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함을 써먹을 줄 아는 사람

by 아침햇살

요즘 사람들에게 ‘심심하다’는 말은 거의 욕이다. 누가 SNS에 “요즘 좀 심심하네…”라고 올리면, 댓글에는 “취미를 찾아봐”, “운동해”, “드라마 봐!” 같은 조언이 줄줄이 달린다. 심심하다는 건 마치 자기 관리에 실패한 사람의 신호로 해석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심심해서가 아니라, 심심할 줄을 잃어버린 데 있다.


생각해 보면 스마트폰이 생긴 이후 우리는 기다림을 잃었다. 지하철역에서 3분만 기다려도 ‘심심함을 견디지 못해’ 핸드폰을 꺼내 든다.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는데 5분 늦는다고 하면 즉시 TikTok, Reels, Shorts 세계로 피신한다. 세상에 그렇게 짧고 자극적인 영상들이 많은데, 우리 뇌는 언제 쉬겠는가.


가끔은 기다림이 필요하다. 호텔 로비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데 상대가 오지 않는다면, 그냥 멍하니 천장을 보며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껴보는 것도 괜찮다. 멍한 순간은 ‘뇌의 환기시간’이다. 잡생각도 잠시 멎고, 공기의 질감과 햇빛의 색이 새삼 다르게 느껴진다. 이런 게 바로 ‘도(道)’의 시작이다.


태극권 같은 동양 무술도 사실 이런 원리를 품고 있다. 격렬한 격투 대신 나뭇가지처럼 천천히, 우주의 숨결에 맞춰 몸을 움직인다. 아무 소리도 없지만, 그 안에는 아주 느리고 강한 힘이 흐른다. 마치 봄날에 나무가 물소리도 없이 잎을 피우듯이 말이다. 천천히 움직이는 몸의 리듬 속에서 마음은 깨어나고, 세상의 ‘빨리빨리’ 병은 잠시 멈춘다.


어느 여름날, 아이가 엄마 등에 업혀 자는 모습을 본 적 있는가? 그 느릿한 숨소리, 코에서 새어 나오는 조용한 리듬은 주변의 모든 소음을 멀리 밀어낸다. 그때의 평화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음’에서 온다. 그런데 바로 거기, 노곤함과 맑음이 공존하는 그 자리가 진짜 도의 자리다.


현대인은 끊임없이 뇌를 놀려야 직성이 풀린다. 일하면서 스트레스받고, 쉬면서도 “이래도 괜찮은가?”라는 생각에 다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나 심심함은 정신의 숨구멍이다. 빈 시간은 결핍이 아니라 회복의 공간이다. 세 시간 동안 늦게 오는 친구를 기다리며, 멀리서 사라지는 비행기 소리를 듣거나, 이름 모를 이들의 걸음걸이에 시선을 두어 보라. 그게 명상이다.


예전에 깨진 거울 조각을 하나 주웠다. 네모 반듯한 거울보다 그 조각에서 더 많은 세상이 비쳤다. 돌려보면 하늘도 뒤집히고, 건물도 비뚤게 비친다. 그런데 그 왜곡이 오히려 자유로웠다. 완전하지 않음이 주는 기이한 평화랄까. 아마 우리 마음도 조금 깨져야 세상을 제대로 비출 수 있는지 모른다.


니체는 단잠이 “모든 덕의 근원”이라고 말했다. 깊은 잠에 빠지려면 몸이 먼저 느려야 하고, 마음이 먼저 심심해져야 한다. 심심함은 게으름이 아니라 깨어 있음의 준비 동작이다. 태양이 매일 뜨고 지듯이, 아무 일도 없는 반복 속에서 우주는 꾸준히 자신을 유지한다. 인간도 그래야 한다.


도란 그런 것이다. 무슨 거창한 수행이 아니다. 단지 “이것이 이런 줄 알고 지나가는 자세.” 급하게 해석하지 않고, 느긋하게 바라보는 태도다. 사자도 하루의 대부분을 멍하니 보내는데, 만물의 영장이란 인간이 왜 그렇게 바쁘게 살아야 하겠는가.


심심함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에게 두 가지 기적이 일어난다. 첫째, 사람이 사악해질 수 없고, 둘째, 웃음이 마르지 않는다. 그 웃음은 자극의 결과가 아니라, 고요함이 길러낸 여유다. 바위 정원 앞에 앉아 한참을 들여다보는 일본 승려들처럼 말이다. 아무 일도 없는 자리에 오히려 세상 모든 일이 일어난다.


그러니 다음에 심심하다고 느껴지면, 핸드폰 대신 고요를 집어 들어라. 그건 ‘심심함을 써먹을 줄 아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비밀한 사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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