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이런 말을 듣는다. “나는 하나님이 필요 없어요.” 왠지 멋있어 보이지만, 그건 대낮에 켜진 가로등이 “태양이 무슨 필요가 있냐”라고 말하는 꼴이다. 병원에서 몇 달간 산소마스크를 끼고 있다가 “공기가 왜 필요하죠?”라고 묻는 사람처럼. 우리가 느끼지 못해도,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마치 빛과 공기처럼 이미 우리의 삶에서 작동하고 있다.
기도는 그런 존재와의 통신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많은 사람은 이 간단한 시스템을 쓰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신비한 통신망이 열려 있는데, 와이파이 비번을 모르는 셈이다.
성 테레사는 이걸 아마 가장 유쾌하게 이해한 사람일 것이다. 어느 날 그가 교우들 앞에서 “이 자리에 성당이 세워져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물었다. “돈은요?” 테레사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작은 동전 두 닢을 꺼내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돈은 제게 있어요.” 사람들은 피식 웃었다. 벽돌 한 장 살 돈도 안 되는 그 두 닢을 들고 말이다. 그런데 그녀는 덧붙였다. “두 닢에 하나님을 더하면 모든 게 가능하지요.” 그리고 실제로 그 자리에 성당이 세워졌다.
요즘 말로 하면 “인간 + 하나님 = 무한 가능성 모드”다. 우리는 늘 부족함에 매달리며 “부족한 나”를 업데이트하려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더하면 되었다. 그런데 그 단순한 덧셈을 못해서, 수많은 이들이 프로그램 오류처럼 버벅거린다.
기도는 결국 ‘내가 하나님과 연결 모드로 진입하는 과정’이다. 몸과 마음을 재설정해야 한다. 스마트폰을 새벽까지 붙잡고 있다면 절대 연결이 안 된다. 금식이나 철야, 부동 같은 규율이 꼭 필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의미하는 ‘기어 변속’이 중요하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 오토가 아니라 수동이다. 직접 기어를 바꿔줘야 하나님 모드로 들어간다.
그리고 마음의 단계로 가보자. 기도는 ‘집중’의 예술이다. 손목시계 초침을 눈으로 60초간 따라가 보라. 그 짧은 동안에도 수십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간다. 몸은 있음 직하게 조용하지만 마음은 바쁘다. 기도는 그 반대다. 몸이 멈추고, 마음은 한 방향으로 서서히 맑아져야 한다. 마치 의사가 수술대 위에서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한 가닥 혈관을 바라보는 집중. 잡다한 말과 욕망이 빠져나가고 남는 순수한 주파수, 거기서 하나님이 잡힌다.
그런 집중 위에 마지막으로 필요한 건 ‘기다림’이다. 이건 단순히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다. “되어야 할 일은 이미 되어가고 있다”는 차분한 인식, 그것이 진짜 기다림이다. 최고의 기도는 ‘무엇이 되게 해 주세요’가 아니라 ‘무엇이 되어도 좋습니다’로 바뀌는 순간 완성된다. 세상은 그제야 당신을 통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한 백만장자가 있었다. 언젠가 그의 친구가 “나도 당신의 오케스트라에서 일하고 싶어요. 악기는 못 다루지만, 저기서 막대기만 흔드는 그 사람... 그건 할 수 있겠어요!”라고 했다. 하지만 지휘자의 역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전체를 ‘살아 있도록’ 기다리는 일이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서두르지 않고, 하늘의 리듬과 호흡을 맞추는 지휘자의 자세가 필요하다.
결국 기도는 세상을 바꾸는 기술이 아니라 나를 다루는 기술이다. 꿈은 나를 닫아 세상 밖으로 떠돌게 하지만, 기도는 깨어 있으면서 세상 너머로 나아가게 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부족함’을 채우는 대신, ‘부족한 나’ 자체가 아름답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노년의 한 노인은 평생 불평만 하며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웃고 있었다. 사람들이 놀라서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그는 말했다. “이제 그냥 불행을 받아들이기로 했는데, 마음이 편하더군요.” 행복의 시작은 ‘불행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불행마저 품는 것’이다.
기도의 마지막은 그래서 바람이 멈춘 고요 속 미소다. 바깥세상이 더 이상 허물어질 것도, 세울 것도 없는 상태. 태양은 여전히 빛나고, 우리의 작은 전등은 그 아래서 조용히 켜져 있다.
그 순간, 인간과 하나님이 통화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