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가장 심각한 존재는 바로 ‘진지한 신앙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고민이 깊어지고, 고민이 깊을수록 자꾸만 웃음이 사라집니다. 오죽하면 “믿음이 산을 옮긴다더니, 내 얼굴의 웃음부터 옮겨가 버렸다”라는 자기 고백까지 하게 됩니다.
기독교는 흔히 ‘역사적 종교’라 불립니다. 이 말 자체가 뭔가 거룩한 운명을 가진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죠. 실제로 기독교는 인류의 역사와 부대끼며, 때론 박수받고 때론 돌 던져 맞으며 치열하게 살아왔습니다. 게다가 이 시대, 우리는 물건도 아니고 상품이 되었습니다. 친구가 ‘너 요즘 뭐 해?’라고 물으면, ‘요즘 나 자신을 잘 포장해서 세상에 잘 파는 중이야’ 하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요. 경쟁 사회, 상품 사회, 급기야 종교조차도 마치 할인 쿠폰을 들고 쇼핑하듯 접근하는 시대 아닙니까?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가능성에 무한한 신뢰를 보태서 신을 만들고, 이제는 그 신마저도 ‘팔고 사는’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신도 마침내 ‘다 쓰면 버리는 일회용 영수증’이 되어 버리는 걸까요? 아니, 여전히 신을 존경은 하지만 결국엔 ‘나를 아주 조금 더 신성하게 보이고 싶어서’ 신을 빌린 건지도 모르지요.
그 와중에, 데카르트 선생은 또 한마디 던집니다. ‘신은 인간의 힘에 의해 필요로 만들어진 분이 아니야.’ 맞는 말이죠. 신께선 굳이 인간의 환호성이나 축하 메시지 없이도 아주 잘, 아주 거룩하게 지내시니까요.
자, 이제 본론으로 접어들면, 예수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세상 한 복판에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이 역사 속에 하나님이 한 인간이 되어 오셨으니, 역사의 정의는 단번에 뒤집힙니다. 예수님은 삶의 고통, 죽음의 두려움, 전쟁 속의 평화, 믿음 속의 의심까지 다 보여주셨죠.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처럼 되는 것 - 그리하여 우리가 또 다른 예수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예수가 되기 쉬울까요? 아니죠. 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되자니 도저히 안 되고, 그 사이에서 희망과 절망을 오가며 고뇌하는 게 그리스도인의 숙명입니다.
이 의심 - 믿으면서도 속으로는 망설이는 이중적 마음, 믿으려고 애쓰지만 가끔씩 “진짜 맞을까?” 혼잣말하는 인간다움. 사실 의심치 않는 믿음이라면, 그건 고작 ‘100% 당첨 확정 복권 긁기’ 수준이겠죠. 이딴 확신이라면 고통이 있을 수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은 언제나 “혹시 아닐지도 몰라, 그래도 한 번 걸어보자”는 도전과 결단의 연속입니다.
이걸 리처드 킴의 ‘순교자’에 나오는 신 목사나 이 대위, 박 대위는 각기 고통과 의심, 사랑과 결단 사이에서 오롯이 몸소 경험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인간을 사랑하는 일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걸 예수님이 우리에게 몸소 “찐 사랑”으로 보여주셨죠.
솔직히 믿는다는 것이 쉬웠다면, 십자가 이야기조차 이렇게 구구절절할 리가 없죠. “나는 의심 없이 살아요!”를 외치는 이들이야말로 아마 자기 자신조차도 속이고 사는 것일지 모릅니다. 오히려 진정한 신앙은 두려움과 의심, 고통 가운데에서도 ‘그래도 믿고, 그래도 사랑하겠다’는 복종에서 빛이 납니다.
현대 사회는 이미 온통 상품 세상입니다. 우리 교회도, 우리 신앙도, 우리 삶도 어느새 포장지에 싸인 채 세상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예수님처럼 이 비극적인 인류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삼고, 절망하는 이웃을 위해 ‘따뜻한 피 한 방울’을 흘릴 용기, 추운 세상에 아주 소박한 사랑 한 줌을 연탄처럼 건네는 것, 그게 바로 우리에게 남겨진 진짜 신앙의 길 아닐까요?
그렇게 우리도 결국, 믿음과 의심, 웃음과 눈물, 상품과 성스러움 사이에서 팽이처럼 돌면서도, ‘사랑하라’는 한 마디 말씀만은 절대 떨어뜨리지 않고 지켜내는 유쾌한 신앙인들이 되기를, 이 글을 빌려 기도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