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이_없는게_일정
사진얘기를 하면서 잠시 여행이야기가 딴데로 샜는데, 어느새 옐로우 나이프에서 캘거리로 돌아와 차를 렌트하고 밴프 빌리지에 도착했다.
곧바로 Two-Jack Lake Camping Ground로 차를몰아 예약해둔 캠핑사이트에 텐트를 쳤다. 초가을 대관령만큼불어오는 찬바람에 몸은 움츠려 들어 서둘러 커피물을 올렸다. 15미터쯔음 떨어진 주위캠핑싸이트에는 비어있거나 이제막 도착한 캠퍼들이 조심스레 짐을 풀고 있었다. 얼마안가 물이 끓고 한국에서 준비한 예가체프 커피를 내리고 콧구멍으로 커피를 마실것만 같은 기세로 커피에 얼굴을 깊이 가져댔다.
시큼한 커피향이 온 몸에 퍼졌고 움츠렸던 날 선 긴장이 풀렸다.
시간은 오후 두시 쯤, 내일아침까지는 아무런 일정이 없다. 일정이 비어서 없다기보다는 일정이 비도록 계획을 세웠다. 커피를 마시는고 숨쉬는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 순간만큼은 둘사이 대화도 없다. 생각이 없어지니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어렸을 때는 여행을 가면 인천공항에서 체크인 할 때부터 다시 한국 땅을 밟을때까지 거의 깻잎두장만큼의 빈틈도 없이 일정을 가득 채웠었고 또, 그렇게하는게 당연한걸로만 생각해왔다. 조금이라도 빈틈이 생기면 그때 또 뭘할까 라는 고민들로 그런 빈틈을 의미없이 채워갔다.
지친몸으로 돌아온 여행의 끝에는
"그래 이번에도 최고의 여행이었어"
라고 애써 다음날 출근을 위로했다.
요즘은 (사실은 일정도 별것 없지만) 일정과 일정사이 강제로 아무것도 없는 일정을 끼워넣는다. 아무것도 안할 땐 몸에서 놀고있는 감각들이 슬그머니 깨어나 지혼자 알아서 작동한다. 늘 마시는 커피향도 더 시큼하게 느끼게 하고, 코끝에 다가와 있는 캐나다산 공기의 흐름까지도 느끼게 한다. 등 뒤에 있는 헬리녹스 의자의 각도와 레드윙 부츠 안에서 돌고있던 작은 돌멩이의 모양까지도 엄지발가락이 그려낼 수 있을것 같다. 그렇게 감각적으로 만들어진 기억들은 유난히 더 오래간다. 낙하산을 매고 안나푸르나의 언덕 아래를 뛰어내려가다 하늘을 날게되는 그 순간의 기억보다 포카라 어느 야외테이블에 앉아서 크로와상과 커피를 마시며, 세계 각국의 트레커들을 구경하던 기억이 아직도 더 또렷한것도 그 이유다.
"캐나다에서 뭐 했을 때가 제일 좋았어?" 라고 물어본다면 내 대답은 정해져있다.
"아무것도 안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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