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세상은 '스마트'하지만 '크레이지'하다. 정신병원에서 볼트 하나 뽑아 차를 고치는 천재가 "내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미쳤기 때문"이라고 웃으며 말하듯, 우리는 지능으로 세상을 정복했지만 정신은 산으로 간다. 기업이 진공청소기처럼 수천억을 빨아들이고, 콘크리트 속 생존자가 기적처럼 살아나며, UFO가 한반도 상공을 배회한다. 이런 불가사의 속에서 종교는 '하이퍼콘드리아 환자'처럼 죄책과 자기를 미화하는 피난처가 되기 쉽다. 팔십 살에 죽은 어느 분의 비문 "이래도 내가 거짓말인가?"처럼, 우리는 병리적 자기 비하를 사랑한다.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매번 새로운 병을 찾아 헤매던 환자가 결국 “이 마을에 의사가 당신뿐인 줄 아느냐?”라는 말만 남기고 떠난 것처럼, 많은 사람은 영적 불안을 해결하기보다 ‘나는 원래 죄인’이라는 역할극으로 마음을 달랜다. 미신은 근거가 없더라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소한 뭔가 하고 있다는 심리적 통제감을 주기 때문에 계속 소비된다.
문제는 종교가 이 통제욕을 부추기며 현실의 이익과 안전만 보장해 주겠다고 할 때, 금세 복음이 아니라 미신으로 떨어진다는 점이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종양, 죽어가는 바다, 살인적인 더위와 같은 재앙의 이미지는 오늘 우리가 환경 파괴와 기후 위기 속에서 겪는 자업자득의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이때 시편 73편의 시인처럼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며 “나만 손해 보고 사는 것 아닌가”하고 흔들리다 보면, 신앙도 함께 미끄러질 수 있다.
그러나 시편 기자가 성소에서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며 악인의 형통이 결국 아침 안개처럼 사라질 것임을 깨달았듯, 깨달음의 순간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온다. 하나님이 꿈에서 깨어나듯 악몽을 지워 버리시는 분이시라면, 지난 과거 한반도를 뒤덮었던 역사적 악몽 또한 그분의 때에 걷힐 수 있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이 관점이 들어올 때, 눈앞의 불의와 불안보다 하나님의 정의와 회복을 더 크게 기대하는 믿음이 시작된다.
장자가 "신발 주위 백목 선 하나가 아니면 벼랑에서 설 수 있느냐?"며 쓸모없음을 사랑하라고 한 건 웃기면서도 통찰적이다. 우리는 하루 8시간 잠, 휴일 놀이로 '쓸모없음'을 실천하며 존재한다. 도인 제자가 "아직 멀었다"라고 울부짖을 때 "네가 뭘 안다고? 일어나라!" 소리친 스승처럼, 그리스도는 "네 죄를 사하였다. 너 멀쩡하다"라고 선언한다. 현대인의 불안은 뇌 과부하 탓이다. 미신은 공포를 키우지만, 이 선언은 심리적 해방, 즉 자기혐오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씨앗을 믿고 일어나라는 것이다.
아랍 도둑이 카펫을 '백'에 팔며 "백 너머에도 수 있습니까?"하고 물은 건 인간 합리주의의 한계를 보여준다. 재판장에서 "후 미? 저 말입니까?"하고 반복하는 도둑처럼, 우리는 지구 파괴 책임에서 도망친다. 환경? 단군 이래 처음 부르는 말, 우리 인구 폭발과 오염 탓이다. 출구는 몸 쓰기. 바닷가 새떼가 해 지는 걸 직감하듯, 지진 전 쥐·돼지가 아는 건 뇌 아닌 몸 때문이다. 예수의 "천기는 아는데 이 시대는 모르느냐?" 말씀처럼, 종교는 가슴 직감으로 시대를 예감해야 한다. 뇌 50만 년 vs 몸 수백만 년. 스마트에 미친 세상에서 몸으로 깨닫고 청소하라.