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요, 정말 괜찮으신가요?

by 아침햇살

요즘 사람들은 놀랍도록 “괜찮아요”를 잘 말한다. 시험에 떨어져도, 연애에 실패해도, 부모님의 병세가 깊어져도, 심지어 “마음, 괜찮죠?”라는 질문에도 자동으로 대답한다. “괜찮아요.”


그 말이 마치 삶을 지탱하는 주문(呪文)처럼 반복된다. 하지만 정말 괜찮은 걸까? 아니면 그 말조차 입에 익은 ‘감정의 자동응답기’일까?


미국 사람들은 넘어져도 “I’m all right!” 하고, 피가 나도 “Don’t worry!”를 외친다. 멋지다. 혹은 멋지게 보여야만 하는 사회의 훈련일지도 모른다. 불안과 고통을 깔끔히 포장하는 긍정의 습관. 하지만 그 긍정이 지나치면 마음의 근육은 단단해지지 않고, 오히려 감정이 굳은 콘크리트처럼 딱딱하게 굳어진다. 결국 누군가 죽어도 “He’s doing fine.”이라고 말하고, 장례식장마저 ‘쿨’하게 마무리된다. 아픔 대신 꼿꼿한 미소, 눈물 대신 건조한 말투. 그렇게 인간의 따뜻한 진폭이 줄어든다.


한국은 정반대였다. 조금만 아파도 “아이고 큰일 났네”라며 감정의 파도가 밀려왔다. 남편이 죽으면 땅을 치며 통곡하고, 친구가 떠나면 한숨처럼 울음을 토해냈다. 그 울음 끝에서 삶은 다시 시작되곤 했다. 눈물이 인간만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울고 나면 웃을 수 있고, 슬픔을 통과하면 비로소 자애에 이른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얼굴에는 눈물의 흔적도, 웃음의 주름도 희미하다. 울지 못하고 웃지 못하는 시대. 감정이 ‘표정 이모티콘’으로만 존재하는 시대가 되었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감정 억압형 회피’라고 부른다. “마음이 늘 괜찮아야 한다”는 강박은 불안을 잠시 덮어줄지 몰라도, 언젠가는 내면의 마그마처럼 폭발한다. 그럴 때 필요한 건 억지가 아니라 용기다. 스승이 제자에게 말했듯이, “두려워하지 말고 그냥 떨어라.” 떨림이 나쁜 게 아니다. 떨림은 살아 있음의 증거다. 오히려 끝까지 떨다 보면, 어느 순간 고요의 강으로 건너간다. 그것이 진짜 ‘괜찮음’이다. 덮는 게 아니라, 통과하는 것.


사람들은 강해지기 위해 눈물을 참지만, 정작 강함은 감정의 끝까지 가본 사람에게만 찾아온다. 분노의 끝에는 자비가, 슬픔의 끝에는 평안이, 사랑의 끝에는 두려움이 없는 순수가 있다. 그것이 바로 각자의 십자가다. ‘괜찮다’는 말의 허영이 아니라, ‘괜찮지 않다’를 받아들이는 겸허함이다. 예수는 눈물을 흘렸고, 분노했고, 사랑했다. 그가 인간의 모든 진폭을 살았기에 신의 고요에 닿을 수 있었다.


오늘 우리는 너무 쿨하다. 너무 효율적이고 너무 바쁘다. 감정을 정리하느라 마음을 잃고, 괜찮은 척하느라 존재를 잃는다.


그러니 가끔은, 그냥 떨자. 삐걱거리며 울고, 어설프게 웃자. “괜찮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용기를 내자. 그때 비로소 진짜 인간의 온기가 돌아온다. 그 온기 속에서 삶은 다시 윤기를 얻고, 영혼은 다시 웃는다.


그러니 물을 수 있다. “괜찮아요?”
그때의 대답은 이렇다. “아뇨, 안 괜찮아요… 그런데 괜찮아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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