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퐁당 소리 하나의 의미

by 아침햇살

옛날 시골 풍경을 떠올려 보자. 일꾼들이 산 언덕에 소를 풀어놓고, 나무 그늘 아래서 낮잠을 자던 시절 말이다. 아무 일도 안 하고 누워 있는데 벌 한 마리가 윙윙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세상이 조용하다 못해 죽은 듯 고요하다가, 문득 눈을 뜨면 그새 나무 그늘이 옮겨져 있다.


그때 우리는 깨닫는다. 세상이 멈춰 있는 것 같아도, 언제나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구나.


살다 보면 이런 ‘그늘의 이동’을 우리는 자주 잊는다. 회사 일에 휩쓸리고, SNS 피드에 묻혀 있다 보면 나의 지금이 멈춰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하지만 인생은 마치 돌멩이 하나 퐁당 던진 연못과 같다. 파문이 일고, 잠시 물결이 번지다가 결국은 다시 고요해진다.


그 퐁당 소리가 인생의 시작이고, 물결이 우리의 이야기이며, 다시 잔잔해지는 그 순간이 삶의 끝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그 단순한 진리를 자꾸 복잡하게 만들어 버린다. ‘죽음’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불편하고, ‘멈춤’은 실패로 여긴다. 하지만 모든 인생은 결국 엔드 히 워즈 사일런스, “그리고 말이 없었다.”로 끝난다. 중요한 건 그 침묵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한 임금이 있었다. 백 살을 살고도 ‘아직 준비가 안 됐다’며 죽음에게 시간을 더 달라고 했다. 백 명의 아들 중, 오직 스무 살짜리 막내만이 “저는 준비가 됐습니다.”라고 나섰다. 이유를 물으니, 그는 말했다.


“아버지는 모든 걸 가져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으셨잖아요. 그렇다면 그게 인생의 답이 아니라는 걸 저는 이미 알았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통찰인가. 젊을 때 깨달으면 ‘조기졸업’, 늙어서 깨달으면 ‘재수생’ 일뿐이다.


소크라테스도 그랬다. “진리 말고 조용히 살면 목숨을 살려주겠다.”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말하지 않고 사는 건 죽는 거랑 같다.”


요즘 회사에서 자기 생각을 숨기며 눈치 보는 우리에게,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야, 그건 살아 있는 척이지 진짜 살아 있는 게 아니다.”


불가에는 한 스승이 있었다. 죽을 때조차 “내가 어떻게 죽을까?”라고 고민하다가 결국 거꾸로 서서 죽었다. 누이가 와서 “제발 똑바로 죽어라” 하자, 그제야 웃으며 바로 누워 죽었다. 삶을 너무 진지하게 대하지도, 너무 가볍게 대하지도 않은 사람의 마지막 미소다. 예수께서도, 장자도 그랬다. 자기 죽음조차 여유롭게 받아들였다.


장자는 “하늘과 땅을 내 관으로 삼겠다”라고 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장례식장 예약 안 해도 됨. 자연산이 최고”라는 뜻이다.


결국 모든 지혜는 여기에 있다. 인생에는 네 가지 좋은 길이 있다.


하나는 이 세상에 안 태어나는 것,
둘째는 아주 일찍 가는 것,
셋째는 이것이 꿈인 줄 알아차리는 것,
넷째는 서로 사랑하는 것.


물론 1, 2번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으니, 결국 남는 건 셋째와 넷째다. ‘이건 결국 꿈이야’ 하고 한 발짝 물러서거나, ‘그래도 사랑이야’ 하고 누군가를 보듬을 때, 우리는 그제야 고요를 느낀다.


요즘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움직이라고 한다. ‘성취해라, 나아가라, 멈추면 안 된다’고. 하지만 큰 슬기란 멈춤 속을 바라보는 능력이다.


고요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 안의 의식을 듣는다. 기도와 명상, 예배가 모두 그 훈련이다.


이미 죽은 자의 고요함과 조율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진짜 살아 있는 것이다. 밤의 어두움이 별을 보이게 하듯, 인생의 다크 나잇은 출구가 감춰진 문이다. 어두움을 견디다 보면, 그것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친근해진다. 왜냐면 그 어둠이야말로 우리가 다시 태어날 자궁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 그늘이 옮겨가도, 파문이 사라져도, 누군가 웃고 떠나도 인생은 여전히 ‘움직임 없는 움직임’ 속에 있다. 우리의 퐁당 소리 하나가 다시 세계를 고요하게 만든다. 그러니 오늘 하루도 마음의 연못에 조용히 돌 하나를 던져 보자. 그 파문 속에, 당신의 진짜 삶이 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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