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중심병에서 벗어나기

by 아침햇살

태어나자마자 우리는 ‘세상의 중심’이다. 울면 밥이 나오고, 울면 누군가 포근히 안아준다. 이쯤 되면 신생아는 이미 인생의 법칙을 배운 셈이다. “세상은 내 목소리에 반응한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면 그 법칙은 무참히 깨진다. 아무리 울어도 이제는 ‘네가 알아서 해’라는 냉정한 대답만 돌아온다. 문제는, 이미 우리 가슴속엔 “나는 우주의 중심이다”라는 프로그램이 기본 탑재되어 있다는 것.


어릴 적 우리는 넘어지면 모서리를 “이놈!” 하며 혼내는 어른들을 봤다. 애는 위로받고, 모서리 탓은 끝이다. 그런데 그 순간 우리 뇌 회로엔 ‘문제의 원인은 나 밖에 있다’는 신념이 각인된다. 그렇게 자라서 우리는 문이 안 열릴 때, 세상이 왜 이렇게 불친절한가를 탓한다. 밀면 열릴 문인데, 굳이 ‘누가 이런 문을 만들었냐’며 세상에 짜증 내는 인간형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SNS 시대의 우리는 여전히 우주 중심병에 걸려 있다. 누가 내 사진에 ‘좋아요’를 눌렀는지, 오늘 내 스토리를 누가 봤는지가 하루의 기분을 결정한다. 새 옷을 입었으면 그냥 기분 좋으면 된 거 아닌가? 그런데 ‘오늘은 열 명이 예쁘다 했는데, 어제는 세 명밖에 안 했다’며 통계를 내는 순간, 우리 마음속엔 또 다른 은하계의 여론조사가 돌아간다. 짐승은 이런 망상을 안 한다. 강아지는 오늘 털이 잘 말랐는지 아닌지만 관심 있지, 이웃 골든레트리버가 자길 부러워했는지 따지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남의 시선이라는 ‘가상 우주’ 안에서 산다. 누군가 나를 보고 감탄하거나, 슬퍼해주거나, 기억해 주기를 원한다. 심지어 죽은 후에도 ‘몇 명이나 나 때문에 울까?’를 상상하며 감정 시뮬레이션까지 돌린다. 그것이 인간의 ‘천동설’이다.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돈다는 착각. 하지만 그 우주는 가짜다.


예수는 그 착각에서 벗어난 사람이었다. 세상이 자기 뜻대로 안 돌아간다고 문을 부수지 않았다. 그는 세상을 ‘내 뜻대로 되게 하소서’가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본, 흔치 않은 ‘지동설 인간’이었다. 세상이 움직이고, 나는 그 안에서 흘러가는 별 하나일 뿐이라는 자각. 그것이야말로 진짜 자유였다. 자기가 세상의 일부임을 안 사람만이 세상 탓을 멈출 수 있다.


우리는 “나를 위해 울지 말라”라고 하신 예수의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런데 그 말은 단순히 멋진 유언이 아니다. 그것은 “이제 네 중심에서 벗어나라”는 초대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허둥대지 말고, 무엇이든 남김없이 순간을 살아보라는 초대 말이다. 울 일이 있다면, 그건 남이 아니라 아직도 ‘살지 못한 나’를 위해 울어야 할 때다.


진짜 멋진 삶은 장식된 스토리 속에서 ‘좋아요’를 많이 받는 삶이 아니다. ‘지금’을 온전히 살아내는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다. 오히려 “다 이루었다”라고 말하며 잔잔히 미소 지을 수 있다. 찰나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현재’를 채워간 사람은 더 이상 뒤돌아볼 것도, 미련도 없다.


결국 종교의 깊이는 ‘죽음’의 순간뿐 아니라 ‘삶의 순간’에도 깃든 균형 감각이다. 태어남과 죽음이 한 짝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인생을 가볍게, 그러나 진지하게 산다. 그래서 오늘의 결론은 이것이다.


“오늘 나를 위해 울지 말라. 대신 오늘을 위해 기꺼이 웃자.”


그렇게 산다면, 우리도 언젠가 ‘너 자신을 위해 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떠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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