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도시의 짐승’이 된 지 어언 수천 년. 아스팔트 위를 껑충껑충 뛰는 우리의 섬세한 발바닥은 콘크리트 먼지에 익숙해졌습니다. 하지만 하늘을 보면, 산이 있고 들이 있고,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건’이 벌어져 왔는지 아십니까?
예수님, 이분은 확실히 ‘산과 들 마니아’ 시죠. 별명 짓자면 ‘필드형 메시아’쯤 되겠네요. 얼굴에 광채를 발하신 바로 그 산, 수많은 군중에게 팔복을 외치신 바로 그 산, 모든 걸 벗어놓고 마귀와 한판 승부를 벌이신 그 들. 심지어 첫 신비체험은 강가에서, 바람을 꾸짖던 순간에는 호수 위에서였습니다. 특별한 사건은 늘 문명 너머에서! 종로에서 시작된 신비가 아니라 한적한 산골에서 펼쳐진 것이 인상적입니다.
도시의 골목에서 놀던 죄인들과 만남도 중요했지만, 삶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언제나 산과 들이었습니다. 두꺼비집(전기) 없는 곳, 난방도 안 되는 외양간에서 태어나, 마지막 역시 도시 밖, 성문 밖에서 생을 마치셨으니까요. 한마디로 평생 ‘야인 프로젝트’였던 셈입니다.
예수님의 선배 세례요한, 이분도 털옷에 메뚜기, 들불… 일명 ‘에코 패셔니스타’였습니다. 도심 문명의 TPO(시간, 장소, 상황에 맞게 의복을 착용하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야인 중의 야인! 그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죠. 광야에서 외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요단강 세례 체험이 없었을 테니까요.
엘리야 선생님도, 모세 할아버지도 산과 들을 ‘집’ 삼아 살아간 인생. 모세는 궁궐도, 가나안식 별장도 마다한 채, 미디안과 느보산, 들판 야영의 삶을 고수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목동들은 남들 다 호화로운 침실에 누울 때 들판에서 별을 보다 천사 소리를 들었고, 모세는 양치다 불꽃에서 신의 목소리를 만났습니다. 신과의 만남에 고층아파트 베란다는 필요 없음. 역시 평지는 답이 없고, 경사가 있어야 ‘경이’가 오는가 봅니다.
그렇다면 왜 신은 늘 산과 들을 사랑했을까요? 여기에는 심리학적으로도 재미난 이유가 있습니다. 심리 실험 하나 해볼까요? 휴대폰, 시계, 신용카드 싹 내려놓고 아무도 없는 산이나 벌판에 혼자 3일만 살아보세요. 처음엔 오싹, 그러다 슬슬 자존심 껍질(체면, 아첨, 변명, 험담)이 하나씩 벗겨집니다. 습관적으로 꾸부정하게 굽었던 자세도 똑바로 펴지고, 도시에서 쌓인 ‘때 국물’이 말끔히 떨어지는 경험, 마음공부의 시작이란 그런 겁니다.
산과 들, 돌과 나무, 하늘… 아무 말도 못 하는 존재들과 며칠 눈 맞추다 보면 온갖 ‘인간병’의 묵은 때가 사라집니다. 문명사회에서는 똑바로 선 사람이 귀하거든요. 하인·양반·야인 사이의 본격 자세교정 체험입니다.
밤이 찾아오면, 긴장감 ‘만렙’! 공상의 여유는 사라지고, 오직 두려움과 즐거움만 남습니다. 맹수가 튀어나올까 무섭고, 별빛은 한없이 아름답습니다. 이런 이중 감정, 베드로가 “주님, 저를 떠나소서!” 하며 동시에 붙들려던 바로 그 마음. 신과의 만남은, 오감의 불길이 자연과 찰싹 붙는 순간에 일어나는 법입니다.
산과 들에선 무방비 ‘오픈 시스템’이 발동. 예측불허, 창문을 활짝 열어야만 하는 환경! 모든 공리·이론·참견이 사라지고, 무엇이든, 심지어 신까지도 불쑥 나타날 수 있다는 열린 마인드. ‘신과 마귀가 출현 가능한 진짜 장소’,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무의식의 창이 몽땅 열리는 시간입니다.
이쯤 되면 질문 하나. 진짜 부강한 나라는 어디일까요? 경제, 군사… 다 좋지만, 산과 들을 제대로 보전하는 나라가 ‘진짜 부강한 나라’입니다. 왜냐고요? 문명에 취해 자기 자신과 신까지 잊어버리지 않는 국민이 많은 나라! 산과 들에서 근원과 연결되면, 나무뿌리처럼 쉽게 뽑히지 않습니다.
‘성전’이란 뭘까요? 문명 한가운데서도 산과 들을 떠올리게 해주는 공간. 인간 문명 속에서 야생적 본질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곳일 겁니다. 신앙인? 문명 속에 몸은 있지만, 영혼은 늘 산과 들 어느 언덕으로, 때론 곡선길로 산책 나가는 사람 아닐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통과할 때,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동행했다고 합니다. 이건 뭘까? 산과 들을 헤치는 인생길에 하늘의 돌봄이 있다는 알레고리. 진정한 신앙은 문명의 장막 아래서도 마음은 늘 벌판과 산으로, 천우신조(天祐神助)의 경험과 함께 살아가는 마음의 야생성 회복에 있습니다.
때를 벗고, 겉껍데기를 털고, 오직 ‘자연에 여백 남기기.’ 그래서 우리 모두, 가끔 한 번쯤은 도시의 스위치를 끄고 산과 들이 주는 선물 - 나 자신과 신,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불빛에 귀 기울여 볼 노릇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