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규율 없는 동물, 규칙 없는 인간은 없답니다. 붕어항에 새 붕어를 넣으면 치열한 ‘붕어 왕좌의 게임’이 벌어지고, 최종 승자가 어항 평화를 누립니다. 인간 세상도 똑같지요. 나라마다 각자 방식으로 “이렇게 살아야 해!” 하는 소리를 벽에다 못질하듯 해왔으니까요.
중국은 충·효·우애, ‘집안싸움 하지 말고 나라 걱정 좀 해!’ 를 주입시켰고, 희랍인들은 “용감하게, 웃으며!” 를 외친 반면, 미국은 성실·정직·절약이 인간의 덕목이라 주장합니다. 히브리 민족은 십계명을 일종의 ‘사회 내비게이션’으로 탑재해왔죠. 이런 관습과 규율을 보면, 인간들은 애초에 ‘사회생활의 공식’을 만들며 살아온 셈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인간에겐 개나 돼지와는 다른, ‘자기성장’이라는 업그레이드 버튼이 달려 있지요. 같은 고기반찬 좋아해도 우린 더 깊은 고민을 합니다.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의 삶은 그냥 착하게 사는 게 아니라, 행복하게 사는 거야!” 라며 건강, 재산, 우정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웃픈 중요한 멘트, ‘정의로운 친구끼리는 정의도 필요 없다’랍니다. 평생 친구 한 명 있다면, 굳이 재판정까지 갈 일 없겠지요.
공자님은 어떨까요? 그는 ‘군자’와 ‘소인배’로 인간을 가르는데, 군자는 ‘행동이 먼저, 말은 나중’, ‘사랑받으려 하지 말고 옳은 길을 걸어라’고 권합니다. 인맥 관리보다 도덕 경영에 관심을 두란 소리입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보면, 석가와 노자의 단계에 이르지요. 석가는 이상적인 인간이란, 살인·도둑질·거짓말 등 아홉 가지를 ‘할래야 할 수 없는’ 사람. 정말 하기 싫어서 못 하는 게 아니라, 도를 아는 이라면 애초에 이런 짓은 손발이 오그라져 못 한다는 뜻이지요. 노자는 한 술 더 떠 ‘겨울 냇물 건너듯 늘 조심스럽고, 얼음처럼 휘어지고, 흐린 물처럼 어둡다’는 심오함을 말합니다. 뭔가 대충 살라는 건지, 눈치 백단이 되라는 건지 헷갈립니다만, 요지는 깊이와 겸허, 단순함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이분은 남의 규율을 싹 모아 한 층 업그레이드! 슬퍼하며(슬플 때 슬퍼할 줄 아는 사람), 배고파하며(정의에 목마른 자), 용서하며(원수를 사랑하라), 청결하며(마음이 깨끗), 마음 넉넉히(온정), 다툼 중 화해하기(화평), 그리고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받아도 기뻐하라… 이런 여덟 가지 마음으로 ‘복(福)’을 얻는다 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없애러 온 게 아니라 이루러 왔다’며, 기존의 질서를 날려버리기보다는 완성하러 왔다고 하죠.
그런데 조건이 좀 독특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쯤 되면 ‘아휴, 내 팔자야!’ 라는 소리가 나오겠지만, 여기서 십자가는 자의대로 살지 못함, 고통, 결국 자기 비워내기입니다. ‘씨는 죽어야 열매를 맺는다’는 말도 하는데, 결국 33년 내내 속을 텅- 비워 살아온 게 예수님 본인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새 사람이’ 될까요? 방법도 기상천외! 아무리 좋은 소금이라도 밥에 직접 넣어야 짜듯, 성경과 찬송가도 내 삶에 플레이어처럼 ‘실전 연결’해야 한다는 거죠. 건전지 안 넣으면 고가의 라디오가 깜깜한 것처럼, 내 혼과 그리스도의 영이 ‘실시간 접속’되어야 제대로 소리가 난답니다.
가끔 산마루에서 “아~ 이게 인생의 복(福)이구나!” 하고 무릎을 치는 순간이 오기도 합니다. 영적인 심연에 닿았단 증거겠지요. 그렇게 또 한 껍질 벗겨진 뱀처럼, 우리는 허물을 벗고 새 사람이 되어가는 겁니다.
결국, 인간 성장의 비밀 비법은 이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공자, 석가, 노자, 예수… 누가 뭐래도 ‘자기 안에 있는 씨앗을 정성스레 심고, 마음의 창을 활짝 열고, 실천의 건전지도 제대로 꽂으세요!’ 갑갑했던 가슴도 저절로 뻥 뚫리고 약 기운처럼 행복이 저려올지 모릅니다. 그게 바로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묘한 비법 아니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