱 떨어지는 해결 방법은 아직 없다. 어쩌면,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이기 때문에 여전히 그것에 관한 논의가 계속되고 사람들의 고민도 이어지는 것일지 모른다. 비록 문제 해결에 바로 다가설 수 없겠지만, 짐작의 실마리 몇 개를 갖는 것만으로도 속은 좀 편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유도 모른 채 맞는 것보다야 왜 때리려는 지 알고 맞는 게 그래도 속이 좀 덜 갑갑한 것처럼 말이다. 여기에, 이유를 알면 나의 생각과 태도의 방향을 정할 수 있다는 것이 작은 덤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