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거룩한 낭비의 유쾌한 시간

by 아침햇살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토끼를 잡고 나서는 덫을 버린다." 최소한의 목적을 이루면 그 수단은 내려놓으라는 뜻이다. 누가 알았겠나, 이 옛 성현이 우리가 예배드리는 방식을 위해 덫 이야기를 했다는 걸! 우리가 바싹 마른 몸이 물 한 모금과 날쌀 몇 톨로 턱걸이하듯, 예배라는 작은 덫으로 신을, 혹은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잡아본다.


여러 종교 전통은 의례에 익숙하지만, 개신교인들은 종종 이 의식이 뭔가 의심스럽고 불편하게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예배가 무엇이고, 왜 불편한 의자를 이겨가며 찬송하고, 기도하며, 설교를 듣는지, 그 기초부터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처음 예배에 모여 앉아 있으면, 마치 우주에 작은 구슬들이 모여 중력장을 만든다는 물리학처럼, 저마다의 마음이 한데 모여 거대한 '마음 밭'을 이룬다. 이 마음이라는 게 신통방통해서, 따로따로 놀면 흔히 '벡터 상쇄'가 일어나 아무 일도 안 일어나지만, 한 방향으로 레이저처럼 모이면 느닷없이 여리고의 성벽도 퍽 하고 무너뜨릴 수 있다나? 마음의 합, 목소리의 합. 이런 게 '예배 파워'다.


예배 시간은 기이하게도 공간과 시간의 벽마저 잠시 허문다. TV로 천문대를 보듯, 예배는 일상이라는 작은 방에 우주의 창문을 내는 일. 마치 히말라야 산골의 도인처럼 말이다. 가끔은 나 혼자 예배드리는 줄 알았는데 문득 무한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잠시 다른 차원의 신들이 경외와 위안을 건넨다. 혹시 환상이 아니냐고? 중요하다! 내게 감동과 힘이 생긴다면, 찬란한 에메랄드 환상이라도 감지덕지 아닌가.


하지만 예배 시간이 시작될 때, 우리는 온갖 가면을 쓰고 들어온다. 일상에서 경쟁하랴, 체면 챙기랴 바쁜 우리. 그런 사회적 가면을 잠시 벗는 곳이 예배다. 회복의 시간이다. 그 비결이 뭐냐고? 인간은 재미있게도 '예식'이라는 걸 만들어냈다. 왜 반드시 의자에 바르게 앉아야 하며, 괜히 불편하게 손을 모으고, 평소 듣지 않는 바리톤으로 찬송해야 하나? 사랑하는 이를 위해 일부러 거북함도 감수하지 않는가. 예식은 바로 그런 거룩한 낭비다.


예수가 발에 비싼 향유를 붓는 여인을 일러 '거룩한 낭비'라고 했던 것처럼, 예배란 효율과 실용성은 잠시 미뤄두고 신 앞에서, 내 본질 앞에서 허튼짓 하나 해주는 시간이다. 넥타이나 결혼반지처럼 실용성은 전무해도, 의미와 감동으로 가득 찬 무용지물! 숨 쉬는 것처럼, 그냥 그저 하는 시간. 무엇을 생산하지 않아도 괜찮고, 하늘 앞에 서투른 나를 그대로 드러내는 시간.


찬송가 한 곡 부를 때마다 나는 베토벤, 혹은 이름 모를 시인이 되어 본다. 3천 년 된 시편을, 내 오늘에 새겨보는 데서 오는 경이. 예배는 이런 시간여행이자 타임슬립이다. 옛 영혼들이 남긴 영감에 자도취해, 나의 내면 동굴에 조용한 빛을 끌어들인다.


그러나 예배의 진짜 마술은, 오늘 이 자리에도 신의 숨결이 흐른다는 그 떨림, 그 동실성에 사로잡힐 때 비로소 터진다. 온갖 조각난 가면을 벗고 본연의 내가 되어 하늘을 맨얼굴로 맞닥뜨릴 때, 밀레의 만종처럼 땀 씻은 얼굴로 석양 앞에 고개를 숙일 때, 내 안에 잊었던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살아나고, 그 옛날 파도처럼 넘실대는 신의 영과 춤추는 순간, 이 거룩한 낭비는 어느새 유쾌한 에너지로 변해 내 일상에 깃든다.


예배는 그래서 만든다, 경쟁하는 내가 아닌, 본래부터 있는 나. 클라이맥스는 이 한마디로 요약된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독수리처럼 날개 치고, 뛰어도 피곤하지 않다."


아, 오늘도 나는 하루 한 번, 거룩하게 낭비한다. 하늘에 가장 멋진 시간 한 뭉텅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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